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 흘러가는 17시간의 버스 여정
드디어 페루의 수도인 리마에 입성했다. 그게 밤 11시였다. 수십 시간의 기다림과 불타오르는 엉덩이 덕택에 어찌어찌 도착은 할 수 있었다. 한국인들의 교과서인 블로그에 '그린택시'가 좋다 그래서 비록 비싸지만 안전한 방법을 택했다. 페루의 젊은 남자가 운전했는데 영어를 정말 한 마디도 못한다. 벌써부터 느껴지는 언어의 벽..
그렇게 다행히도 안전하게 파리와나 호스텔에 도착했다. 남미의 첫 인상은, 위험하고 무섭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시끌벅적하다. 호스텔에서 파티를 벌이고 있던 탓이다. 허나 너무 피곤했던 우리는 바로 방으로 입성하여 내일 타고 갈 버스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17시간동안 가야되는 일정이라 제일 좋은 버스인 '크루즈 델 수르'로 알아보려는데 웬걸, 이미 밤 12시가 넘은 시간이라 당일예약으로 안 된다. 결국 하루를 더 계획에 없던 리마에서 머무르기로 하고, 그 다음날 표를 찾아 끊었다. 끊는 과정도 험난했다. 카드가 말을 듣지않아 부탁해줄 사람들을 찾아 수소문한 결과 한국에서 K의 동생이 해주기로 했다. 그렇게 겨우 끝내고 우린 새벽 4시쯤에 잠든 듯 하다.
비몽사몽 일어나 여기저기 근처를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사랑의 공원에서 여유를 즐기며 앉아있는데 큰 배낭을 맨 여행객 커플이 스페인어로 말을 건다. 잘은 모르겠지만 짧은 스페인어로 느껴보니, 여기 사는 사람이냐고 묻는 듯 하다. ...세뇨르? 저희 누가봐도 동양인 같지 않은가요...? 그들이 편견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벌써 너무 꼬질해서 관광객처럼 안보이는것인가.
밥을 먹으러 가려는데 한국인들한테 유명한 식당은 멀어서 귀찮은 관계로 바로 옆에 있는 그래도 꽤 유명해 보이는 식당에 갔다. K는 사실 블로그를 많이 보고 맛집을 찾아다니는 편인데, 나는 귀찮아서 그렇게 잘 못한다. 각자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다.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는 맛집을 가면 눈과 입이 즐겁다. 그러나 나처럼 아무곳에나 들어가면 그 나라의 현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대신 음식은 실패율이 좀 높다. 그렇다, 여기도 실패를 했다는 뜻이다.
세비체와 파스타, '코로나' 맥주와 잉카콜라를 시켰다. 세비체는 그냥 딱 더 시고 덜 매콤한 물회 맛이다. K는 새로운 걸 잘 못먹어서 몇입 먹고 포기했으나, 맛도 잘 모르고 별 생각없는 나는 그냥 다 먹었다. 이렇게 여행다니다가 나혼자만 살 찌겠지, 또. 또. 또.
파스타는 미친듯이 짰다. 소금에 절여놓은 것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마저도 짠 걸 덜 느끼는 나는 못먹는 K의 것까지 대신 먹었다.
잉카콜라는 현지 음료로 유명하길래 사먹어보았는데 그냥 딱 아이스크림 소다 녹인맛이다. 경험은 한 번 해봤으니 그냥 콜라 먹어야 겠다. 근데 전체적인 가격이 생각보다 너무 비쌌다. 둘이 저렇게 먹고 거진 35000원이 나온 듯하다. 첫날이니깐, 하고 넘긴다. 이대로 가다간 한달에 200만원 내로 쓰자는 계획이 물건너 갈 판이다. 몰랐는데 여기도 팁을 줘야 되었다.
아무튼 그리고 호스텔로 돌아오는데 걸어오는 길에 웡마트라는 곳이 있었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의 우리는 들어가보기로 했다. 블로거 K에 의하면 중국인이 운영하는 곳이란다. 근데 생각보다 정말 너무너무 좋았던 마트였다. 과자, 물, 그리고 샴푸를 사고선 호스텔로 들어갔다. 호스텔에는 여유롭게 밖을 보며 앉아서 쉴 수 있는 곳이 있었다. 거기서 햇빛을 쐬며 여유를 즐기다가 '인디언 마켓'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경을 하러 갔다.
웬걸, 딱 페루 느낌이다. 여기는 사진을 함부로 찍으면 안 된다고 하길래 멀리서만 찍은 사진이다 ㅎㅎ
구경을 하며 돌아다니다가 자그마한 페루 마그넷을 하나 사고 맥주나 한 잔 할까 해서 밖으로 나왔다. 아까 지나가다가 왠지 술집인 것 같아 보이던 거리로 갔다. 지나갈 때마다 직원들이 들어오라고 아우성이다. 그나마 거기서 저렴해 보이는 곳으로 갔다. 피스코 샤워를 먹고싶넜는데 해피아워 타임이라며 2잔에 20솔(7천원) 정도로 파는 곳이었다. 막 싸진 않지만 그래도 그정도면 괜찮네, 하고 시켰다가 한 입을 마셔보고선 우리 입맛에 맞지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랄까, 너무 독했다.
결국 우린 다시 1리터짜리 맥주를 두잔 더 시켰다. 1잔당 12솔(4천원 정도)이었다. 얼굴만한 맥주잔을 들고 마시는데 뒤에 앉아있던 페루 아가들이 다가온다. 3살, 5살 정도 된 자매였다. 스페인어로 뭐라뭐라 하는데 'Chino?(중국인?)'라는 것만 들렸다. 그래서. 'No. Soy de Corea(아니. 한국에서 왔어)' 라고 짧은 스페인어를 했더니 막 길게 뭐라 말한다. 너무 귀여웠지만 말은 알아들을 수 없다 ㅋㅋㅋ
그래서 'No puedo hablar espanol (나 스페인어 할 줄 몰라)'이랬는데 또 대답을 길게 한다. 결국 포기하고 그냥 웃고 대충 '¿Si?(그래?)' 이런 반응만 하니까 엄마가 와서 데려간다. 'Adios(잘가)~' 라고 했더니 'Adios(안녕)~' 하면서 가는 자매. 너무너무 귀엽다. 생각해보니 사진을 같이 못 찍은게 아쉽다. 그 귀여움에 취해 돈을 생각치 못하고 한 잔 씩 더 시켜 마신 뒤 결국 우린 취하고 말았다.
얼핏 기억나는 것으로는 거기에 있던 남자 직원과 대화를 하면서, '자기가 좀 있다가 살사댄스 추러 어디어디 갈건데, 너네도 와!'하면서 초대해주길래 위치를 듣고 나서 가겠다고 말했던 기억 뿐이다. 그러나 우린 사실 너무 취해있던 지라 가겠다는 말만 남기고 호스텔로 돌아왔다.
문제는, 호스텔에 오니 또 파티를 한다. 파티의 천국이다 이곳은. 나는 이미 술에 취한 것을 알고 한시간 정도 더 놀다가 바로 자러 들어갔는데 K는 새벽 3시까지 놀았단다. 무서운 아이. 일어나자마자 둘 다 숙취에 쩔어버렸다. 조식을 먹으며 규칙을 정했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무조건 술은 한 잔 혹은 한 병 이상 금지다. 결국 다시 방으로 들어가 1시간 더 자고 나왔는데, 역시 젊은 피 답게 완전 말끔해졌다. 급히 짐을 싸고 체크아웃하면서 호스텔에 짐을 맡겼다. 파리와나 호스텔은 서비스가 정말 좋았다. 프린트도 꽁짜로 해주고 짐도 엄청 꼼꼼하고 철저하게 잘 맡아준다.
버스를 탈 시간까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술이 약간 덜 깬 우리는 숙취해소 용으로 점심에 햄버거를 먹었다. 근데 남미는 햄버거 시키는 것도 일이었다. 이 곳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둘째치고, 우리가 스페인어 못하는 것처럼 보이면 '이거 지금 못 시킨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그걸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No'라고 하면 되지 않나? 근데 그냥 말로 길게 하니까 알아들을 수가 없다. 휴. 맥모닝 시간에 가서 감자튀김이 안 된다는 걸 스페인어로 쭉 설명해 주었다. 눈치랑 단어 몇 개 알아들은 걸로 그렇게 진땀빼며 시켰다.
그리고 호스텔로 돌아와 좀 쉬다가 우버를 타고 출발했다. 분명 Javier Plado로 가라 해서 갔는데 왠일인지 현지인들 뿐이다. 약간 두렵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해서 두리번거리니, 거기 현지인이 막 설명해준다. 그 사람도 역시나 말을 90%하고, 손짓을 그나마 10%정도 섞어 주었다. 손짓을 보니 여기가 아니란다. 나가서 쭉 가야 된다는 거 말인 것 같았기에, 걸어가면서 길만 한 5명에게 물으면서 갔다.
가보니 크루즈 델 수르라는 터미널이 따로 있다. 배낭 10키로가 넘는 걸 매고 최소 20분은 걸은 듯 하다.이것이 바로 진정한 배낭여행이다. 겨우 도착한 버스터미널은 '크루즈 델 수르'를 타는 곳만 전용으로 있어서 보안도 꽤나 잘 된 것 처럼 보인다. 사람들이 좀 부유해 보인달까?
아무튼 이제 진짜 출발한다. 크루즈 델 수르에서의 세미까마와 함께하는 17시간의 버스 여정. 버스는 일단 너무 괜찮다. 밥도 잘 나오고. 비행기처럼 각자 있는 티비에서는 친절하게 영어자막도 나온다. 직원도 친절하다. 진정한 부르주아들을 위한 버스가 맞는가보다. VIP를 경험한 느낌일랄까.
나름 괜찮은 기내식이었다. 좀 추워서 옷을 더 따뜻하게 입고 탑승할 걸 그랬다. 그렇게 17시간동안 혼자 사색하다가 잠자다가 밥먹다가 티비보다가 다시 잠자다가, 그러다보니 도착해있었다.
페루의 아레키파에 입성,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