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잔잔 Jun 26. 2022

Multi-Potentialite의 인생

하고 싶은 일이 너무도 많은,

유독 그런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나 많 다 하다 보니 깊은 전문가가 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을 보고 Multi-Potentialite라고 부른다.


내가 딱 그랬다. 어릴 때부터 나의 꿈에는 끝이 없었다. 멋진 수학 선생님을 보고 수학 교사를 꿈꾸던 적도 있었고, 동네 아줌마들의 인싸였던 경비아저씨를 꿈꿨던 적도 있었다. 상담을 해주고 싶어 정신과 의사를 꿈꾸기도 했고, 소설을 쓰는 작가를 꿈꾼 적도 있으며, 무한한 우주를 연구하는 천문학자를 꿈꾸기도 했다.


나는 삶의 모든 배움들이 거웠다. 슨 과목을 가장 좋아하냐는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전부 다 재미있었으니까. 주위 친구들은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정말로 그랬다. 세상은 배움의 즐거움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꿈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었 까닭은 아마 그래서가 아니었을까. 


고1이 되던 해, 우연히 뮤지컬을 처음 보게 되었고, 관객과 호흡하는 무대 위 배우들의 생생함을 보며 그날 이후 연출가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돌이켜보면 그 마저도 당시 남자의 자격으로 유명했던 박칼린 감독님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같지만, 여하튼 그 꿈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 계속되었다. 


그렇게 고3이 끝나가던 어느 11월,  찍신이 강림한 그날, 수능 수학 1등급이 나오고야 말았다. 능에서 이과 수학 1등급이라는 숫자는  것이었다. 부모님은 환호했고, 나도 그런 성적이 나왔다는 사실 기쁘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좋은 성적 내 꿈과 전혀 상관없던 길을 가게 하는 초석이 되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결국 '성적 맞춰 대학에 들어간다'던 한국 교육 실태를 형상화한 인물이 되는 결과를 맞이하고야 말았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A대학의 전자공학과들어갔다. 그곳에서 극동아리에 들어가긴 했지만, 스무 살 땐 오랜 꿈보다도 그저 노는 것이 즐거운 청춘이었다. '공대'라는 학과 자체의 특성은 꽤 잘 맞았다. 학생들여학생들보다 10배 이상 많았는데,  했던 동기들과 즐거운 대학생활을 할 수 있었. 기들과 여행도 다니고 종종 술도 마시면서 나름의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고, 그러다 가끔 연극 동아리의 활동을 하기도 하 스무 살 청춘의  해가 흘렀다. 




그렇게 즐겁게만 삶을 즐기다가, 동기들이 모두 군대에 갔다. 나 홀로 남은 스물한 살, 처음으로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전공 공부는 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 활동적인 나의 성격, 가만히 앉아서 문제를 풀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 돌아갈 때까지 프로그래밍을 해야 하는 수업들과 맞지 않았고, 그 모든 시간들이 내겐 고통이었다. 전공과목들 중에 학점이 멀쩡한 것이 없었다. 우 내가 선택한 연극이나 스포츠와 같은 활동적인 교양 과목들만이 나를 그나마 학교에 남아있게 해 주었다.  이상 버티기 어려워졌고, 1년 간 휴학을 하기로 마음먹 후  기간 동안 회사에서 일을 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취업이 잘 되는 학과에서 공부를 억지로 하다 보니, 내가 과연 이 고통을 버티면서까지 사기업에 들어가는 게 잘 맞을지, 입사를 한다면 내가 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것일 지 궁금다. 휴학을 하자마자  좋게도 대기업의 인사팀에서 1년 가까이 일을  수 있었다. 인복이 많았던 나는 사하게도 너무 좋은 팀원들을 만나게 되었고, 회사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교류도 행복했다. 일이 많아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긴 했지만 움직일 일이 많아서 런 부분도 나와 잘 맞았다. 


본부장으로부터 앞으로도 계속 같이 일을 하자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아직 졸업도 안 한 상태였기에 복학해야 했다. 졸업을 하면 사기업에 다니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평생 여기서 일해야 하는 것이라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회사에서 하는 일이 과연 내 삶에 떠한 가치가 있는 철학적 의문을  되었다. 평생 업에서 일을 해야 한다면  목적이 그저 내가 돈을 벌기 위한 것이 되지는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가치를 위해 내가 평생 이 일을 하는 것이 정말 행복할까, 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정답은 '아니다'였다. 나는 어쩌면 '돈'이라는 가치를 위해 내 삶을 바치고 싶지 않았다. 그 생각이 들자, 잠시나마 졸업 후에 사기업에 다녀도 괜찮지 않을까 흔들렸던 마음을 쉽게 접을 수 있었다.




다시 대학으로 복학했 전공으로 인해 매 순간순간이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래도 졸업장은 따 놓으라는 부모님의 말에 순종했다. 대신 연극 동아리 생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나마 대학에 발을 담가놓을 수 있는 호흡장치 같았다. 배우부터 시작해서 스텝, 기획, 극작, 연출 등등 대학 생활 내내 연극과 관련된 모든 분야를 다 해보았다. 연습을 하다 보면 늦게 들어가기도 하고 집에 못 들어가기도 했는데, 나는 그 모든 과정들이 너무 재밌었으나 엄마는 너무 싫어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어쩌면 내가 정말 미래도 안 보이는 공연 분야진출해 버리진 않을까 겁이 나셨던 듯싶다.


결론적으로 나는 졸업 후 대한민국에서 유명한 연출가 아래에 조연출로 들어가게 되었다. 계속 할 일인지, 그저 취미로만 남을 일인지 알고 싶었다. 실제로 업계의 배우들과 스텝들을 만나 수많은 일들을 겪었다. 조연출로 있었던 짧았던 모든 순간들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연습을 하면서 눈빛과 열정이 불타던 사람들의 모습과, 값싼 안주 하나 앞에 두고 소주만 마시며 나누던 이야기들. 매 순간순간 그 뜨거움에 정말 많이 반했던 것 같다. 공대에서는 여자가 별로 없어 내 앞에서 금기시 되었었던 여러 가지 성적 표현들과 그 예술적 가치, 배우와 스텝들이 각자 가진 인간에 대한 철학적 관념 등. 다양한 토론과 대화를 나누던 그 뜨거움이 정말 아름답고 고귀했다.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고, 연출이 내게 '앞으로 계속 같이 일해보자'라고 제안했지만, 이 일은 취미로만 남겨야겠다고 다짐했다. 너무 즐겁고 행복했지만, 통장에 찍힌 돈을 보면 내 즐거움과 행복은 적당한 금전 위에서 이뤄져야 할 것 같다고 판단했다.


졸업 후 처음으로 진정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즐거운 일들은 세상에 많았기에 선택지는 바다의 모래알만큼이나 쌓여 있었다. 하지만 내 가치관과 맞는 일을 선택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가치를 고민한 끝에 나는 나라를 위해 일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 공부를 할 때, 그리고 영화 '암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등을 보며 차올랐던 의로운 뜨거움이 내 마음 속에 여전했기 때문이었다.


나라를 위해 일을 하는 것.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