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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잔잔 Jul 21. 2024

캐리어 끌고 눈길 산행하기

스위스에서 생긴 일

모든 것이 비싸다고 소문난 스위스였다. H와 나는 돈 없는 대학생이었기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민을 했지만, 융프라우의 전경을 보지 않으면 유럽을 여행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가성비가 좋은 숙소를 찾기 위해 여러 사이트를 뒤적거리다 그린델발트에 위치한 5성급 호텔 같은 숙소를 발견했다. 보통 10인실 도미토리도 1인당 5만 원이 넘던데, 여긴 집 전체를 쓰면서도 1박에 12만 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우리는 역시 운이 좋며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예약했다.


고생의 시작인 줄도 모르고.




처음에는 스위스의 물가를 고려하여 짧고 굵은 1박 2일의 여행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우리가 찾은 숙소가 생각보다 저렴한 가격이었던지라 2박 3일을 그곳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을 안고 스위스 인터라켄역에서 그린델발트역으로 향하는 기차를 다. 나는  몸집 크기의 빨간 배낭을 메고 있었고, H는 보다 더 큰 캐리어를 끌고 있었다. 얼른 숙소에 도착해 우리의 짐을 내리고 알프스의 이곳저곳을 탐방하고 싶었다. 기차에스키를 들고 올라가 사람들과 우리처럼 짐을 들고 가는 사람들 나뉘어 있었는데 모두들 설렘으로 가득한 눈빛이라는 사실만은 똑같았다.


기차로 올라가는 길에 본 알프스 산맥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달력에 있을 법 한 황홀경이었다. 을 보는 즐거움만으로도 기차에서 보내는 시간 훌쩍 지나갔고, 눈 깜짝할 새에 그린델발트역에 도착한 것이 너무도 아쉬웠다.


그렇게 도착한 그린델발트역에서는 하필이면 데이터가 터지지 않았다. 국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미리 스크린해 놓은 주인아주머니의 길 안내 사진을 보며 그 알려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우리가 걷는 길 양 옆으로는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고 새하얀 거리를 걷는 걸음걸음이 설렘 가득했다. 뽀드득 눈을 밟는 소리와 옷 사이로 불어오는 서늘한 은, 드디어 내가 알프스에 도착했다고 알려주심금을 울렸다.




숙소에 가려면 오르막길인 차도를 갈아가야 했다. 차들이 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일까 이 꽤 잘 닦여 있었지만 그럼에도 차들은 거의 지나다니지 않았다. 평소 숨쉬기 운동 외에는 아무런 운동을 하지 않았던 우리는 몇 걸음 못 가 금방 숨이 찼다. 그래도 조금만 걸어가면 곧 도착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각자 15kg 배낭과 캐리어를  짊어지고 힘겹게 오르막길을 올랐다.


그렇게 10분 즈음 올라갔을까, 주인아주머니가 알려준 길이 어느 순간부터 이상해 지기 시작했다. 우리를 차도에서 벗어난 곳으로 안내하더니 눈 닦인 거리의 면적이 눈에 띄게 좁아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우리의 눈앞에는 소복 쌓여있는 하얀 눈밭만이 보일 뿐이었다.


나름 길을 내기 위해 눈을 쓸었던 것처럼 보였지만, 그 위로 다시금 눈이 왔었는지 높낮이가 다른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우리가 과연 배낭과 캐리어를 고 저곳을 지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내가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니, 주인아주머니가 알려준 사진 속 모습과 같은 모양으로 가고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그 후로도 10분 즈음 더 올라. 한계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평지였다면 10분도 안 걸렸을 법한 길이었는데 눈 덮이고 경사진 에 짐가방까지 들고 올라가다 보니 시간이 훨씬 더 많이 걸리는 듯했다. 처음엔 아름답던 하얀 눈이 이제는 꼴도 보기 싫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우리가 묵을 숙소는 그 비슷한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나마 배낭을 메고 있었기에 중심을 앞에 실은 채 꾸역꾸역 두 다리로 올라가고 있었지만, 캐리어를 끌고 올라오던 H 한참 아래에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H가 그 자리에 멈춰서는 나에게 포기를 선언했다.


"나 거짓말 하나도 안 하고 진짜로 이렇게 가다가 뒤로 굴러 떨어져서 죽을 거 같아. 더 이상  가겠어."

"안 돼. 지금까지 올라온 게 아까워. 우리가 지불한 24만 원을 생각해!"

"지금 돈이 문제가 아니라 내 목숨이 달렸다고! 길이 여기가 맞긴 한 거야?"


H는 새빨개진 얼굴과 울먹거리는 말투로 내게 말했다. 버스를 타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버스를 타기 위해 내려가는 길이 오히려 더 무서울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배낭을 멘 채 H의 캐리어까지 끌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캐리어를  전까지만 해도 H가 엄살이 좀 심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는 등에 15kg 배낭이 짓누르는데도 이 산길을 걸어 올라가는데, 캐리어는 끌고 올라가는 거면서도 왜 저렇게까지 힘들다고 하지?'


그런데 캐리어를 직접 끌어보니 녀의 울먹거림은 엄살이 아니었다. 캐리어는 뒤에서 나를 끌어당겼고 나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더 많이 기울이고 더 많은 힘을 쏟아부어야 했으니, 배낭을 메고 가는 것보다 3배는 더 힘들었던 것 같다. 심지어 캐리어는 한 손으로 끌어야 했기에 한쪽 팔만 빠질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그 상태로 20분 넘게 걸어온 H가 그제야 대단해 보였다. 그렇게 H의 캐리어는 내가 끌다가, H가 끌다가를 반복하며 100분 같은 10분을 더 걸어 올라갔다. 의도치 않은 산행을 시작한 지 40분 즈음 지나니, 숙소의 가격이 왜 저렴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어느덧 내가 저장해 놓은 사진이 끝이 났다. 주변에 우리가 갈 숙소가 있다는 뜻이었다. 대부분의 집들이 다 나무로 지어 비슷하게 생겼지만, 어찌나 학수고대했던지 사진에서 본 것과 똑같다는 느낌이 드는 집을 한 번에 찾아냈다.


"저기다!"


주인아주머니는 없었만, 집 앞에 내 이름을 적어놓고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써 놓은 것을 보니 우리가 묵을 숙소가 확실했다. 그린델발트 역에서 의도치 않은 산행을 시작한 지 30분이 넘어서야 드디어 숙소에 도착한 것이었다.




주인아주머니가 숨겨놓은 열쇠를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간 우리의 숙소는 생각보다도 훨씬 좋았다. 배고플 때 음식을 먹으면 뭐라도 다 맛이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지 모르겠지만, 30분 간의 산행으로 온몸과 마음이 친 후에 마주한 우리의 보금자리는 황홀했다. 당시만 해도 에어비앤비가 지금처럼 유명하지 않았던 시기라 다른 사람이 사는 집 형태에 그대로 들어가 숙박을 한다는 것굉장히 신선한 경험이었다. H는 숙소의 문을 열기가 무섭게 내게 외쳤다.


"야, 이 정도면 산길 어 올라올 만하다!"


1분 전까지 있었던 올챙이 적 시절을 벌써 다 잊어버린 H의 말처럼 우리가 걸었던 고통의 시간을 다 잊게 만들 만큼 좋은 곳이었다. 창문을 열면 달력 속 그림 같은 그린델발트 마을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는, 지금까지도 내가 묵은 숙소 중 단연코 1등을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잊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래도 다시 갈 기회가 있다면 역에서 가까운 곳으로 숙소를 구하겠지만.


우리가 머무른 숙소
숙소에서 바라본 그린델발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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