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로 나온 '폭군이 되는 법'은 6회 차로 된 시리즈물이다. 시즌1이라 한 것을 보니 시즌이 이어진다면 아마도 근대가 아닌 고대의 폭군 이야기가 더 나올 것 같다. 특이한 '별종 한류'의 영향이 여기서 보인다. 대한민국이 아니라 '주체사상'이라는 신앙을 창조하고 3대를 이어간 북한이다. 시즌1의 결말인 6회 차에서 북한 정권을 다뤘는데 근현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폭군 정권으로 본 것이다.
매 회차마다 대표적인 폭군, 독재자를 등장시켜 그가 사용한 방법을 핵심 문장으로 요약한 뒤 설명한다. 6회 차까지 이어지면서 핵심 문장 33개가 나온다. 이 글은 시리즈를 보면서 거의 내레이션을 정리하듯이 요약했고 내 생각을 살짝 덧붙였다. (글 분량이 많으니 핵심 문장 적은 소제목만 보아도 무엇을 말하려는지 대충은 알 것이다.)
시리즈는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로 시작해 소련의 이시오프 스탈린, 우간다의 이디 아민, 리비아의 무아마르 가다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북한의 (김정은까지 이어진) 김일성 왕조까지 이어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민주사회는 언제든지 이런 독재 폭군이 등장할 수 있는 체제라는 것이다. 실패한 화가였던 히틀러도 합법적으로 잔혹한 독재자가 될 수 있었다. 당연히 권력을 가진 뒤 자신을 위한 체제를 구축하고 공고히 하는 과정을 거치면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가진 민주적인 의식과 사회 체제는 이를 깨뜨리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물론 북한처럼 (현재까지는) 성공적인 독재 왕조를 구축해 가기도 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떤가? 시리즈를 보고 나니 202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대한민국, 어떤 모습이 될 것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폭군이란 잔혹하고 억압적인 통치자를 말한다. 독재는 결실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부이다. 어려운 시절일수록 '나만이 전부 해결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작가이자 정치평론가인 앤드류 설리번은 "인간 역사상 자유는 표준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지배받는 것을 좋아한다. 역사상 성공한 폭군은 위에서 아래까지 사회를 전부 바꿨다. 당연히 이런 체제에 대한 불만이 생기거나 외부 조건이 달라지거나 다른 나라와의 갈등이 커지면 군사적 방법까지 동원되는 충돌이 생긴다. 이런 충돌의 결말은 비극적이다. 비극의 주인공은 폭군이 당사자지만 결국 많은 일반 대중이 감당해야 한다. 당사자는 나름 재밌는(?) 삶을 일정 기간이라도 즐겼지만 대중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물론 나치 체제하의 독일 국민도 같은 생각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으니 일정 부분 행복했을 것이다. 마오쩌뚱 치하의 홍위병이 지닌 의식도 그랬을 것이고 현재 북한 주민의 생각도 비슷할 것이다.
시리즈는 몇 가지 핵심 요소를 뽑아 폭군형 지도자가 되는 법을 알려 준다. 근대 세계사에 등장한 폭군들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밝혀낸 사실들이다.
1.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자신이 먼저 가져라.
과대망상적이라도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져라. 스스로를 해방자로 보라. 자신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해라.
김정일이 탄생하자 하늘에 밝은 샛별이 뜨고, 쌍무지개가 뜨고 겨울이 봄이 되었다. 사담 후세인은 신이 자신이 이라크를 영원히 통치하라고 성유를 발라주었고, 은혜의 증거로 죽음을 면할 때가 있었음을 알렸다. 아이티 독재자 푸랑수아 두발리에는 자신이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을 초래한 '부두'의 힘을 지닌 영원한 존재라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1차 대전 참전 시 참호 속에서 '나가라'는 소리를 듣고 나왔다가 자신만 폭탄을 피했다고 말했다. '난 몽유병자 같은 자기 확신으로 운명을 향해 걷는다'는 히틀러의 말처럼 자기도취 성향이 강해야 한다.
2. 추종자가 있어야 한다.
완벽한 사회는 폭군에게 끌려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의 영혼을 동요시킬 메시지가 필요하다. 어떤 사회이든 이미 화가 나 있거나 불만족한 사람이나 계층이 있다. 이들을 부추겨 탓할 사람을 만들고 격분하게 만든다.
분노 대상에 복수하는 수단으로써 폭군 자신을 제공한다. (왜 이 부분에서 대한민국 현재를 돌아보게 되는지...) 카다피는 봉건 군주제를 비난하고, 이디 아민은 영국 식민정책을 규탄하고, 김일성은 일제에게 받은 굴욕을 상기시켰다. 히틀러는 월가의 금융인, 소련의 공산주의자 모두 기본적으로 유대인이 만든 음모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그 뒤 연설의 많은 부분에 혐오를 담았다. 유대인을 배척하고 복수심을 부추겨 독일이 다시 서야 한다는 국가적 자존심을 강조했다.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즉 나치가 탄생하자 그의 모든 말에 귀 기울이는 추종자가 생겼다. 일반 국민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히틀러는 말했다. 사람들이 히틀러와 동일시하면서 히틀러의 말은 잘 먹혔다. 공통된 불만은 사람들을 결집시키는데 좋은 방법이다. 연대하는 사람이 있고 강한 지도자가 있다. 결국 외부 위협에 대항하고 이끌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3. 국민의 남자가 된다.
초기에는 지도자도 일반 대중과 같다고 보여줘라.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나는 국민의 아들, 시골 출신 대장장이 아들이라며 소박한 뿌리를 강조했다. 카다피는 지방 출장 시 전통의상을 입고 베드윈(bedouin)처럼 전통 천막을 사용했다. 우간다의 이디 아민도 초창기에는 지프차 타고 전국을 다니며 아코디언 연주하면서 친밀도를 높였다.
밖으로 드러나는 의상은 소박하게 입는다. 히틀러는 제복만 고집했다. 1차 대전에 참전해 살아 나왔다는 것을 은연중에 보여주었다. 히틀러가 자신의 상징이 된 칫솔 모양 콧수염을 하게 된 이유도 여러 가지가 있다. 히틀러도 젊어서는 길게 기른 카이제르 수염 형식을 하고 있었다. 1차 대전 당시 방독면 착용을 위해 빌렐흠 황제 같이 길었던 콧수염을 짧게 잘랐다는 것이 한 가지 가설이다. 또 다른 가설은 당대의 독일 영웅인 한스 쾨펜(Hans Koeppen)을 흉내 냈다는 것이다. 가장 유력한 근거는 칫솔 모양 수염이 당시 유럽 중하류층 남성 사이에서 유행했다는 점이다. 결국 난 그들과 같은 출신임을 은연중에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히틀러는 연설에서도 "난 오로지 독일 국민에게만 관심 있습니다. 오로지 그들의 일원이며 그들을 위해 나를 바칩니다."라고 말한다.
4. 세력을 브랜드화 하라.
히틀러는 이미지, 즉 브랜딩의 힘을 알고 있었다. 지구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문양이 된 '하켄 크로이츠'(독일어: Hakenkreuz)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당기로 제정되었다가, 1935년 9월 15일에 독일 국기로 제정되었다. 휴고 보스(Hugo Boss)의 디자인으로 알려진(아니라는 이야기도 있다) 제복은 또 하나의 상징이다. 제복을 입으면 자신보다 더 중요한 어떤 움직임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고 당시 나치 독일인의 기본 정서인 희생, 의무, 복종과 충성을 의미했다. 결국 한 팀이란 뜻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시청 광장을 가득 메운 붉은 악마 응원단복도 같은 것이다. 다만 국가대표 축구팀 응원단을 넘어 국가주의자의 단복은 응원단복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지게 된다. 특히 복종의 의미를 단결이라고 설득하고 세뇌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세력이 커지면서 기획된 거대한 행사의 화려함은 여기에 속한 사람들을 취하게 만들고 더욱 일체감을 갖게 만든다.
휴고 보스(Hugo Boss)는 독일의 토털 명품 패션 브랜드이며 주로 남성 의류를 전문 제작 판매한다. 1924년, 후고 페르디난트 보스에 의해 메칭겐에서 설립되었다. 당시에는 소규모 의류 제작 공장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대공황기 독일의 경제난으로 파산에 몰렸다가, 1931년에 채권자들과 계약을 맺어 재봉틀 6개를 가진 공장으로 다시금 일어서게 된다.
-나치 관련 흑역사-
같은 해인 1931년, 후고는 나치 당에 입당, 나치 친위대의 협력 당원이 된다. 이에 힘입어 그의 사업은 번창하게 되는데 매출이 3만 8260RM(라이히스 마르크, 1932년 미화로 2만 6993달러)에서 330만 RM로 늘어났으며 그의 수익 역시 5000 RM에서 24만 1000 RM로 늘었다. 그는 1934-1935년에 공개된 광고에서 '1924년 이후 나치 제복을 제공한 회사'라고 주장했으나, 그가 나치 정부로부터 라이히스 게 마이스터 라이(나치 당 공인) 면허를 얻은 1928년 이전까지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그의 회사는 돌격대(SA), 친위대(SS), 히틀러 유겐트, 그리고 나치 차량대의 정복을 정식으로 공급하게 된다. 전쟁 후기에 들어서 정복 제작을 위해 발트 국가들,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폴란드, 체코, 소련 등 각 지역 출신 전쟁 포로들이나 이들 국가 출신 포로들을 강제 노역시키기도 했다. [나무 위키 발췌]
5. 진영을 키워라.
혼자 통치할 수는 없다. 자신을 대신해 일을 꾸미고 만들어 나갈 사람을 선택하고 키워 팀을 만들어야 한다. 구성원은 처음부터 자신과 함께 한 사람이거나 혹은 친족, 부족들이 될 수도 있다. 스탈린은 핵심 지지자들을 요직에 앉힌 뒤 경쟁자들을 숙청해 통제력을 장악했다. 결국 다양한 분야의 추종자가 필요하다. 경제적 후원, 권력자의 말과 이미지를 더욱 다듬어 보여줄 전문가, 등등.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권력자에게 절대 충성을 바칠 사람이어야 한다. 이 점이 민주국가와 국가주의 혹은 독재국가와의 차이점이다. 민주국가라면 국민 대다수를 위해 권력자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심하면 탄핵도 가능하지만 독재국가에서는 원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김일성은 친족만을 중용했다. 3대째인 김정은 위원장은 고모부 장성택, 이복형인 김정남도 죽였다. 피를 나눈 가장 가까운 가족만 믿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히틀러는 파울 요제프 괴벨스를 중용했다. 사실상 히틀러는 괴벨스의 능력으로 더욱 큰 권력을 장악했다. 국민계몽선전 장관에 기용된 괴벨스는 현대 매체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새롭게 등장한 영화라는 매체, 그리고 맹공격과 반복의 힘도 잘 알고 이용했다. 1945년 나치 독일 패망 전 자살한 괴벨스는 히틀러의 진정한 추종자였다. 잘못된 방향이긴 하지만 괴벨스는 진정한 충성심을 보여 주었다.
6. 공격의 때를 택하라.
압력이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인내심을 갖고 장기전을 준비한 뒤 어느 순간 갑자기 공격을 해야 한다.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 부통령일 때 10년이란 시간을 들여 비밀 경호국이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만들었다. 스탈린은 레닌의 신임을 받아 중책을 맡게 된다. 이디 아민은 군을 자신의 혈통인 카크와 부족 출신으로 꾸준히 채웠다. 결국 권력을 잡을 때 도움을 받게 된다.
히틀러는 1923년 성급하게 맥주홀 폭동으로 불리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나치당 무리를 데리고 뮌헨에서 바이에른 정치 지도자들을 인질로 억류한 뒤 권력을 양도하게 하려 했다. 결국 경찰 공격으로 실패해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된다. 이때 자서전 '나의 투쟁'(마인 캄프:Mein Kampf)을 루돌프 헤스에게 구술해서 책을 쓰게 만든다. 9개월 후 출소했지만 나치당은 2.6% 지지를 받는 초미니 정당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 증시 폭락과 함께 전 세계에 대공황이 닥치자 나치당에게 기회가 생겼다. 1932년 37% 의 득표율로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독재자가 아니었다. 1933년 2월 27일 제국의회 의사당 화재는 히틀러에게 '좋은 위기'였다. 나치당 공식 신문사에서 화재는 공산주의자 소행이라고 보도한다. 정치적 세력이 허약한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경찰국가 체제로 바꿀 것을 요구하고 관철한다. 결국 공식적인 칙령에 의해 적대 세력을 투옥하고, 나치를 제외한 정당 해체, 언론 탄압을 시작했다.
잠재적인 독재자들은 본능적으로 '사람들은 위협당하면 강력한 힘을 지닌 권위주의적 지도력을 원하고 강한 사람을 지지한다는 것'을 안다. 히틀러도 이를 알았다.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총리 겸 대통령이 된다.
우리나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이끌면서 사실상 쿠데타인 1979년 12.12 사태 때 군을 동원해 권력을 장악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 뒤 김영삼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을 통해 정권을 잡은 뒤 순식간에 하나회 소속 군부 내 사조직 세력을 제거해 또 다른 쿠데타가 발생할 수 있는 근원을 제거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자신의 힘이 찰 때까지 기다렸다가 때가 되자 전격적으로 일을 진행해 반발세력이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었다. 금융실명제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실행했다. 하나회를 제거한 덕분에 (군부 내 반발이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 임기 때 생길지도 모를 불상사의 근원을 없앤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결국 대한민국 민주화에 큰 초석을 놓은 셈이다. 그 덕에 대통령 탄핵이라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고 그럼에도 군이 나서지 않게 되었다.
권력을 장악한 뒤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자신이 표적이 된 것과 마찬가지다. 줄리어스 시저는 스스로 종신 독재자로 임명한 지 2년도 안돼 협력자들에게 살해된다. 콩고의 로랑 카빌라는 불복종한 군인 아들에게 집권 4년 만인 2001년 1월 암살당한다. 마찬가지로 라이베리아의 새뮤얼 도도는 집권 4년 만인 1990년 9월 정적인 군부 장성에게 체포된 뒤 고문받고 살해된다. 결국 권력을 잡은 뒤에는 정적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생명연장이 된다고 볼 수 있다.
7. 지배력을 확고하게 한다.
경쟁자가 시도한 경미한 모욕도 독재자는 참지 않고 반드시 제압하고 콧대를 꺾어야 한다. 그래야 만만하게 보고 도전하지 못한다. 마오쩌뚱, 스탈린, 쿠바의 카스트로, 이라크 사담 후세인 등 독재자들은 주변인을 통제하고 끝내 죽이기까지 한다. 방법은 다양하다. 가족을 해친다고 위협하거나 아예 당사자를 확실하게 죽였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정적에 대한 확실한 경고였고 추종자에 대한 충성 요구서였다. 권력자를 위한 조직과 여기에 종사하는 추종자들은 체제 유지에 확실한 기반이다. 사담 후세인은 외국으로 피신한 정적까지 전문 암살자를 동원해 죽였다.
8. 충성심을 사라.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근본적이고도 확실한 위협이고 몽둥이라면 금전적 보상, 제한적인 특권은 추종자에 대한 보상이다. 자신들의 리더를 따르면 쉽고 간단하게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실행한다. 정교한 '도둑 정치'를 통해 경제적 이득을 만들고 취한다. 국가 전체의 자원을 국유화해 통제하고 사실상 개인화해서 대규모의 이득이 독재자에게 향하게 만든다. 그 외에도 여러 분야를 통제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경제적인 이득을 집중시킨다. 그리고 얻어진 이득을 추종자에게 나눠 주어 충성심을 사게 된다. 딴생각 먹지 않으면 지금처럼 달달한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금고가 비지 않을 정도만 사용해야 한다.
사담 후세인이 사용한 방법은 독특했다. 갑자기 불특정 시민의 집을 방문해 냉장고를 살핀다. 최고 권력자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공포를 동반한 놀라움이다. 그런데 그가 텅 빈 냉장고를 가득 채워준다. 몇 가지 효과가 있다. 최고 권력자가 언제든 우리를 살피러 온다. 그리고 우리 삶을 윤택하게 바로바로 만들어 준다. 그리고 언제든 올 수 있다는 것은 항상 주시당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9. 심리 작전에 통달하라.
권력 주변부에 있는 최측근이라도 상습적으로 굴욕을 주어야 한다. 이 방법은 최고 권력자는 나뿐이고 당신들은 나를 위해 존재할 뿐임을 항시 각인시키는 효과가 있다. 김정은도 이 방법을 잘 사용하고 있다. 2021년 1월 북한군 총정치국장이 된 권영진은 이전 계급이 상장에 불과했다. 그런데 1달 만에 대장을 거쳐 차수로 진급했다. 결국 아랫사람이 자기보다 높은 계급에 오르니 자연스레 기존 고위층에게는 모욕과 함께 위협을 주었다. 권영진 총정치 국장도 지금은 좋지만 언제든 떨어질 수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10. 누구나 희생시킬 수 있다.
폭군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과격한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혈연관계라 해도 관용은 없다. 사담 후세인은 이를 실천했다. 자신을 배신해 이라크를 탈출한 두 사위를 회유해 돌아오게 만든 뒤 바로 살해했다. 김정은도 이를 실천했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위협요소가 있다면 고모부 장성택도 이복형인 김정남도 살해했다.
11. 난폭함을 숨겨라.
우간다의 이디 아민이 1971년 쿠데타로 집권한 초기에 사용한 방법이다. 그렇지만 공포를 이용해 군림해야 한다. 어느 정도 집권 기반이 다져지자 집권 9년간 그는 공포정치를 이어갔다. 자나니 루움 대주교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을 처형했고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한 뒤 적극 부인했지만) 죽인 사람 시신을 먹었다는 말이 나오는 등 각종 잔학한 기행을 일삼았다. 히틀러도 테레친 강제수용소를 적십자를 통해 공개했는데 건실하게 운영되는 유대인 거주지로 연출했다. 스탈린도 자신의 잘못된 농업정책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아사자 수백만 명이 발생한 사실을 검열과 허위정보로 언론을 조작했다.
12. 희생양을 선택하라.
히틀러는 취임 첫날부터 유대인을 박해할 계획을 세웠다. 스탈린은 1930년 소련의 경기 침체 당시 쿨라크라는 부농들이 부를 축적한 것을 비난했다. 카다피는 이탈리아계 재산을 몰수하는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보복의 날'에 그들을 추방했다. 우간다의 이디 아민은 인도계 아시아인을 목표로 삼았다. 영국 식민지 시절 철도 노동자로 와서 눌러앉은 사람들이었다. 숫자는 적었지만 대부분 대형 상점과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들이 우간다 경제를 좀먹는다고 선동했다. 결국 이들을 추방했다.
13. 법을 무기화하라.
독재자의 목표는 권력을 견제하는 모든 기관과 가드레일들을 무력화하는 데 있다. 이디 아민은 헌법의 일부 권한을 정지시킨 뒤 법령 통과 권한을 스스로 부여했다. 추방이 결정된 인도인들이 법에 호소했지만 이미 법은 유명무실해진 뒤였다. 이들이 운영하던 사업체는 보상도 없이 빼앗기게 되었고 우간다인에게 나눠주게 된다. 이디 아민은 인기를 끌게 되지만 운영하는 기술이 없는 우간다인들로 인해 곤란에 빠지고 경제는 엉망이 된다.
14. 고통을 주어라.
고문은 저항을 단념시키는 좋은 수단이다. 다양한 신체적 압박 기술은 공포를 극대화할 수 있다. 이디 아민은 체포된 사람이 고문실에서 일부러 탈주하게 만들어 그곳에서 당한 일을 전하게 만들었다. 생생한 공포의 확산법이다.
15. 전쟁을 일으켜라.
앞선 여러 방법이 효과가 없다면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한다. 지지기반이 약화되었지만 적국을 향한 적개심은 독재자에게 향한 분노를 희석시키고 국민을 결집시킬 수 있다. 우간다는 이웃 탄자니아를 침공한다. 시선 돌리기와 함께 쿠데타로 물러난 밀턴 오보테 대통령이 탄자니아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결과는 실패했다. 잘 훈련된 탄자니아 군은 오합지졸 우간다 군을 물리쳤다. 결국 이디 아민은 국외 탈출하게 된다. 전쟁을 하는 것은 최후 수단이기에 이길 수 있는 상대를 골라야 한다. 이디 아민은 잘못된 판단으로 자신이 몰락하게 된다.
16. 역사를 다시 써라.
스탈린은 선전, 허위 정보, 영리한 속임수를 써서 소련을 통치했다. 1922년 공산당 서기장에 임명된 스탈린은 자신의 욕망을 숨겼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조지 오웰의 책 <1984>에서 '오세아니아' 진실부(Ministry of Truth) 기록 관리원 윈스턴이 고문을 당하며 말한 영국 사회당 잉쏙(Insoc)의 구호다. '미친' 윈스턴을 '고쳐주기 위해' 고문하는 진실부의 오브라이언이 그에게 말한다. "현실은 외부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게 아니라 오직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다. 당이 진실이라 주장하면 그게 바로 진실이다." 이 말을 스탈린은 실천했다. 역사는 간섭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 사후 후계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레닌과 함께 있는 사진을 친밀함이 높아 보이도록 가까이 있는 것으로 수정해 공개했다. 자신이 더 커 보이게 만들었고, 얼굴의 천연두 자국도 없앤 뒤 화사하게 꾸몄다. 그리고 마차 사고로 다친 왼팔 길이도 늘였다. 사실상 최초의 포토샵 작품이다. 히틀러도 점령한 유럽 국가에 있는 1차 대전 기념관을 파괴했다. 패배한 과거 독일의 기억을 지우는 것이다. 김일성도 6.25 전쟁이 남한이 먼저 일으킨 것이라 주장했다. 마오쩌뚱은 대장정으로 (4500만 명이 굶어 죽었지만) 굶어 죽은 인민은 없다고 부인했다.
17. 모든 것을 검열하다.
정보를 통제해 소수 만이 진실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전달 통로를 감시해 전달하고픈 정보만 유통시켜 이것만이 진실임을 사람들이 믿게 만드는 것이다. 범죄율, 실업자 등 불리한 통계는 정부 비방과 다름없으니 통제한다. 재해 발생도 마찬가지다. 이 뿐만 아니라 볼쇼이 극장의 수리 상황 같은 사회의 소소한 모든 내용이 통제됐다. 이러한 통제 사회이기에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했고 확산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강력한 통제사회이기에 인간을 로봇처럼 사고가 난 핵발전소 현장에 투입해 나름 빠른(?) 수습을 할 수 있었다.
18. 외부인을 유혹하라.
1930년대 서방의 자유주의자, 좌익진영은 소련이 자본주의 세계를 휩쓸고 있는 대공황을 잘 대처하고 있다고 믿었다. 레닌은 이들을 '쓸모 있는 멍청이'라고 했다. 소련은 이들 '멍청이'들을 돈으로 구입해 자신들의 이야기에 동참시켜 유용한 선전도구로 이용했다. 스탈린은 사회주의 천국으로 좌익작가인 조지 버나드 쇼, 장 폴 사르트르, H.G. 웰스를 초청해 결국 독재 정권 얼굴에 신뢰와 정당성을 분칠 하게 만들었다.
스탈린은 뉴욕타임스 모스크바 지국장인 월터 듀란티(Walter Duranty)에게 독점 인터뷰를 제안한다. 스탈린의 장황하지만 멋지게 분칠 한 인터뷰 내용은 듀란티에 의해 신문 기사로 탄생한다. 그 뒤 외신기자들에게 출입 금지된 우크라이나 현장에 듀란티를 초청해 기근이 없는 곳을 선택적으로 보여준다. 듀란티는 깊은 시골을 지나가는 기차 속에서 심각한 상황을 보았지만 실제 상황과 달리 과장됐다고 기사를 송고한다. "러시아인들은 배고프지만 굶어 죽지는 않는다."는 내용의 기사는 퓰리처상으로 돌아왔다. 결국 전 세계에 스탈린의 명성을 높여 주었다.
초창기 히틀러도 영국의 윈저공 부부와 처음으로 대서양을 무착륙 단독 비행한 찰스 린드버그를 이용해 좋은 이미지를 만들었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는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절친 관계임을 보여주면서 폭압 정치인 이미지를 희석시켰다. 김정은도 미국 프로농구 선수인 데니스 로드맨을 초청해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부드러운 이미지를 만들었다. 한물 간 로드맨도 김정은을 만나며 자신의 주가를 올리는 목적도 있었다. 서로 간에 이득이 있는 거래였다. 북한은 이외에도 정부 관계자가 아닌 일반인을 초청해 자신들이 선택한 모습만 보여주면서 '쓸모 있는 멍청이'를 통해 체제 선전을 하고 있다.
19. 신을 무너뜨려라.
종교는 대부분 답할 수 없는 문제에 답을 한다. 공산주의 소련에서 종교의 교리가 대중의 아편이라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국민이 신을 외면하게끔 종교의 자리에 그들만의 신조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제공했다. 순교자 예수에 견줄만한 인물을 만들었다. 우랄 산맥 깊은 곳에서 살던 13살 파블리크 모로조프(Pavlik Morozov)라는 어리지만 열성 공산주의자였다. 대기근 시절 아버지가 몰래 곡식을 비축해 내다 파는 것을 본 뒤 비밀경찰에게 (아버지의 범죄행위:이렇게 해야 자신도 먹고살 수 있었을 텐데도) 알렸다. 아버지를 고발한 그는 친족들에게 살해된다. 이 일이 알려지면서 그는 영웅이 되고 친척들은 처형된다. 스탈린은 모로조프 이야기를 노래, 연극, 책, 오페라로 만들어 널리 알렸다. 그런데 소련 붕괴 후 이 이야기는 선전용을 조작되어 만들어진 가짜 인물임이 알려졌다. 결국 핵심은 종교를 국가로 대체시킨 뒤 국가가 인정한 진실은 신성한 것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가공의 이야기지만 진실로 믿게 만들어 신성불가침 영역에 두게 된다. 김일성 일가의 백두 혈통도 마찬가지다. 이미 김일성 3 부자는 신의 영역에 들어서 있다.
20. 과학을 부패시켜라.
이데올로기가 아닌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해 정확한 결론을 추구하는 과학 연구 문화는 독재자에겐 불편한 대상이다. 과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보다 진실이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스탈린의 과학은 이데올로기 신조에 좌우됐다. 어떤 과학적 사실이 특정 패러다임에 맞지 않으면 무시됐고 과학자들도 무시하도록 만들었다. 농생물 학자이자 유전학자인 트로핌 리센코(Trofim Lysenko, 1898~1976)는 소련의 식량 부족 사태 해결 방법으로 생물의 유전성은 전적으로 유전자에 달려있다는 당대의 유전학설을 부정하고 마르크스주의 원칙을 식물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식물을 추위에 방치하면 뒷세대가 후천적으로 형질이 유전되어 내한성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이 방식을 추구하는 리센코를 좋아했다. 크렘린으로 그를 초청해 현대 유전학을 맹공격하면서 과학자들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연설을 하게 한다. 결국 스탈린 지지를 얻은 그는 과학의 천재, 혁명가로 묘사된다. 리센코의 이론만 남고 다른 유전학 이론은 금지됐다. 교수들이 쫓겨나고 연구소가 봉쇄됐다. 생물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는 비밀경찰인 내무인민위원회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현실에선 더 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완전히 실패한 이론이었다. 결국 리센코가 1965년 실각할 때 리센코 주의 농업정책도 끝났다. 리센코가 특정 학문의 사실을 손보는 능력을 충성심으로 알아본 스탈린이 그를 기용한 것이다. 스탈린에게는 사실보다 충성심이 더 중요했다. 우스운 사실은 리센코 주의 농업정책이 마오쩌뚱 치하의 중공에서는 수년간 더 영향을 끼쳤다.
폭군에게 진실이란 논쟁을 일으키는 불편한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끈질기게 진실과 싸웠다. 국민의 삶과 정신을 조종하면서 역사를 다시 쓰고 현실을 조작하면서.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도 국가과학연구위원회를 해체하고 자신들의 기독교 신념을 따르지 않는 진화론을 거부했다. 히틀러는 과학 탐구 분야를 엄격 통제했다. 독일 순수 민족인 아리아인의 물리학에 반하는 유대인 학자 아인슈타인(아버지가 유대인, 어머니가 독일인이었다.)의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을 한동안 거부했다. 야히야 자메 감비아 대통령은 에이즈 환자에게 사흘 이내에 바이러스를 박멸할 수 있다며(말도 안 되는) 자신의 약을 쓰도록 강요했다.
21. 신뢰를 없애라.
시민들간의 결속 혹은 믿음은 독재자에게는 위협이다. 불신 현상은 매우 강력한 도구이다. 그 누구도 더 이상 믿지 않으면 기꺼이 자신을 국가 권력에 맡기게 된다. 모든 게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기자를 기레기라 부르며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가짜 뉴스라 주장하는 사람들 모습이 겹쳐 보인다.)
레프 보리소비치 카메네프(1883~1936)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연방 정권 성립을 선언한 전 러 소비에트 연방 대회 의장 등을 역임한 핵심 인물이었다. 1934년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사건 연루 혐의로 실각한 후 스탈린에 의해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오니트 니콜라예프와 함께 숙청된다. 1988년 소비에트 연방 대법원에서 사후 무죄 판결을 받아 명예 회복이 된다.
이런 핵심 인물의 반란 음모는 누구나 반역할 수 있다는 논리가 된다. 결국 충직한 시민이라면 서로를 감시해 반란 음모를 찾아야 한다. 대공포 시대(1936~1938)를 거치며 75만 명 이상이 죽었다. 스탈린은 "100명을 죽였는데 그중 5명이 인민의 적이면 나쁜 비율이 아니다."라고 메모에 적었다. 황당한 논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스탈린을 영웅으로 생각하는 러시아 사람들이 많다. 성공의 정의가 목표를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면 스탈린은 성공한 셈이다. 인적 자원을 마구 쏟아부어서(죽여서까지) 농경사회 러시아를 산업사회로 바꾼 것이니...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좋아하는 일부 백인 계층도 비슷한 것일까?)
22. 법이 되어라.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리비아에서 무학(無學)인 베드윈족 부모 밑에서 자란 무하마르 가다피는 성공을 위해 군에 들어갔고 이를 발판으로 성장했다. 26세 때 무혈 쿠데타로 군주제를 무너뜨린 무하마르 가다피는 국가 발전을 위한 선의로 시작했던 것 같다. 당시엔 해방자로 환영을 받았다.
독재주의 지배자들은 대중이 누릴 권리를 제한하며 규칙을 시행한다. 이것이 국가 국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주장한다. 가다피는 집권 4년 차인 1973년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표현의 자유와 집회권을 금지했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술을 금지하고 나이트클럽을 폐쇄했다. 개인적 이득을 보는 개인 사업도 금지, 간통은 손이 잘릴 수도 있었고, 노동조합 결성도, 파업도 금지했다. 식량 자급자족을 위해 외국산 닭 수입을 금지시키고 직접 키울 것을 지시한다. 점점 억압적인 정부가 되자 1976년 4월 학생들이 자유 회복 위한 시위를 한다. 가다피는 군을 동원해 진압한다. 1년 후인 1977년 4월 7일 시위 주동 학생이었던 오마르 다봅과 모하메드 벤 사우드는 반역죄로 처형한다. 그리고 이날을 국경일로 선포하고 매년 행사를 하면서 반정부 인사를 처형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법이 되어 그의 지시 사항이 법이 되는 것이다.
이란의 루홀라 호메이니는 1979년 집권 후 이혼법을 폐지하고 여성 결혼 가능 연령을 7세로 낮춘다. 독일의 나치 정부는 히틀러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엄격한 금연정책을 제정한다. 투르크메니스탄의 독재자 사파르무라트 니아조프는 2006년 콘서트에서 립싱크를 금지했다. 그리고 불쾌한 냄새를 없애기 위해 수도에서 개를 추방했다.
23. 유산을 건설하라.
히틀러는 아우토반을 건설해 독일인들이 전국을 쉽게 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당장 가시적인 효과가 생겼다. 스탈린은 모스크바에 지하철을 건설했다. 1931 개통하면서 사회주의 승리로 보도됐다. 루마니아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부쿠레슈티의 5분의 1을 허물고 완공까지 30억 달러를 들이고 3천 명이 사고로 죽고 13년에 걸쳐 인민 궁전을 지었다. 우습게도 완공을 보지 못한 그는 실각 후 살해됐다.
가다피는 1973년 이후 유가가 4배 오르면서 오일 머니가 풍부했다. 엄청난 돈을 이용해 남부지역 지하수를 끌어오는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30년에 걸쳐 시작한다. 일부 전문가는 이 세기가 끝나기 전에 물이 없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대수로가 완공되면서 가다피의 업적으로 부각됐다. (우리 정치인도 임기중 무언가 만들려 한다. 만든 뒤 그것에 국민에게 도움이 된다면 좋겠지만 텅 빈 지방 공항처럼 애물단지가 되진 않을지 지켜봐야 한다.)
24. 아이들을 세뇌시켜라.
대수로 공사의 성공도 시간이 지나면 잊게 된다. 그러므로 계속 이어지도록 교육해야 한다. 그렇지만 너무 똑똑하지 않을 정도로만 가르친다. 가다피는 자신이 지은 녹색서(Green Book)를 리비아의 성경처럼 이용했다. 가다피는 그 책의 구절을 항시 인용했다. 아이들은 '그린북' 내용으로 시험을 봤다. 그러면서 가다피 이전의 역사를 가르치지 않았다. 아이들은 가다피 외에는 알지 못하게 만들었다. 외국어, 세계 지리도 가르치지 않았다. 측정단위인 미터법을 서구의 억압으로 여겨 없앴다.
1984년 여름 벵가지의 아이들 수천 명이 특별 소풍이라면서 야외 농구장에 모였다. 농구장에서 미국 유학을 마치고 얼마 전 귀국한 30세 엔지니어인 알사덱 하메드 알슈웨디가 피고로 나와 공개재판을 받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테러 혐의였다. 그런데 죄인이 쉽게 죽지 않자 관중석에서 후반 벤 아메르라는 여성이 나와 그를 당겨 죽게 만들었다. 원래 사형집행관으로 재직하던 그녀는 그 후 집행자 후다로 유명해졌다. 이후 그녀는 가다피의 신임을 얻어 체육 관광부 장관까지 올랐고, 벵가지 시장을 두 번이나 역임했다.
25. 여성을 제자리에 두어라.
가다피는 특이하게도 여성도 남성만큼 동등하다고 하면서 여성 경호부대를 두기까지 했다. 혁명의 처녀로 불리기도 한 그녀들은 사실상 가다피의 하렘이었다. 그러나 가다피는 여성 경호원들과 자신이 외부에서는 어떻게 보여야 할지를 잘 알고 오히려 사진기자들을 이용했다.
26. 혁명을 수출하라.
히틀러는 점령지 프랑스에 꼭두각시 정권이 비시 정부를 세워 간접 통치했다. 스탈린은 동구권에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도왔다. 중공의 마오쩌뚱도 북 베트남을 도와 공산화를 부추겼다. 가다피는 전 세계 분리주의자들에게 자금을 지원해 도왔다. 결국 가다피는 서방 세계에서 테러리스트의 두목으로 간주된다. 자국민을 떨게 하는 게 쉽고 안전한데 가다피는 전 세계를 상대로 떨게 하는 잘못된 결정을 한 것이다. 독일 베를린 '라 벨' 디스코장 폭탄테러로 휴일을 즐기던 미군 수 백 명이 다치고 죽었다. 결국 미국은 1986년 4월 리비아를 공습한다.
27. 뜻을 굽히지 말라.
서방 세계의 강한 압박은 가다피의 정책을 서구 친화적으로 바꿨다. 시민의 자유가 신장됐다. 무엇보다도 국민 반발을 막는 좋은 수단인 고문이 중단됐다. 2011년 2월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가다피는 시위대에게 쫓기다가 붙잡혀 살해됐다. 결국 자신이 하던 대로 계속해야 집권을 계속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북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핵을 포기하고 개방한다는 것은 자신들이 죽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니.
28. 왕국을 고립시켜라.
3대 세습은 북한 만이 달성했다. 외부 세계와 자국민을 완벽하게 고립시켜 김일성 가문만이 통치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세웠다. TV는 채널이 한 개뿐이며, 전화는 도청된다. 북한 주민은 국내외 모두 허가 없이는 이동이 불가능하다. 이와 함께 정기적일 정도로 정권 주변부를 숙청해 긴장도를 높이면서 권력에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했다.
김일성은 소련 스탈린 방식으로 국가운영을 시작했지만 소련의 간섭이 부담스러워지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하길 원했다. 그래서 나온 국가 이데올로기가 '주체 사상'이다. '우린 모든 것을 우리 힘으로 할 것이다.'라는 다짐과 함께 북한 전체를 이끌기 시작했다. 외부세력 간섭 없이 일을 해나가는 고립주의를 자부심의 근원으로 바꾸었다. 외국과의 협력은 북한 주권을 파괴하는 행위이며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 아래에서 단결하는 것이라는 것이 주체 사상의 핵심이다. 결국 국가의 고립은 폭정을 공고하게 오래 유지하는 첫 단계이다.
29. 가족 내에서 이루어라.
북한 김일성은 근대 군주제를 북한 통치에 접목했다. 김정일은 스스로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체득해 실천한다. 그래서 선전 선동 부장 자리가 숙청으로 생기자 김정일은 그 자리에 올라 능력을 증명한다. 영화 피바다를 제작 지휘하면서 김일성 우상화를 돕는다. 성공적으로 일을 마치면서 후계자로 인정된다.
30. 사람들을 납치하라.
김정일은 납치를 국가적 도구로 이용했다. 무언가 필요하면 납치했다. 첩보원의 일본어 교육을 위해 일본인을 납치했다. 모든 형태의 권력은 이야기에 기반하고 스토리텔링과 담화에 관한 자신의 애정이 정권 영속의 노력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김정일은 깨달았다. 결국 영화 품질의 도약을 위해 A급 배우를 납치했다. 남한의 여배우 최은희와 신상옥 감독을 홍콩에서 납치했다. 이들의 의지를 꺾기 위해 5~6년간 감금한 뒤 이들을 자진 월북한 것으로 공개했다. 3년간 이들은 영화 17편을 제작해 북한 영화산업을 한 단계 높여 준다.
31. 신성을 주장하라.
아버지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를 높이지만 김정일 자신은 발전시킬 시간이 거의 없었다. 김일성의 항일 활동이 백두산 근처라고 선전했지만 실제는 만주였다. 김정일은 자신의 이야기를 가문의 신화에 첨가했다. 실제는 1941년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백두산에서 태어난 것으로 선전했다. 김정일 탄생은 제비 한 마리가 예고했으며, 겨울 하늘이 갈라지며 화려한 쌍무지개가 떴고 새 별 하나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집권과정에 자신의 생애를 초인적인 힘을 지닌 것으로 다시 쓰게 했다. 생후 3주에 걸음마을 시작하고 8주에 말을 시작했다는 식이다. 날씨도 통제하고 책을 1500권이나 저술했고 처음 하는 골프에서 홀인원 11개를 기록했다.
우리가 보기에 말도 안 되지만 김정일에게 신성한 통치권이 있다는 개념을 강화했다. 북한 주민에게는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였다.
32. 국민이 굶어 죽게 둬라.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대기근으로 아사자가 속출했다. 사실상 독재자에게 불쌍하고 배고프고 고립된 국민은 위협이 안된다. 당장 힘이 없어 정부와 맞서지도 못한다. 이미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의 대기근을 이용해 독립 의지를 꺾었다. 마오쩌뚱의 대약진 운동으로 수천만 중국인이 사망해도 국가 장악력은 약해지지 않았다. 에티오피아 독재자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은 1980년대 초 파괴적인 기근을 넘기고 나자 8년을 더 통치할 수 있었다. 북한은 소련의 지원을 받았으나 1990년대 초반 소련이 붕괴된 후 북한 경제도 추락을 시작했다. 경제 붕괴와 함께 극심한 기근으로 북한 주민 수십만 명이 굶어 죽었다.
1994년 김일성 사망은 평양시민들에겐 메시아의 사망처럼 여겨졌다. 김정일이 등장한다. 수백만 명이 굶는 상황이지만 북한이 미국 침략 위협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이론화시키고 영구화시켰다. 과거 한국전쟁 상황을 현재로 소환한다. 사실상 북한 전쟁 중임을 각인시킨다. 김일성과 함께 싸운 유격대처럼 하루에 1끼만 먹으며 견뎌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 독재자 김정일은 북한 주민의 희생을 독려하기만 하면 되었다.
북한 주민들이 굶어 죽어도 김정일은 고급 코냑 등 사치품을 즐겼다고 알려졌다. 물론 정보가 통제된 북한 주민은 모르는 일이다.
33. 핵으로 무장하라.
김정일은 불완전한 자신의 위치를 절대무기인 핵을 개발해 보완했다. 세계사 속의 절대 폭군들은 언젠가는 외국과 충돌하기 마련이다. 이때 힘이 절대 우위에 서지 못하면 쓰러진다. 그래서 김 씨 일가는 핵을 '보검'이라고 말한다. 핵개발은 김일성 일가의 가정사 이기도 했다. 김정일은 핵 개발 자금 마련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불법 거래, 위조 제품, 마약, 밀수 심지어 은행 해킹까지 다양했다. 김일성 사망 전 핵무기 원료 비축을 시작했다.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하고 뒤를 이은 김정은 시대에 핵무기는 완성되고, ICBM, 잠수함 발사 등 각종 운반 수단까지 개발했다. 사실상 핵무기 보유국인 북한은 권력과 권위 승계를 영속시킬 수 있게 되었다. 북한의 시스템은 지금도 건재하다. 이점이 다른 독재 정권과 다른 점이다.
무일푼의 낙오자에서 절대 권력자가 되려 한다면 지금까지 알려준 방법을 시행하라. 방해하는 라이벌은 다 물리치고 국민의 몸과 마음을 장악하고, 독재자 자신만을 위한 완벽한 사회를 만들고, 궁극의 무기인 핵폭탄 도움을 받아 영원히 통치할 수 있다. 자 누구나 될 수 있다. 이대로만 한다면... [빈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