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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부에노스아이레스, 그 잔잔한 여행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사랑에 빠질 확률

by 신잔잔

내일이면 이제 한국으로 출발하게 되는 날이다. 아침에 눈을 뜨니 창밖으로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우산은 이미 망가져서 볼리비아에서 버리고 왔음에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보내고 있는 이 행복한 시간은, 부슬부슬 내리는 비마저도 그저 창을 두드리는 노랫소리처럼 내 마음을 적신다. 우산이 없었으나 다행히도 숙소에 주인이 남겨둔 우산이 하나가 있었다. 우리가 묵는 방 1층에 카페가 있어 그 곳으로 향했다. 팬케잌과 커피를 시켰는데, 역시나 이 곳에서의 커피는 너무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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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카페에서의 펜케잌과 카페라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마지막 날이라 그런가,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다. 카페에서 약간의 여유를 부린 후 매일 가던 티켓을 사던 거리로 나갔다. 마지막이니만큼, 후회없게 탱고를 다시 한 번 보고 가자고 K와 이야기했다. 그 열정적인 '하나의 심장'을 한번 더 내 심장에 담아두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던 까닭이다. 고심 끝에 'Bar Sur(바 수르)'라는 곳을 예매하였다.


바 수르는, 작은 공간에서 서너시간 공연을 하면서 최대 10테이블 정도만 받는다고 한다. 그 동안 보던 큰 공연장과는 차이가 있어, 색다른 탱고를 눈앞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끝이 아름다워야 모든 시간들이 더 소중해질 것 같았기에 가격이 조금 있더라도 가장 끌리는 좋은 곳을 택했다.


그렇게 표를 예매하고 카페 토르토니로 커피를 한 잔 더 마시러 이동했다. 첫 날부터 느끼던 것이지만 남미에는 참 여경들이 많다. 그리고 여경들이 전체적으로 덩치가 크다. 위압감이 느껴진다. 거기다가 그들은 실제로 총과 무기들을 사용하기도 하니, 아마 더 그런 듯하다. 이런 곳에서 일하려면 사실 덩치가 작으면 안 될 것 같기도 하다.


카페 토르토니는 160여 년의 전통이 있는 곳이었다.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대기가 있다. 10분 쯤 기다리니 들어갈 수 있었다. 그 곳에서, 커피와 맥주, 그리고 추러스를 시켰다. 맛은 전체적으로 그냥 그렇다. 아마 전통과 공간의 아름다움이 그 곳의 명성을 이어주는 듯 하다.


1548480418772.jpg?type=w773 먹다 말고 찍은 사진, 역시 엉망이다.


그 곳을 나와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어제 느꼈던 소고기의 행복이 기억나,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마트에 들려 소고기를 또다시 구매했다. 내일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숙소에서 마지막 만찬으로 즐길 예정이다.


오늘 저녁은 지나가다가 본 'Las Cabras'에서 외식을 하기로 했다. 분위기는 조금 별로였지만, 그래도 우리 숙소와 가까이 있었기에 외식 후 '바 수르'에 가기에 시간이 적당했다. 일단은 스테이크 두 개를 미디움레어로 시켰다. 와인은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종업원이 그런거 물어볼 때마다 어렵다고 말한다. 역시나 이곳은 고급 레스토랑은 아닌 듯 하다. 조금 유명하거나 비싼 곳을 가면 다들 멋드러지게 추천해주던데.


스테이크 전에 와인부터 나왔는데, 와인 잔이 없다. 컵에다 따라주는 와인, 당황스럽다. 와인 맛을 잘 알진 못하지만 그럼에도 와인의 맛이 그저 그렇다. 와인잔에 마시지 않아서 더 그런가. 와인이 나온 지 30분이 지난 뒤에서야 나온 우리 스테이크. 그마저도 거의 웰던에 가깝게 나왔다. 먹는데 질겨서 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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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엔 나쁘지 않다


마지막 날 밤을 좋은 곳에서의 외식으로 꿈꿨으나, 그 꿈은 처참히 깨지고 말았다. 역시 방에서 직접 구워먹는 것이 최고로 맛있는 듯 하다. 만족스럽지 못한 식사를 마친 후, Bar Sur(바 수르)에 가기 위해 나왔다.


Bar sur(바 수르)는 산 뗄모 시장 근처에 있는데, 저녁 9시에 가기엔 위험한 곳이라 택시를 탔다. 바 수르에 도착하니 8시 반이었다. 우리가 1등이다. 순서대로 안내를 해 주는지, 가장 좋은 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조금 있으니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들어온다.


바 수르는 영화 '해피투게더'에서 장국영과 양조위가 나왔던 장면에 있었다고 한다. '해피투게더'를 보지 않았기에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에 가면 그래도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기대와 함께 공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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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수르의 내부, 그리고 공연


말 그대로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공연에 시작하기도 전부터 설렘 가득하다. 종업원의 추천을 받아 와인도 시켰다. 이 곳에서 마신 와인은 너무 맛있었다. 역시 좀 전에 간 레스토랑과 차원이 다르다. 아까 먹은 고기가 성에 차지 않았던 우리는 엠파나다와 피자도 추가로 시켰다. 하루에 거의 네 끼를 먹는 듯 한 우리.


공연은 연주-노래-탱고-연주-노래-탱고... 순서로 거의 무한 반복이 되듯 이어졌다. 눈 앞에서 보는 연주는 너무 아름다웠다. 피아노 연주자 할아버지는 연세가 적어도 80세는 넘었을 것 같았는데, 오랜 세월 음악을 해오던 그 아우라 만으로도 무대가 가득찬다.


노래는 두 분에서 부르셨는데 남자 분은 기타에 노래를, 여자 분은 노래에 연기를 하였다. 밤 12시가 넘어갈 즈음에는 본인이 좋아하는 노래를 선택해서 부를 수 있었던 것인지, 노래 스타일이 확 바뀐다. 갑자기 뮤지컬 노래같은 것을 하며 대사와 연기까지 깃들인 무대를 선보였는데, 앞에서 불렀던 구슬픈 탱고 풍의 음악을 노래로 하던 때와 달리 더욱 행복해보였다.


탱고는, 역시나, 너무 아름다웠다는 말 밖에는 표현이 되지 않는다. 무용수들인 음악을 마음으로 느끼며 탱고를 추고, 그걸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행운이 내게 있음에 감사했다. 중간에 약간의 실수도 하였지만, 실수를 만회하듯 미소짓는 모습조차도 탱고의 일부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 좁은 공간에서 네 개의 발이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지만, 절대로 부딪치지 않는다. 숨결 하나, 손짓 하나에도 애절함과 아슬한 숨막힘이 깃들어 있다. 특히 여성 무용수의 손 끝으로 남성 무용수를 쓰다듬는 장면은 아찔했고, 남성 무용수가 공연 시작 전에 여성 무용수에게 비쥬를 하며 잘 부탁한다는 인사조차 탱고의 일부인 듯 보였으며, 그 모든 순간들이 내겐 숨을 쉴 수 없는 황홀함을 선사했다. 탱고를 추다 보면 여성과 남성의 얼굴이 거의 맞닿을 것 같은 장면들이 종종 나오는 데, 그 마주보는 눈빛이 너무 강렬했다.


무대가 끝날 때마다 쉬는 시간이 조금씩 있는데, 탱고 무용수들이 돌아다니며 탱고를 하는 포즈로 사진을 찍어준다. 나는 그 포즈는 라 보카의 무용수와 찍었으니, 그냥 함께 서서 사진을 찍어주길 요청했다. (사실 탱고 여자 무용수 언니가 너무 예뻤기 때문에). 물론 그 사진은 나만 간직하기로 한다. 무용수들 사이의 오징어가 있는 듯 하여.


아침형 인간이라 저녁 10시만 되어도 졸음을 참을 수 없는 나지만, 이 공연을 보는 시간들이 너무도 소중했기에 저녁 9시부터 새벽 1시 반까지 그 곳에서 공연을 보며 남아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후에도 이전에 본 공연의 여운이 아스라히 남아있다. 과연 잠에 들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황홀했던 시간이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마지막 밤을 정말 황홀하게 불태웠다고 자부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사랑에 빠질 확률,

누가 뭐라해도, 백 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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