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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L.A., 그 잔잔한 탈출

저, 미국에서 나가게 해주세요

by 신잔잔

미국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LA는 정말 살기 좋은 곳임을 느끼고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달려갔다. 주말이라 그런지 공항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렇게 스피릿 항공을 타기 위해 공항에 3시간 전에 도착했다. 돌아다니다가 겨우 찾아서 티켓을 끊으려고 하는데, 직원의 청천벽력 같은 소리. 우리가 페루에서 나간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티켓을 끊어줄 수가 없다고 한다.


다른 데는 아무 항공도 그런 말이 없었는데, 왜 대체 스피릿 항공만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 그래서 우리는 여행하다가 아르헨티나로 가서 출국하려고 한다, 하면서 아르헨티나에서 나가는 비행기 표를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이건 페루에서 나가는 게 아니라며 안 된단다. 아니 세상에 길게 배낭 여행 떠나는 사람들이 계획이 정확하면 얼마나 정확하겠냐고요. 그래서 '난 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다. 한국인들은 다 그냥 간다.'라고 수 십번을 아무리 말해도 버스티켓이라도 있어야 한단다. 정말 막무가내였다. L.A.는 살기 좋은 곳이라고 집에서 나오면서 말했던가. 공항에서의 시간이 내 생각을 다시금 돌려놓은 듯 했다.


스피릿항공이 국제선을 취항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 아무것도 잘 모르는 것 같은 직원들이 여전히 아무 것도 모르는 또다른 남자 직원에게 물어보면서 다시금 무조건 필요하다고 말하는 말을 들어야만 했다.


그래, 침착하자, 라고 다짐하며 일단은 버스 티켓을 끊으려 '크루즈 델 수르'에 들어가 페루에서 아르헨티나로 가는 버스라도 끊어 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또 사이트에서 결제가 안된다. ARS 서비스를 받아야 되는데 어차피 유심 바꿔서 다니려고 마음 먹었기 때문에 휴대폰을 정지시켜두고 와서 전화로 ARS 서비스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애인이고 친구들이고 할 것 없이 전화를 다 돌렸는데 한국은 심지어 아침 시간이라 다들 늦잠 삼매경이다.


안 풀리면 정말 계속 안 풀리나보다.


결국 아침형인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카 아니고, 엄찬. 스페인 사이트 결제라 쓸 내용도 많고 어려운데 우리 어머니 정말 타자도 느리고 전화는 잘 안들리는 와중에 한시간 반을 통화했다. 정말 전화 통화로 설명하면서도 손이 떨리고 눈물도 났다. 이걸 못 타면 어떡하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가, 시간 안에 못가게 되는 건가. 그러면 예약해둔 페루에서의 방은 어떡하지, 등등 짧은 시간에 수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정말 체크인이 5분 남은 상황이었는데, 막무가내로 안된다고만 말하던 스피릿 항공의 남자 직원이 우릴 손으로 까딱까딱하며 부른다. 그 순간 놀랍게도, 마침 엄마, 결제에 성공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입에서는 기쁨의 미소가 흐르고, 손으로는 휴대폰 확인 메일 창을 보여주고. 말 그대로 혼돈의 대잔치였다. 아니 이렇게 나가는 것만 형식적으로 보여주고 바로 취소할거 굳이 왜 나가는게 필요한 지 지금도 이해를 못하겠다. 페루에 평생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스피릿항공은 미국 항공사들 중 꼴찌를 차지했는데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렇게 여전히 콩닥거리는 가슴을 안고 겨우겨우 들어갔다. 돈이없는 여행객인 우리는 항공을 총 3개를 타고 페루에 가야하는 일정이었다. LA에서 Las Vegas에 도착한 뒤, 플로리다 공항에서 10시간 대기 후 페루로 가는 것이었다. 중간중간에 메일로 실시간으로 변하는 시간과 장소를 보여주었는데 한 30분 사이에 십 수개의 메일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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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는 보내주지 않으려 하더니, 이제는 또 똥개훈련을 시키는 건가, 라며 불편한 마음으로 비행기를 탔는데 막상 타보니 그래도 항공 자체는 깨끗하고 괜찮았다. 나이 드신 할아버지 스튜어디스도 있었는데 엄청 재밌는 분이었고 직원들도 전부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또 어떤 스튜어디스 분은 남자였는데 정말로 굉장한 여자 목소리를 가진 분이 계셔서 아직까지도 성별이 의문으로 남아있다. 역시 다양성을 존중하는 나라는 맞는 듯 하다.


마지막에 페루로 가는 비행기는 엄청 흔들렸었다. 같이 간 K는 무서워서 잠도 못들었다고 하는데, 언제 어디서나 머리를 대면 자는 나는 거의 깨지 않고 잘 잤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어느새 페루의 리마 공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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