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투어'에서의 셋째 날부터는 2박 3일간의 나이아가라 패키지 투어 일정이 있었다. 버스를 타고 직접 가도 충분할 텐데, 분명히 짧은 시간동안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며 기어코 아빠는 2박 3일은 패키지를 넣어버렸다. 나는, 원치도 않는 것을 사라고 재촉하며 불필요한 시간을 투자하는 것보다, 그 시간에 실수를 하더라도 우리가 직접 버스를 타며 배우는 것이 더 좋았다. 그러나 아빠는 실수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조금 이해가 된다. 나보다는 이 세상에서의 시간이 더 적게 남은 아빠에게, 실수를 하는 시간 마저 소중하다고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결국 아빠의 말을 따르기로 한다.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미국 현지 투어 업체를 통해 2박3일간 패키지에 떠나는데, 모이는 장소와 시간은 우리가 묵었던 호텔 바로 근처, 오전 7시였다. 역시 아빠는 계획쟁이의 끝판왕이다. 싼 가격, 괜찮은 위치, 나쁘지 않은 시설의 호텔을 찾으면서도 패키지를 위해 모일 장소에서 가까운 곳까지 생각해서 숙소를 정했던 것이었다.
극한의 아침형인 우리는 오전 5시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으러 나왔다. 근처에서 문 연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거의 유일하게 문이 열려 있던 샌드위치 가게에 갔다. 샌드위치와 파니니, 그리고 커피를 포장으로 주문했다. 뉴욕 여행 3일차 즈음 되니 이제는 실수 없이 주문도 한다. 주문을 하고 나니 매장 직원이 파니니를 직접 구워준다. 너무 맛있게 구워줘서 팁을 주고 싶었는데, 팁을 넣는 통도 없고 어떻게 줘야할 지 몰라서 그냥 패스했다. 아직 뉴욕 여행 3일차에게 팁을 먼저 주는 방법을 배우는 것 까지는 무리였나 보다. 샌드위치와 커피를 맛있게 먹고 7시에 약속된 장소로 가 패키지 투어를 시작했다.
우리가 만난 한국인 가이드는 정말 최고긴 했다. 10년 넘은 경력 베테랑이었던 그는, 역대 최다 한국인 관광객이라고 일컫는 그 상황 속에서 여기저기 계속 전화하고 알아보며 다른 팀보다 '2분'먼저 도착하는 전략을 세우는 사람이었다. 눈치싸움에서 항상 승리하는 기분이랄까. 그의 말에 의하면, 2분 먼저 관광지에 가면 바로 들어갈 수 있고, 2분 먼저 식당에 도착하면 기다리는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느끼며 여유롭게 창밖을 구경하며 먹으면 된다고 했다. 2분의 차이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한국인 대상 패키지가 아닐 수 없다.
일정이 시작되었고, 패키지라 하여 분명히 버스타고 다니면서 편하게 투어할 줄 알았는데, 정말 자유 여행보다 3배 정도 더 힘들었다. 계속 지친 몸을 이끌고 질질 끌려다녔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리다가 어느 식당에 내려주며 해산물 뷔페라고 한다. 맛은 분명 좋은 것도 같은데 들끓는 한국인 및 외국인 관광객들로 인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 지, 이 음식이 정말 맛있는 것이 맞는지 조차도 알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체할 것 같은 밥을 먹고 나니 약간의 현타가 왔다. '역시 패키지는 나랑 맞지 않아.'라고 생각하면서 아빠의 표정을 보니 아빠도 당신의 생각과 다른 모습에 적잖이 당황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아빠, 자유여행이 더 낫지? 패키지보다 자유여행이 더 나은 거 인정?"
"당연히 그게 더 편한 건 알고 있었지. 근데 워싱턴까지 올 방법이 없었잖아."
'찾으면 있지. 아빠가 급하게 안 정했으면 내가 알아서 잘 찾았겠지.'라고 말하고 싶지만 패키지투어에서 패키지를 안좋다고 하며 싸울 수는 없는 일. 결국 이번에는 내가 한 발 물러서 주었다. 어쨌든 우리 일정의 모든 코스를 아빠가 귀한 시간을 내서 짜 준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체할 것 같이 정신 사나운 밥을 먹고 다시 버스를 타고 달려 워싱턴 D.C에 도착했다. 미국의 국회의사당, White House, 자연사 박물관 등 수많은 곳을 방문했다. 사진 찍기도 귀찮고 지쳐가던 나는 제대로 구경도 하지 못했다. 왜 내가 지금 여기서 좋아하지도 않는 박물관을 돌아다니고 있는 지. 여전히 불만스럽고 퉁명스러운 마음으로 또 다음 장소로 끌려간다. 다음 끌려간 곳은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였다. 그 전까지의 일정은 재미없다고 느껴졌지만, 이 곳은 다른 기분이다. 역사에는 관심이 많은 나였다. 가이드에 의하면, 이 곳에는 19명의 한국전 참전 용사들을 기념한 비석이 있는데, 옆에 보면 거울처럼 반사되는 곳이 따로 있단다. 그렇게 실제와 거울에 비친 두 비석들을 합치면 총 38명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38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부분까지 고려를 해서 기념비를 세운 것이 신기하다고 느껴진다. 그렇게 감동을 받고 묵념을 하며 처음으로 반짝이는 시간을 느꼈다. 이후에 간 곳은, 링컨 동상, 마틴 루터 킹 목사의 'I HAVE A DREAM' 명언이 쓰여진 비석, 그리고 워싱턴 기념비 등이 있다.
내가 패키지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곳들을 다녀서 저 곳에서의 기분들이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 여기 와봤어~'하고 인증샷만 찍는 기분이랄까. 내 감정을 배려받지 못하는 느낌이 든다. 패키지를 운영하는 가이드들도 그 심정을 알고 있다. 물론 좋은 점이 있다면, 가이드가 해주는 역사나 에피소드 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여행 가치관이 하나 있는데, 내가 한 나라를 '여행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은, 그 나라의 역사를 어느 정도 알고 그 나라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았을 때이다. 알고 나면 보이는 것이 달라지는 까닭이다. 다행히도 그런 부분은 가이드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다만, 원치 않는 곳에 끌려다니는 탓에 아빠도 확실히 나와 갔던 이틀 간의 자유여행이 더 좋았던 것으로 마음을 굳혔던지 점점 말이 없어지는 지친 모습이 눈에 보인다.
숙소에 돌아와 아빠와 맥주 한 잔을 마신 후 잠에 들었다. 매일 맥주를 마시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맞다. 여행에서 맥주를 한 잔 마시며 느끼는 여유가 행복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이 정도로 많이 마시진 않는다. 다음 날은 나이아가라폭포 투어 예정이므로 새벽 4시까지 모이라고 하는 가이드의 말. 그러려면 3시에 기상 예정인데, 벌써부터 험난함이 예상된다. 아빠와 나의 눈 아래엔 지난 수십년의 세월 보다 더 진한 다크서클이 이틀 만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같이 투어를 하는 대단한 한국인들은 일찍 가야 줄을 서지 않는다는 말에, 정말 새벽 4시까지 단 한 명의 이탈자 없이 버스에 자리잡고 앉아있다. 이래서 한국인들은 어딜 가도 살아남는 건가 보다 싶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향해 가던 중 맥도날드에 들러 아침을 먹었다. 핫케잌이랑 스크램블 에그를 주문해서 먹는데, 커피를 리필하러 갔더니 직원 아줌마가 'Do you wanna lid?'라고 묻는 것이었다. 엥? lid가 뭐지?
"아빠, lid가 뭔지 알아?"
"몰라? 뭔데 그게?"
"나도 몰라. 저 아줌마가 말하는데?"
아빠와 나 둘 다 몰라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가이드가 곧 출발한다는 소리가 들리니, 아줌마가 눈치를 챘는지 뚜껑을 건네준다. 'Oh, Thank you!'라고 했더니, '거봐, 내가 필요할 거라고 했잖아'라고 한다. 그 때서야 lid가 뚜껑이었음을 알게 된다. 뚜껑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이 단어를 나는 미국에서 처음 들어보았다. 수능 때만 해도 정말 어려운 영어 단어들을 많이 암기하지만, 막상 돌이켜보면 일상적인 용어들은 오히려 잘 배우지 않는 것 같다. 아니면 잘 사용하지 않아서 금방 잊어버리거나. 이래서 미국에서 직접 살아볼 때 느는 영어와 차원이 다르구나, 하고 느낀다. 정말 저렇게 쉬운 단어를 모르는 내 자신에게 진심으로 충격을 받은 순간이었다.
아침을 먹고 드디어 나이아가라폭포에 도착했다. 다른 모든 패키지 일정들은 부수적인 과정으로 느껴질 만큼, 나이아가라폭포를 보는 것은 내게 가장 설레는 순간이었다. 처음 마주한 그 폭포는 절대 사진 속에 담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웅장하고 강렬한 자연 속에 자리한 폭포를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으면, 인간은 역시나 하나의 작은 점에 불과하다고 느껴진다. 내게 튀기는 물방울은 차가우나, 그 관경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뜨거워진다.
점심을 먹기 위해 한식당에 들렀다. 김치찌개가 메뉴로 나왔는데, 네 명당 한 테이블에 앉아서 냄비를 끓여먹는 상황이었다. 아빠와 나 앞에는 50대 정도가 된 부부가 앉았다. 냄비는 테이블의 한 쪽에 위치해 있었고, 아빠와 그 아저씨 쪽에 있는 상황이었다.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자, 그 아저씨가 나서서 국자를 이용하여 맛있게 끓이는 데 일조하고 아빠와 내게 먼저 덜어주었다.
나는 물론 아빠를 많이 사랑하지만, 아빠는 꽤 오랜 시간을 큰 회사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던 60대 아저씨였다. 엄마가 음식을 덜어주는 것에 익숙하고, 남들이 뭔가 해주는 것에 익숙했던 듯하다. 그래서일까 처음 보는 그 아저씨가 음식을 덜어주는 것에 너무 당연한 듯 익숙해보였다. 민망해진 내가 괜히 손을 뻗어서 제가 하겠다고 하며 하려고 하니 그제서야 깨달은 눈빛이다. 그제서야 아니라고, 자기가 하겠다고 말하는 아빠다. 그 모습을 보며, 그래도 아빠가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만은 아니구나,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퇴직한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이 배려하고 더 잘 교류할 수 있게 조금씩 도와드려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캐나다 쪽에서 본 나이아가라 폭포의 윗부분
저녁에는 국경을 넘어 캐나다로 갔다. 우리가 선택한 투어는 캐나다에서 진행하는 듯 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원래는 캐나다가 남한의 99배 면적임에도 인구는 우리보다 훨씬 적어서 이민자들을 비교적 쉽게 받아주는 편이라고 했다. 자유로움과 젠틀함이 공존하는 캐나다는 내가 가장 살고 싶은 나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캐나다에서 본 나이아가라 폭포는 미국에서 보던 나이아가라 폭포의 모습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 아빠가 나이아가라 폭포는 캐나다에서 무조건 봐야 된다고 주장했었는데, 그 관경을 보자마자 그렇게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미국에서 보던 것과 같은 폭포임에도 느낌이 다르고 훨씬 더 크고 웅장하게 느껴졌다. 가이드에 의하면, 원래는 나이아가라폭포가 절벽을 1년에 1m씩 깎았다고 하는데, 기술이 발전하고 조취를 잘 취해서 현재는 1년에 50cm정도만 깎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몇만 년 후면 이 곳이 사라진다고 한다. 이 웅장함을 후손들이 볼 수 없다니 안타깝다.
그렇게 캐나다에서의 아름다운 나이가라폭포를 감상한 후 숙소로 들어왔고, 피곤에 찌든 아빠와 나는 들어오기가 무섭게 바로 곯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