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꽃보다 미녀들'의 시베리아열차 탑승기

러시아 사람들과의 첫 만남은,

by 신잔잔

내게는 고등학생 때 만나 지금까지도 가장 친한 친구들 6명이 있다. 나 포함 7명이어서 우리는 각양각색의 매력을 가졌다는 뜻에서 무지개를 본떠 '무지계모임'을 만들었다.


여행에 한창 빠져있던 대학생인 나는 예전부터 꼭 타보고 싶었던 시베리아 열차와 몽골 여행을 하기 위해 함께 할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일곱 명 중 세 명의 친구들이 가고 싶다고 했고 그렇게 K, A, L,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에서의 여행을 확정 지었다. '무지계 유닛 4인팟'이라는 컨셉으로 우리의 여행을 시작할까 하다가, 너무 뻔해 보여서 '꽃보다 미녀들'이라는 테마로 가기로 했다. 실제로 미녀였다면 저렇게 테마를 정했을 때 상당히 질타를 받았겠지만, 우린 미녀가 아니기에 아무의 질타도 받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금방 흘렀고, 여행 갈 날짜가 다가왔다. 보통 나는 여행을 할 때면, 양손이 자유로운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아무리 긴 여행이라도 주로 배낭을 메고 다니는데, 그렇게 차곡차곡 여행 물품들을 넣은 배낭의 무게를 재 보니 14 킬로그램이었다. 뭐.. 무거워서 죽기야 하겠나, 하는 마음으로 그냥 메고 떠나기로 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후, 기차역 근처 호스텔에서 머물며 며칠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나름 시내라 불릴 것 같은 곳들을 놀러 다녔다. 맛있는 음식도 종종 먹었고, 해변가에 가서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그렇게 시베리아 열차 탑승할 시간이 다가왔다.


탑승 날 아침, 근처 마트에서 과일을 조금 산 후 호스텔을 나와 시베리아 열차를 탈 수 있는 기차역으로 향했다. 호스텔에서 기차역까지는 걸어서 12분 거리였는데, 14kg짜리 배낭을 메고 온 나는 가까운 그 거리조차 마치 3시간처럼 느껴졌다. 무거워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느껴지는 찰나였다.


그렇게 찰나의 영원 같았던 시간이 끝나고, 한국에서 프린트해 온 바우처를 티켓으로 바꾸기 위해 기차역 내부를 여기저기 찾으러 다녔다. 러시아인들은 신기하게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대화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티켓 교환소를 찾는 것은 너무도 어려웠다. 4명이 흩어져서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여차저차 계단을 따라 쭉 내려간 후 화장실 안을 지나서 옆 건물로 갔더니 겨우 티켓 판매소를 찾을 수 있었다. 그마저도 친절하지 않은 역무원은 역시나 설명도 러시아어로 당당하게 해 주어서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기차역에서 본 시베리아열차 | 우리의 바우처


겨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역 안에 호스텔에 우리와 함께 머물렀던, 긴 머리와 긴 수염을 가진 외국인 남자가 보였다. 그는 우리를 보고 아는 척을 했고, 본인은 호주에서 왔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의 모습은 덥수룩한 수염에 갈색 장발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예수오빠'라고 부르기로 했다. 정말 예수님이 살아계셨다면 그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싶은 모습이었으니깐. 그와 이것저것 담소를 나누던 도중 열차가 도착했고, 예수오빠와는 다음날 기차에서 저녁을 먹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여행을 할 때 우리 네 명은 스타일이 각자 있었는데, G와 나는 좀 힘들어도 그 나라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여행을 좋아하는 타입이었고, A와 L은 우리끼리 있는 것을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G와 나는 3등석 오픈칸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원했고, A와 L은 2등석 칸에서 우리끼리 쓰기를 원했다. 한국에서 꽤 오랜 시간의 이야기 끝에 결국 A와 L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그래도 러시아니까 혹시나 위험하면 어떡하냐는 A와 L의 걱정 때문이었다. 처음엔 약간의 불만 아닌 불만이 있었긴 했지만, 막상 도착해서 보니 2등석 칸이 정말 좋았다. 고요하고 안락한 느낌도, 내가 원했던 시끌벅적한 느낌과는 또 다른 색다름이 있었다. 안락하고 안전했으며, 동시에 우리 칸에 배정되어 있던 차장 아줌마도 너무너무 친절했다.


2층 침대로 구성되어 있어서 각자 자리를 정하는데 그 부분은 참 잘 맞았다. 나는 내 침대 위쪽에 누가 올라가 있으면 왠지 무너질까 봐 불안한 느낌도 들고, 침대 속에 갇힌 느낌이 들어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2층을 쓴다고 했는데, A는 나와는 다르게 동심을 가지고 있어서 2층이 신나서 좋다고 하였고, 나머지 두 명은 오르락내리락이 귀찮다며 1층을 택했다. 다행히도 서로 큰 불만 없이 2대 2로 딱 맞게 나뉘었다. 여행에서 위험한 것은 사소한 서운함이 쌓여 폭발한 뒤 의가 상하는 것인데, 적어도 침대로 인해 의가 상할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달까.


그렇게 기차가 드디어 덜커덕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출발과 동시에 고요해지는 우리의 방. 그 고요를 깨고 A가 말한다.

"라면.. 먹을까..?"

우당탕탕. 다들 기다렸다는 듯 그 소리가 무섭게 각자의 가방에서 라면을 하나씩 꺼냈다. 그렇게 우리는, 출발하자마자 배를 채우는 것으로 시작했다. 기차 안이면 움직이지도 못할 텐데 아마 여기서 나올 때쯤이면 침대에서 내려오기도 어려워질 정도로 내 몸이 불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라면을 먹고 난 뒤 화장실은 어떤지 구경을 하러 가 보았는데, 수도꼭지가 고장 나서 한 손으로는 수도꼭지를 누르며 나머지 한 손으로 세수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수도꼭지를 계속 누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고장이 아니라 원래 그런 것이란다. 아마 기차 내에서 물을 아껴 쓰게 하려고 한 것일 듯했다.


기차를 구경하려고 식당칸을 지나서 3등석 칸이 있는 부분으로 가려는데 승객으로 보이던 러시아 아줌마가 막 뭐라뭐라 소리 지르는 것이었다. 대충 느낌이 오후 9시가 소등시간인 것 같았다. 그래서 이동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그래도 우리 딱 봐도 관광객들인데 좀 친절하게 말해주지는! 약간의 마음의 상처를 입고, 그렇게 우리의 탐방은 내일로 미뤄졌다. 화장실은 열악했고, 아줌마는 험악했지만, 그 외에는 정말 다 만족스러웠고, 한 손으로의 고양이 세수를 마친 우리는 그 와중에도 팩을 하고 잠에 빠져 들었다.


아무래도 기차에서의 잠이다 보니 깊게 푹 잘 수는 없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나는 놀랍게도 꽤 잘 잤다고 자부한다. 어디에 있든 머리만 대면 잠에 빠져드는 나는, 여행과 정말 잘 맞는 사람인 듯하다. 그렇게 푹 자고 일어났는데 기차가 덜거덕 거리며 멈춘다. 그곳에서 30분간 쉰다고 했다. 일어나자마자 눈곱만 떼고 선글라스로 몰골을 가린 채 밖으로 나가 보았다. 시간이 얼마 없어서 어디를 가보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혹시나 기차를 놓치고 국제 미아가 되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냥 다시 돌아왔다.


우리는 아침으로 전날 러시아 마트에서 산 감자수프들을 종류별로 개봉했다. 으깬 감자맛과 라면국물맛이었는데 매우 이색적이고 특이했지만 사실 맛은 그냥 그랬다. 밥을 먹으며 떠들다가 다시 각자의 침대로 흩어져 책도 좀 읽고 영화도 보다가 달콤한 낮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문득 깨어났는데 덜커덕 거리는 기차 특유의 소리가 내 마음을 간지럽힌다. 내가 지금 있는 이곳이, 그리고 이 친구들과 함께하는 순간이, 꿈꿔왔던 낭만이었다. 기차의 소리는 왠지 모를 포근함을 주었고, 그 순간, 난 그 기분을 글로 남겨놓지 않으면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고요 속에서 글을 쓰고 있으니, 잠시 후 내 옆의 A가 깨어난다. 내가 먼저 같이 식당칸에 맥주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사실 그동안 4명이서 자꾸 우르르 다니니까 눈치가 좀 보였었다. 나는 역시 아직 남을 의식하는 한국인인가 보다. 그렇게 식당칸으로 가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옆자리에 있던 러시아 남자들 2명이 말을 건다. 한 명은 스물다섯, 한 명은 스물일곱 살이라고 했는데 일을 하기 위해 열차를 탔다고 했다. 건축가라고 하는데, 영어를 쓰려고 노력하는 그들의 영어 실력은 내가 8살 때 배우던 수준의 단어들이었다. 그래도 우리와 영어로 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사실 잘 보지 못했던 러시아인들의 모습 같아서 고맙기도 했다. 그들의 몸짓과 말에 의하면 어제 우리가 '예수 오빠'랑 같이 다니는 걸 봤는데 신기했다고 했다. 동양인들이 서양인과 다니는 것이 뭔가 신기하게 느껴지나 보다.


할 줄 아는 거의 유일한 러시아어였던, "야 꼬레얀까(저는 한국인입니다)"를 하니까 그들이 너무 좋아했다. 본인들은 이 열차 안에서 한국인을 본 것도 처음이고 너네랑 이렇게 힘들지만 대화가 통하는 것도 신기하다고 했다. 너무 행복하다고 말하며 우리가 너무 예쁘다고 남발하는 것이었다. 머리는 기름지고 얼굴은 씻지 못해 꼬질꼬질한데 뭐가 예쁘다는 것인지.. 아침부터 보드카를 한잔씩들 한 것 같은 모습에 눈이 잠시 잘못되었나 보구나, 하는 속마음을 가지고, 겉으로는 너희도 멋지다, 고맙다,라고 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우리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조금 있으니까 예수오빠가 우연히 밥을 먹으러 왔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데, 방금 러시아인들과 대화하면서 막혔던 숨이 통하는 느낌이었다. 영어가 모국어인 예수오빠였기에 대화가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번에는, 원하는 말을 100프로 못 하는 쪽우리였긴 하지만, 그래도 우린 듣는 건 잘하는 한국인이었기에 대화가 되니깐 기분이 좋았다. 그 오빠는 베트남-태국-한국-러시아를 거쳐 독일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독일에 일하러 가면서 1년간 살러 간다고도 했다. 해외로 일 하러 가기 전 이렇게 다니는 여행이라니.. 솔직히 정말 부러웠다. 본인은 베트남 하노이가 인생에서 최고였다며 꼭 가보라고 말했다. 그렇게 많이 여행 다니는 사람이 그 정도로 강하게 추천하니까 정말 나중에 꼭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한국에서는 홍대가 좋았단다. 이태원은 가봤냐니까 거긴 외국인들이 너무 많아서 굳이 필요성을 못 느꼈단다. 진정한 여행러구나, 싶었다. 아무튼 나와 같이 대화를 나누던 A도 이런 대화하는 것 자체가 너무 신기하고 재밌다고 했다.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 내가 가장 추구하는 여행 스타일인데 A도 재밌다고 하니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열차의 감성 샷 | 귀여운 러시아 꼬마 아이


A와 함께 우리 방으로 돌아왔더니 우리 방에 처음 보는 한국인이 있었다. 그 분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본인은 기간제 교사로 일했고 지금은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그분에 의하면 러시아인들은 여행을 잘 못 다녀서 이렇게 돌아다니는 우리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땅이 넓어서 전혀 안 그럴 것 같지만 막상 보면 우리나라의 70년대 느낌 같단다. 우리는 러시아에 며칠 안 있어봤음에도 꽤나 인정이 되는 말이다. 러시아 애기들만 해도 본인들과 다르게 생긴 우리를 너무 신기하게 쳐다보기 때문이다.


얼마 후, 30분 정차 역에 내려서 물 두 통과 과자,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샀다. 잠깐 사이에 번역기로 배운 러시아어로 물과 아이스크림을 외치며 맛있게 먹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도 'no gas'라는 말을 안준비해 가서 뜯어보니 탄산수였다. 외국은 왜 이렇게 탄산수가 많은 걸까, 궁금해서 알아보니 외국은 물이 석회수로 되어 있어 물의 질이 좋지 않고 복통을 유발할 확률이 높아서 탄산수를 마신다고 한다.


특별히 한 일도 없는데 벌써 저녁이 되었다. 간단하게 씻었는데 머리를 못 감은 지 48시간이 되어가니 너무 죽을 맛이었다. 더군다나 머리카락이 지성인 나는 남들보다 빠르게 기름져서 더욱 찝찝하다. 아무리 샴푸 스프레이를 뿌려도 상쾌하지 않다. 그 찝찝함 때문일까, 혼자 일어나서 잠시 밖으로 나와 서있는데 옆에 있던 러시아 아저씨가 자꾸 힐끔거리며 쳐다본다. 어제부터 그랬는데 그 아저씨도 동양인 아가씨들이 신기한가 보다. 말을 걸어보고 싶지만 내 몰골로는 말 걸기도 미안한 지경이었다. 그런데 지켜만 보던 러시아 아저씨가 결국 먼저 말을 걸었다. 러시아어 회화책과 그림을 그리며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저씨한테 혼자 왔냐고 물으니 세 명이 왔단다. 곧 여자애가 하나 왔는데 딸이라고 한다. 그렇게 몇 마디 나누다가 친해졌고, 여자아이에게 우리가 한국에서 사 온 캐릭터 양말을 줬다. 그 친구는 진심으로 너무 좋아했다. 그렇게 다 같이 사진을 찍었고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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