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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남자의 오토바이 뒷자리에서

라오스에서 생긴 일 (feat. 새벽 1시)

by 신잔잔

어릴 때부터 나는 기계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금한 것이 있으면 색을 하기보다는 책을 찾아보았고, 휴대폰은 전화와 문자만 되면 그만이었다. 인이 되고 스마트폰을 사용한 이후도 크게 라진 것은 없었다.


르게 변화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도태되어 버린 것일까, 나의 여행은 언제나 무모했고 무지했다.




지금은 고속도로도 뚫리고 기차도 있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라오스는 아직 길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나라였다. 가 정보를 얻은 방법은 여행 책에 나온 내용이 전부였고, 책에 의하면 루앙프라방에서 방비엥까지 버스로 6시간가량 면 되는 단한 일정이었다.


버스를 타고 잠시 졸다가 눈을 떠보니 내가 탄 버스는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높고 험악한 산길 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 좁은 길에서도 반대편에서 오는 차를 종종 마주쳤고 그때마다 나는 끔찍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창 밖으로 눈을 돌리곤 했다. 하지만 눈을 돌린 곳에는 마주 오는 차량만큼이나 포악한 낭떠러지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편 스 운전기사는 마주 오는 차를 지나기 위해 뒷바퀴 하나를 낭떠러지 쪽으로 내보내는 곡예운전을 선보이고 있었다.


'차라리 잠을 자자. 자다 보면 방비엥이든, 천국이든 둘 중 한 곳에는 도착하겠지.'


함께 여행 온 J가 방비엥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과 함께 나를 깨다. 밤 12시 30분이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너무 어두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곳이 천국이 아니라 방비엥라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예약해 둔 한인민박으로 이동하려는데 번에는 데이터가 터지지 않았다. 지도를 볼 수도, 한인민박 사장님께 연락할 방도도 없었다. 시에 장염으로 고생 중이던 내 배에서는 꾸르륵 소리까지 나기 시작했다. 친데 덮친 격이었다. 점점 배가 아파져왔고 J는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대신해 아무 방향으로나 가서 동태를 파악해 보겠다며 홀로 길을 나섰다.


J가 떠난 뒤, 나는 크나큰 선택의 기로에 섰다. 문명인이길 자부하며 내 한쪽 발 뒤꿈치로 엉덩이를 막고 끝까지 품위를 지켜낼 것인가, 아니면 자연에서 태어난 인간임을 인정하며 내 부산물들을 다시금 자연으로 되돌려 보낼 것인가. 그러나 은 고민을 해 볼 기회도 없이, 꾸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는 수풀 사이로 들어가야만 했다.




한결 개운해진 마음으로 동태를 파악하고 돌아오는 J를 맞이했다. J에게 물었다.


"저 쪽에 뭐 있어?"


꽤 상쾌해 보이는 내 표정을 보며 J가 대답했다.


"아니. 아무것도 안 보여. 근데 배는 괜찮아?"

"... 음... 사실.. (이하 생략)"


J가 빵 터졌다. 아무튼, 급한 불 하나는 꺼 두었으니 더 중요한 일이 남아있었다. 이 상태로 있다가는 어떤 생명체들의 배변 활동이 즐비할지 모르는 수풀 사이에서 밤을 지새워야 할 판이었다. 살기 위해 어떤 방향이든 선택을 해서 걸어가야만 했다. 불빛이 조금 더 많은 곳이 마을일 확률이 높으니 그곳으로 가자는 J의 의견을 따라 방향을 정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덧 밤 12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게 늦은 시간임에도 방비엥에서는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이 우리 옆을 종종 지나갔다. 그럴 때마다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사태에 바짝 긴장하게 되었다. 10분 즈음 걸었을까, 오토바이를 타고 우리 옆을 지나가던 현지인 남자들 세 명이 저 앞에서 멈추더니 오토바이를 돌려 다시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오기 시작했다.


낯선 오토바이가 우리에게 향해오는 것은 두 동양인 여자들에게 꽤나 큰 두려움이었다.


'아... 그냥 가라. 제발 그냥 지나가라.'


우리를 그냥 지나쳐 가길 그렇게 속으로 기도하고 바랐건만, 야속하게도 오토바이 세 대가 우리 앞에 멈추었다. 무리 중 한 남자가 오어로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

"Sorry? (네?)"


영어가 안 통할 것은 알았지만 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아주 친절하고 순진구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의 말에 열심히 반응해 주었다. 들은 라오어로 우리에게 몇 마디를 더 하였만 서로 알아들을 수 없어 각자 같은 말만 계속 반복할 뿐이었다. 언어의 장벽을 느낀 그들은 갑자기 오토바이에서 내려 우리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나와 J가 끌고 가던 캐리어를 잡았다.


그들이 다가올 때부터 흠칫 놀라긴 했지만, 캐리어를 먼저 붙잡을 것은 예상치 못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캐리어를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런 나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너무 쉽게 캐리어를 낚아채 자신들의 오토바이에 캐리어를 올려놓았다. 너무도 당당한 그들의 행동을 우리는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차라리 캐리어만 가져가고, 우리를 해치지만 말라.'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찰나, 그들이 우리를 보며 오토바이 안장을 손으로 탕탕 치기 시작했다.


"...응? 라는 가?"

"우리 납치하는 거면 어떡해."

"길 몰라서 도착을 못하나, 납치를 당해서 도착을 못하나 매한가지니까 일단 타보는 거 어때?"

"그럼, 만약에 가다가 우리 납치하는 것 같은 기미가 보면 가방은 버리고 뛰어내리자."


그렇게 우리는 새벽 1시에 처음 보는 라오스 남자들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버리고야 말았다.


어린 시절, 오토바이를 탄 멋진 남자의 뒤에 앉아 그의 옷깃을 잡으며 시원한 바람을 는 로맨틱한 상상을 해본 적은 있었. 다만 그게 오늘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5분가량 지났지만 여전히 마을은 보이지 않았고, 우리는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마을로 가는 거 맞아? 걸어왔으면 오늘 안에 도착 못 했겠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듯한 이동시간에 그들이 더욱 의심되기 시작했고 긴장감은 더욱 높아져만 갔다. 러나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며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이 초면의 현지인 남자들을 믿는 것 에 없었다. 뒤에서 나는 '어떻게 뛰어내리면 그나마 덜 다칠까'에 대한 시뮬레이션만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뛰어내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할 무렵, 불빛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마을에 들어온 것이었다.


납치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도 잠시, 우리가 그들에게 목적지를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 생각났다. 순식간에 다시 등골이 서늘해졌다. 다른 오토바이에 타고 있던 J에게 말했다.


"야! 우리! 생각해 보니까! 얘네한테 목적지도 안 말해준 거 같은데?"

"그러네. 어떡하지? 뛰어내려야 되는 거 아니야?"

"... 일단은 조금만 더 가보자!"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오토바이가 불이 환하게 켜진 건물 앞에 멈추었다. 익숙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국어였다. 를 태워다 준 라오스 남자가 오토바이 클락션을 몇 번 누르니 한인민박 사장님이 나오셨다. 음 보는 한국인이 그렇게나 반가울 줄이야. 사장님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알고보니 한인민박에서 낮에 일하는 착한 라오스 청년들이라고 했다.


천운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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