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잔잔 Jul 17. 2024

현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버렸다

스페인에서 생긴 일 (feat. 밤 10시)

그 흔한 '해외에서는 저녁에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기본적인 룰도 몰랐다. 종차별은 어느 정도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 정도는 그냥 무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유럽도 선진국이니, 대한민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하나의 장소일 뿐이라고 믿었다.


무지함 속에 생긴 안일 착각이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항구 근처에서 H와 나 빠에야와 상그리아 한 병 마셨다. 페인은 음식 하나하나가 맛있다. 에야부터 타파스, 감바스, 하몽, 기타 등등. 매콤한 음식들도 많아서 한국인의 입맛에도 얼추 잘 맞다. 음식만으로도 더 호감이 가는 나라였다. 를 땅땅 두드리며 저녁 8시 30분에 있는 플라멩코 공연까지 보고 나오니 어느덧 시간은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광장과 항구 근처엔 늦은 시간까지 사람이 꽤 많았다. 래서일까 조금은 안전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호스텔로 돌아가려 했지만 버스는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택시를 타기엔 돈이 부족했다. 지도를 보니 우리가 묵는 호스텔까지는 30분 정도 걸어가면 되는 거리였다.


해외에서 여행할 때 걷는 30분은, 얼마큼 기다릴지 알 수 없는, 그 마저도 올 지 확신할 수 없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었다. 내 다리만 고생하면 되는 것일 테니. 렇게 우리는 30분 정도면 선선한 날씨에 소화시키기 딱 좋겠다합리화와 함께 바르셀로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큰 거리에서 벗어나 조금 사람이 없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걷기 시작한 지 10분 즈음 지났을까, 뒤에서 어떤 남자들이 소리 지르는 것이 들렸다. 


"저거 우리한테 말하는 거 아니겠지?"

"마.  취한 사람들이 지나가나 보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들과 같은 방향으로 걷는 것 느껴져 약간의 불안한 마음이 었다.


"혹시 모르니까 조금만 더 빨리 걷자."


그렇게 는 것인지 걷는 것인지 모를 정도의 경보로 걸어가 있는데, 뒤에 있는 그들은 오히려 더 빠르게 가까워지는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빠르게 걷는 걸음이라도 160cm 내외의 여자들이 걷는 걸음 속도는 남자들이 걷는 걸음 속도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느렸다. 렇다고 그 자리에서 달려본들 잡힐 것은 뻔하고, 그들의 야수 본능을 괜스레 깨울 것만 같다.


결국 우린 그들에게 따라 잡히고야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우리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2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들 5명 무리였다. 그들은 키가 꽤나 커 보이던 흑인과 백인들이 함께 있었고 어느새 우리를 중심으로 삥 둘러싸고 있었다.


"Where are you from?(어디서 왔니?)"

"... From Korea.(... 한국에서)"

"What do you do?(직업이 뭐야?)"

"... University student.(... 대학생)"

"Oh, me too.(나돈데)"


라포를 형성하려는 것일지 몰라도, 그들은 생각보다 꽤 평범하고 무난한 질문들을 이어갔다. '정말 동양인인 우리에게 그냥 영어로 말을 걸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 물론 아무리 친절한 질문이라도 남자들 5~6명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면 친절보단 긴장이 더 크지만 말이다.


일단 우리는 그들말에 답변을 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호스텔 방향으로 속해서 걸어갔다. 완전한 무시는 그들을 더 화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정도만 되었어도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갑자기 흑인 남자 한 명이 H에게 어깨동무하며 눈에 뽀뽀를 하는 것이었다.


"I like your eyes.(니 눈이 너무 좋아)"


대사만 들으면 사랑에 빠진 남자의 플러팅과도 같았지만, 그는 H에게 전형적인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제스처를 함께 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더 과감하게 추행에 가까운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그런 만행을 강하게 뿌리치기엔 우리 너무도 약자였다. H는 그저 어색한 웃음을 지어주며 슬며시 그에게서 몸을 빼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는 쉽게 놓아주질 않았다.


H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내 상황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H만큼 내게 선을 넘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나에게도 두세 명의 남자들이 붙어서 말을 걸고 있었다. 나는 깡을 지닌 성격이라, 꾸준히 그들을 적당한 무시와 간단한 대답 사이에서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다. 무엇보다도 그 무리 사이에서의 주동자는 H 옆에 붙어있던 흑인 남자였기 때문에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적당히 잘 달래듯 대답만 해 주면 었다. H에게 미안했지만 나도 스스로를 지켜내는데 집중해야만 했다.


그런 아슬아슬한 줄타기 속에 어찌저찌 호스텔 방향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5분 넘게 우리를 따라오던 그들이 갑자기 우리를 멈춰 세운다. 더니 갑자기 자신들을 따라오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 파티를 고 있는 곳을 아는데 거기로 가자고 한다.


'파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곳에 따라간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는 불 보듯 뻔했다. 떻게 저들 야수로 돌변하지 않도록 적당히 거절하면서 호스텔에 무사히 도착할 것인가에 대해 단 몇 초 사이에 아주 많은 고민을 했다. 약간 웃는 듯 단호한 듯 애매한 말투로 그들의 심경을 거스르지 않게 거절하는 데 총력을 다 하고 있던 찰나, 옆에 있던 거리에서 '빵빵-'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두가 그곳을 쳐다보았다.


지나가던 택시 한 대가 경적 소리를 울린 것이었다. 위험에 처한 우리를 해주려는 듯했다. 문제는 그 순간에 얼마나 겁이 났던지 그 상황조차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택시가 왜  있지? 저 차로 우리를 납치하려는 건가?'


택시가 우리를 계속해서 따라오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그들은 그 택시를 힐끗-보더니 슬며시 우리에게서 떨어졌다. 그러더니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우리 옆에서 사라지는 걸 본 택시는 갈 길을 갔고, 우리는 그때부터 태어나서 처음 보는 속도로 전속력으로 달려 호스텔에 도착했다. 스텔에 도착해서도 심장은 몇 시간을 더 요동치고 있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 택시 기사님도 충분히 위험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천천히 우리가 안전할 수 있도록 따라와 주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겁이 났던 그 당시에는 달려가서 그 택시를 탈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그들이 떠난 후에 택시 기사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할 생각도 못 했었다.


그 택시가 멈추어 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혹은 그들이 조금만 더 험악하게 우리를 끌고 가려고 했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까.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그 기사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다신 볼 수 없겠지만, 여전히 마음속에는 은인로 남아있.

이전 02화 처음 보는 남자의 오토바이 뒷자리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