전통적인 벽화(壁畵)와 비교되는 것에 그라피티(graffiti)가 있다. 그라피티는 미국 뉴욕 브롱스(Bronx) 슬럼가에서 유행하며 시작된 대표적인 슬럼 문화로 MC(래퍼), DJ, 비보이와 함께 힙합의 4대 요소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라피티(graffiti)의 어원은 ‘긁다, 긁어서 새기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graffito'와 그리스어 'sgraffito'이다. 사실상 일종의 낙서인데스프레이 페인트 등을 이용해 거리의 빈 벽에 주인 허락 없이 글자나 그림을 그리면 범법행위가 되기도 한다.
그라피티는 출발선이 전통 벽화와 다르다. 전통 벽화는 기존 질서 선전, 혹은 허용된 내용을 전하지만 그라피티는 뭔가 삐딱한 시선, 혹은 도전적이거나 반항적인 내용을 담고 시작했다. 이런 그라피티가 확실한 예술로 인정된 것이 뱅크시가 그린 그림들이다. 뱅크시는 예술의 허위의식뿐만 아니라 인간의 가식적인 모습을 풍자하는 그림을 벽에 그려 비판했다. 이렇게 시작했지만 그림이 유명해지면서 (뱅크시는 낙서에 머물고 싶었겠지만) 비싼 예술 벽화 작품으로 대접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뱅크시 그림이 예술 가치를 갖게 된 것은 구호에 머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림만 있는 벽화가 부조리한 사회 모습을 살짝 비틀어 보여 주기에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불합리함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벽화 그림에 잡다한 글이 있다면 사실상 구호나 주장을 외치는 대자보에 다름 아니다. 뜻을 바로 인식하게 만드는 글의 특성으로 인해 그림이 부차적이 되거나 장식물이 되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사진도 마찬가지다.
서울 종로 2가 관철동 골목에 있는 홍길동 중고서점 벽에 그려진 그림으로 인해 며칠간 대한민국은 큰 논란이 일었다. 이 그림은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부각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부인 김건희 씨에 대한 찌라시성 소문을 글과 함께 그림을 그렸다. 건물 소유주이고 홍길동 중고서점 대표인 여정원 씨는 2019년쯤 호주 멜버른으로 여행을 갔는데 벽화 거리에서 봤던 그림을 몇 개 뽑아 작가에게 의뢰해 그린 것이라 했다. 중앙일보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그림은 호주에서 본 그림을 그대로 옮긴 것이니 예술성을 논할 수준은 못된다. 여기에 같이 쓰인 글은 사실상 소문을 적은 화장실 낙서 수준이다. 그런데 이런 글을 공공장소에 써 놓은 순간 별다른 의도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워진다.
여 대표는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즐겨 보는데 최근 유튜브에선 쥴리 콘텐트가 도배돼 있었다. 별다른 의도 없이 그냥 쥴리 생각이 났다. 정치적 의도가 없었다. 윤 전 총장 부인이 직접 나서 본인은 쥴리가 아니라고 해명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쥴리의 실체는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을 표현한 것이다. 대선 주자라면 국민에게 검증받을 의무도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인터뷰에서 답했다.
본인이 쥴리가 아니라고 했는데 '영부인의 꿈'이라는 글은 왜 적었을까? '영부인'이란 단어 때문에 정치적 의도는 자연스레 획득됐다. 쥴리 의혹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설사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 대한 비난을 목적으로 했다 해도 저런 식은 아니라고 본다. 여성 개인에 대한 비난이 지나쳤다. 물론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의 부인이니 검증 차원에서라도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하지만 개인인 여성에게 (요즘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하며 종종 들리는 말인 : '법적 잘못이 없는데도'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과도한 처사이고 방법도 너무 저급하다.
한마디로 정치판에서 상대방을 깎아내리기 위한 전형적인 방법이다. 다짜고짜 지나는 말로 타격이 될 만한 사항을 슬쩍 말한다. 그 뒤 주변 스피커가 떠들고 일반 대중은 이 소리에 반응하고 전염되고 각인된다. 히틀러 밑에서 국가 대중계몽 선전장관을 지낸 파울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가 능숙하게 사용했던 방법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정치적 팬덤을 가진 사람의 말은 지지자에 의해 유튜브와 SNS로 확산된다.)
정치적 의도가 없다고 말한 여 대표 의견을 존중한다 해도 이런 대한민국 상황을 잠시라도 생각했다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결국 분란의 중심지가 됐다.('홍길동 중고서점'이 널리 알려진 것이 의외의 소득?)
정치적 반대 진영 사람들의 격렬한 반발이 일어났다. 그림 그려진 것이 알려진 다음날부터 차량과 마이크 등을 이용한 시위가 골목길을 채웠다. 여기에 반대쪽 사람도 오면서 말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그림과 함께 써진 글귀를 흰색 페인트로 지우면서 골목 안 소란은 잠잠해졌다. 차량은 불법주차로 경찰이 단속해 치워 졌다. 그런데 지워진 글씨를 누군가 다시금 써놓았지만 건물주 측은 곧바로 검은 스프레이 페인트로 지웠다.
이런 논란을 보면서 든 걱정은 대선을 통해 대한민국을 이끌 차기 대통령을 뽑는 과정이 자칫 혼탁해질 우려가 많다는 점이다. 미래를 준비하는 능력이 있는 지를 엄중하게 검증해야 할 과정이 증발하고, 확실하지도 않은 음해성 과거에 매몰될까 불안하다. 사실 대한민국은 2020년 11월 1일 기준 전국 250개 시군구 전체가 65세 인구 비율이 7%가 넘는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다.(조선일보 2021년 7월 30일 금 1면)
우리 앞에는 (이미 진행 중인) 급격한 인구 감소, 국민연금 지속 여부, 건강보험 재정 건전성, 대한민국 경제 성장 지속 여부 등과 함께 당면 문제인 부동산 가격 급등, 청년층 취업난 등 많은 문제가 놓여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가진 사람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고, 대선 기간 중에 후보 간 논쟁하고 토론해야 하는데 엉뚱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는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이 답답하기만 하다. [빈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