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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빠와 딸의 좌충우돌 미국 여행

진심은 술을 타고 흘러

by 신잔잔

맨해튼에서 브루클린으로 넘어가기 위해 브루클린 브리지에 도착했다. 다리를 직접 걸어서 건너면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지하철을 타도 되고, 버스를 타도 되지만, 아빠와 나의 공통점은 둘 다 걷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비슷한 유전자의 흐름은 걸어서 건너는 것에 상호 암묵적 동의를 이룩했다. 브루클린에 가는 목적은 하나다. 유명한 '그리말디 피자집'에 가기 위한 것. 처음으로 내가 짠 코스, 아니, 내가 선택한 음식점으로 가기로 한 것이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줄이 엄청 길게 서 있었고, 15분 정도 기다리니 들어갈 수 있었다. 피자를 한 판 시켰는데, 정말 그 명성에 걸맞게 너무나도 맛있었다.


사실 내겐, 음식이란 그저 적당히 괜찮고 적당히 배부르면 만족한다 할 수 있는 나였기에, 음식을 위한 기다림은 썩 좋아하지 않는 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은, 더 기다려서라도 먹을 수 있을 법한, 내 시간이 아깝지 않은 맛이었다.


인생 피자 = 그리말디 피자집의 피자


나름 미국에 온 뒤 유명한 음식점을 간 것이 처음이기에, 아빠와 나는 팁을 얼마 줘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미국 사회는 내가 한 만큼 번다는 자본주의가 가장 짙게 깔린 사회가 맞지만, 뼛속부터 한국인인 나는 여전히 뭔가 팁을 준다는 것은 돈으로 인간의 서비스를 직접 사고파는 듯한 느낌 탓인지 불편하다. 한창 고민하다가 우리가 낼 팁을 결정하고 조용히 계산서를 달라고 하니, 말하지 않았는데도 계산서에 Tax와 Tip까지 모두 포함해서 아예 가져다주었다. 팁을 고민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렇게 알아서 정해주니 마음이 편했다. 음식부터 우리 입장에서 보이는 소소한 센스까지 다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배부르게 피자를 먹고 다시 맨해튼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직접 다리를 건너지 않고 지하철을 타기로 했는데, 다행히도 이번에는 큰 문제없이 한 번에 이동할 수 있었다. 아빠가 정한 다음 코스는 911 Memorial Museum이었다. 911 테러를 당한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곳이었다. 우리는 박물관 안까지 들어가지는 않았고 그냥 밖에서만 구경했다. 바깥에는 지하로 크게 뚫린 분수대 같은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911 테러 희생자들 이름을 하나하나 새겨 놓은 곳이었다. 항상 큰 사건들에 대해 잊지 않으려는 미국인들의 마음이 감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아주 어렸을 때 TV로 보았던 테러 장면이 떠오르며 안타까움이 더해졌다. 다들 같은 마음인지, 꽃을 두고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여러가지 감정이 뒤섞인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도 잠시, 아빠는 본인이 짠 계획에 맞추어 칼같이 다음 장소로 나를 이동시켰다. 후, 아빠 가이드의 스케줄이 슬슬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감동과 추모를 할 시간도 많지 않다. 우리도 꽃 하나 사서 놓아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다니는 것이 자유여행인가, 패키지여행인가. 그래도 내가 스케줄을 짜지 않았던 것에 아직은 미안한 마음이 있었기에 불만을 갖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나였다.


'아빠투어'의 다음 코스는 세계 경제 중심지인 월스트리트였다. 미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나는 왠지 멋진 증권회사 직원들이 옷을 쫘악 빼입고 서 있을 것만 같아 너무 설렜다. 도착해보니 웬걸, 그냥 넘쳐나는 관광객들 뿐이었다. 드라마에서 보던 그 모습과 너무 달라서 약간 실망스러웠다. 그냥 오래되고 조금은 고풍스러운 판교 테크노벨리 건물 같은 느낌이었다.


월스트리트의 넘쳐나는 관광객들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대표하는 곳은 황소상이 있는 곳이다. 그곳을 찾으려고 한참 돌아다녔는데 보이지가 않았다. 눈앞에 경찰이 있길래 물어보았다.

"Excuse me, sir. Where is the cow?"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 발음이 이상한가 싶어서 다시 한번 큰 소리로 또박또박 물어보았다.

"WHERE. IS. THE. COW? COW! THE STATUE!"

여전히 못 알아 들었다. 더 이상 발음이 좋아질 순 없겠다 싶어 그냥 황소 흉내를 냈다. 양손을 들어 뿔이 있는 표시를 하며 '음머~'하고 소리 냈다. 솔직히 약간 수치스러웠다. 그제야 그 경찰 아저씨가 "Oh, Charging bull!"이라고 하는 것이다.

'헐. Bull? 맞다. 그 단어도 있었네. 근데 Cow랑 Bull이랑 둘이 다른 건가?'

순간 당황스러웠다. 황소상이 영어로 뭔지 정도는 좀 알아두고 올걸 하고 후회했다. 아무튼 알아듣고 나서는 아저씨가 정말 친절하게 알려주며 사진 잘 찍고 오라고 인사해주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솔직히 내 영어 발음이 안 좋다고 약 올리는 건가 했는데 진짜 그냥 못 알아들은 친절한 경찰 아저씨일 뿐이었다.


나중에 숙소에 돌아와서 Cow와 Bull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찾아보았는데, 엥, 그냥 암소와 수소의 차이다. 이 정도면 솔직히 알아들어야 했던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다. 여전히 지금도 왜 못 알아들었는지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Cow의 발음을 너무 안 굴렸었나. 캬아아우 라고 해야 했나? 아니면 문화적으로 다른 차이가 있었던 걸까?




여차저차 힘들게 황소상을 만나 기념사진만 찍고 잠시 쉬기 위해 호텔로 돌아왔다. 조금 지쳐가던 찰나였다. 사실 나는 세계 어느 나라, 어떤 지역을 여행하든 적당히 주변을 둘러본 뒤에, 그곳에 사는 사람처럼 야외 카페나 광장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만난 인연들과 친구가 되기도 하는 재미가 있도 느낄 수 있고, 그러면서 그 나라 사람들의 생각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아빠는 옛날 사람이기에, 돈을 썼으면 그만큼 그 나라의 모든 것을 보고 와야 한다는 모드였다. 아빠의 모토에 따라 결국 얼마 쉬지도 못하고 다음 코스로 출발해야 했다. 내돈내산 여행이 아니다보니 나는 을이었다.


그렇게 '록펠러'라는 건물로 향했다. 대체 뉴욕에는 왜 이렇게 야경을 볼 수 있는 높은 건물들이 많은 걸까? 엠파이어 빌딩이나 록펠러나 내 눈엔 거기서 거기였다. 아빠도 사실은 어제와 별반 다른 것이 없다고 느꼈는지 빠르게 내려가자고 했다. 역시. 야경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부분에 있어서 아빠랑 나는 비슷하다.


'아빠투어'에 꼭 넣으라고 했던 코스 중 내가 가고 싶었던 'Blue Note'라는 재즈바가 있었다. 아빠도 나도 재즈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 재즈 음악 자체가 가지는 느낌을 정말 좋아한다. 뭔가 우아하면서도 춤을 추고 싶게 만드는 적당한 흥겨움과 목소리, 그리고 악기. 줄을 서야 한다는 말을 듣고 20분 가까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 차례 바로 앞에서 갑자기 자리 없다며 다들 돌아가라고 한다. 그럴 거면 진작 여기서부터는 못 들어간다고 말이나 해 주지. 너무 화가 났는데, 여전히 항의할 영어 실력이 안 되는 우리는 또 이곳에서 약자임을 인정하고 그대로 돌아와야만 했다.


아빠와 내가 다니면 안 좋은 점이 있다. 엄마와 다녔으면 엄마가 한국말로라도 뭐라고 항의하듯 말했을 텐데, 아빠와 나는 약간의 소심함이 있어 그렇게 하지 못한다. 둘 중 한 명은 당당하게 내 권리에 대해 항의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 법도 한데 말이다.


결국 소심한 우리는 그렇게 권리의 주장도 못한 채 지하철을 탑승하기 위해 카드를 충전했다. 내가 먼저 지하철 안으로 들어왔는데 아빠는 카드를 아무리 찍어도 지하철의 입구가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충전을 했는데도 돈이 없다고 뜨는 것이었다. 내가 먼저 들어와 버려서 마치 철창에 갇힌 상태에서 손만 잡고 있는 아련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아빠가 결국 짧은 영어로 역무원 같은 사람에게 말을 했다. 역시나 아빠의 자신 없는 말투에 그 사람은 더 알아듣지 못했다. 결국 내가 철창 안에서 그 사람을 불러 철창살을 사이에 두고 카드를 충전했는데도 찍히지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오늘은 주말이라 안 되고, 월요일에 거기 적힌 번호로 연락하면 돈을 줄 것이라고 했다. 아마 기계 번호 물어볼 것이라며 적어주었다. 내가 과연 통화로 미국인과 영어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일단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그 역무원이 감사하게도 임시 출입문을 개방해줘서 아빠가 들어올 수 있었다. 뉴욕 지하철에서 만난 두 번째로 고마운 사람이었다.


겨우겨우 그렇게 지하철 타기 위해 서서 15분을 넘게 기다렸다. 근데 지하철이 한대도 지나가지 않는다. 잘못 왔나 싶어서 다시 돌아가 보았는데, 분명 이곳이 맞다. 옆에 계단이 하나 더 보이길래,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내려가 보았다. 거기였다. 너무 헷갈리게 써 놓은 곳이었다. 정말 뉴욕에서는 별 것도 아닌 걸로 고생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도 나중에 돌아보면 추억이 되겠거니, 생각하며 인내를 갖는다.




재즈바에 가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숙소 근처의 펍에 들렸다. 미국의 펍은 영화에서 보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주위에 미식축구를 하는 티비와 영상들이 틀어져 있고 한쪽에는 위스키들로 장식된 바가 있었다. 피로가 쌓였던 상태였기에, 아빠와 나는 둘 다 제일 좋아하는 스텔라 생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피로가 쌓인 상태에서의 맥주 한 잔은 꽤나 취기가 올라온다. 아빠와 조금씩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아빠, 나 고등학생 때까지는 단 한 번도 싸운 적 없더니, 요즘 엄마랑 왜 이렇게 싸워? 둘이 안 맞아?"

"아니, 아빠는 예전에 연애하던 때처럼 낭만적으로 살고 싶은데, 너네 엄마가 안 그러잖아. 아빠는 얼마 전에 엄마랑 산책하면서 손도 잡았는데, 조금 있으니까 엄마가 손을 슬쩍 빼는 거야. 엄청 서운하더라고."

"엄마도 부끄러우니까 그런가 보지. 아빠가 좀 더 노력해봐 봐. 엄마는 극 현실주의자잖아. 오글거리는 거 싫어하는 대구 상여자이기도 하고. 그래도 마음만은 여전히 여자이고 싶을 거야. 그렇게 하면 또 속으로는 다 좋아한다고."

"알았어. 한국 가면 아빠가 좀 더 노력해 봐야겠네."


술을 잘 못 먹는 아빠와 생맥주 두 잔에 피로까지 얹어지니 서로 속에 담아 놓았던 말을 조금씩 뱉었다.


"딸, 아빠는 요즘 서운하다. 우리 딸이 아빠랑은 안 놀아주니까. 아빠랑도 좀 놀아주고 그래~"

"아니, 아빠. 그래도 내가 스무 살 넘은 성인인데, 아빠가 나를 오히려 놓아주는 연습을 좀 해야지. 자꾸 그런 걸 바라면 내가 무슨 '마마보이' 같은 것 처럼 '파파걸'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야. 내가 물론 약속이 좀 많은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 아직 젊으니까, 아빠가 이해해줘야 돼. 나도 나름 노력하잖아. 이렇게 여행도 먼저 오자고 했고."

"그래, 아빠도 이해하지. 그래도 서운한 걸 어떡해. 예전처럼 밖에서 있었던 일 얘기도 해주고 하면 좋은데.."

"알겠어. 앞으로 조금 더 노력해볼게."

"그래. 아빠도 조금 더 노력할게."


기타 등등. 그 자리에서 정말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인이 된 이후 처음이었다, 이렇게 아빠와 단 둘이 긴 대화를 나눈 것은. 어쩌면 이 낯선 장소에서 의지할 사람이 서로 뿐이라는 새로운 신선함과, 그에 더해진 한 잔의 술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다음 날 이 대화가 얼마나 오글거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순간만큼은 내 한 마디 한 마디 진심을 담아 아빠와 이야기했다. 언제 또 돌아올지 모를 것 같다는 기분에, 이 시간을 떠나는 것이 아쉬웠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우리의 발걸음은 고요했다. 어쩌면 우리가 내딛는 한 걸음 속에서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소중한 시간을 각자 느끼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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