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겪으니 철학이 시작된다
트레킹을 시작하려는데 가이드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저기 보이는 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저쪽으로 가서 잠을 잔다'라고 말을 했다. 나와 K는 그저 웃음이 나왔다. 대체 어디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손으로 가리키는 데도 안 보이는 미지의 장소였다. 아무튼, 가라는 곳으로 가면 되겠지, 그렇게 시작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세 시간을 넘게 하는데 정말 힘들었다. 오르락 내리막이 심하지 않은 길은 그래도 갈 만한데 오르락 내리락에다가 험난한 돌길이 펼쳐지면 정말 답이 없어졌다. 그래도 나름 오전 3시간은 좀 괜찮았던 듯 하다. 그리고 점심을 먹는데 역시나 점심도 너무너무 부실했다. 점심을 먹는데 다들 뭐라뭐라 말한다. 그러던 중에 우리가 영어를 할 줄 모르는 거 같다고 누가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영국 언니가 우리 영어 할 줄 안다고 했다. 무슨 내용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영국 언니랑 한두마디 했었었던 것 같다. 대답할 수 있었지만 사실 모든 것이 힘들고 고산병의 아픔에 대답하기 마저도 귀찮아서 포기했다.
좀 걷는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우리 우산 없는데 어쩌지, 하는데 다들 가방에서 비옷을 꺼내 입는다. 착착 진행되는 그들의 모습에 우리는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처음 오는 하이킹에, 우산마저 까먹고 간식만 챙기고, 심지어 1박 2일인데 작은 힙색 가방 하나씩 매고 갔다. 시일이 지난 지금에서야 돌이켜보지만, 어떻게 그렇게 무모했을까. 얼마나 사람들이 보기에 어이가 없었을까. 결국 그냥 비 맞지 뭐, 하면서 쿨한 마음으로 그냥 쭉 걸어갔다. 다행히도 비는 5분 안에 그쳤고 다들 비옷도 벗었다.
오후 코스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돌길의 향연이었고 어떤 곳은 어찌나 힘든지, 10미터 올라가고 쉬고 해야만 했다. 세 시간이 정말 30시간 같았다. 마라톤을 좀 했다던 영국 언니는 우리 둘과 함께 맨 뒤에서 서로 다독이며 걸어갔다. 그 언니도 참 힘들어했다. 가이드가 중간중간에 멈춰 세워서 엄청 많은 설명들을 해주었다. 페루의 전통 차, 특정 꽃잎들, 이파리, 가다가 보이는 과일도 따서 먹여주는 등등 다 손에 하나하나 얹어주며 설명해주었다. 열정 엄청 가득한 우리 가이드님, 이지만 힘들어서 귀에 잘 안 들어온다.
정말 하이킹을 처음 하는 사람들은 이런 갑작스러운 무모한 1박 2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도착했을 때 굉장히 뿌듯하긴 하지만 다음날 걸을 수는 없다. 걷다보면 정말 대체 언제쯤 도착하는가, 생각이 든다. 돌길을 한참 걸어올라가다보면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오지만, 잠을 자러 가는 길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다가 문득 드는 생각은, 내가 저 목적지까지 보고 가면 한없이 느껴지지만, 내 눈앞에 놓여진 돌길 하나하나를 보며, 이 돌 하나를 넘으면 내 목적지에 한 걸음 더 가까워 지는구나, 또 이 돌 하나느 넘으면 내 목적지에 한 걸음 더 가까워 지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다 보면 버틸만 하다. 내 눈앞의 돌을 하나 밟고 올라간다는 게, 결국은 그런 의미니까.
정말 뜬금없지만 그렇게 힘들고 조용히 걷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도 똑같은 게 아닐까. 내 머나먼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자 한다면 죽을만큼 멀고 힘들게 느껴지나, 내 눈 앞에 놓인 단 한 걸음, 이 계단 하나만 넘어가다 보면 언젠가 도착한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을 다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정말 뜬금없게도, 첫 하이킹에서 인생을 생각한다.
그렇게 30시간 같은 3시간이 지난 후 겨우 우리가 잠에 들 롯지에 도착했다. 꽤나 멀리서 황야 속에 묻힌 오아시스 같은 곳이 보였고, 가이드가 저기라고 가리키는데 정말 기뻐서 눈물날 뻔 했다.
롯지에 도착하니 풀장도 있었다. 정말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다만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고 비는 오고 물은 차갑고 숙소는 개인별로 주긴 했지만 불빛이 없었다. 휴대폰 불빛으로 모든 것을 의존해야 했다. 그 힘든 와중에도 침대는 또 불안해서 배드버그 약만 엄청나게 뿌리고서야 겨우 앉았다. 샤워를 하러 나가는데, 밖이 너무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샤워실에도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와 K는 한명씩 씻기로 하고 서로 휴대폰 불빛을 비춰주며 바깥을 지키기로 했다. 그렇게 각자 정말 3분컷으로 끝낸 얼음장 물 샤워가 끝났다.
그렇게 우린 빠르게 찬물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외국인 언니 오빠들은 그 추운데 수영장에 들어간다. 다시 비가 오기 시작해서 정말, 정말 너무너무 추운 상황이었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저녁 먹기 위해 다시 팀원들을 만났는데 '샤워했냐' 물어보니 '수영장 물이 샤워지 머~'라고 쿨하게 말하는 폴란드인 부부. 역시 프리한 유럽인들 답다.
우리가 하이킹을 시작한 날이 12월 31일이었으므로 밥을 먹고 나니, 롯지의 주인들이 새해를 기념하자며 샹그리아도 마음껏 마시라며 준다. 수영장 물도 따뜻하게 해놓을 테니 언제든 들어가서 놀라고도 했다. 역시 크리스마스와 새해의 인심은 전세계 어딜가도 최고다. 다들 행복해지는 시간이니깐.
밥을 먹으려는데 가이드가 내일 당나귀 타고 갈 사람 없냐고 물었다. 어머, 저희요, 우리요, 가이드님 우리요!!! 어지간하면 시작한 걸 끝내야 하는 내 성격인데, 문제는 하필 둘 다 걷던 중에 생리가 시작된 것이다. 허리는 끊어질 것 같고, 도무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변명이라면 변명이지만 그렇기에 우린 타야만 했다. 당나귀 한 마리에 2만원이지만 더 거금이라도 당당히 지불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일행들 중 우리만 타기로 했다.
밥을 먹는데 우리 앞에 폴란드인 부부가 앉게 되었다. 폴란드 부부는 영국에서 살고 있어서 영어를 엄청 잘 했다. 처음엔 조용히 있다가 내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마추픽추 하이킹 이거보다 힘들어요?' 했더니 우리가 영어를 할 줄 아는 것을 깨닫고 갑자기 신나서 말하기 시작하는 부부. 그러면서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넷이서 계속 떠들었다. 나야 이런 것을 좋아해서 여행을 다니는 의미가 크지만 K도 이런 것을 좋아한다. 이게 안 맞으면 힘들겠지. 그녀도 호기심이 많은 친구니까.
내가 유럽인들은 휴가가 길어서 이런데 오기 좀 좋겠다 했더니 자기들도 아직 학생이란다. 들어보니 둘 다 박사과정이고 남편은 그 중에서도 의대 박사 과정 중이었다. 우리 한국인이라니까 질문을 엄청 많이 한다. 트럼프에 대한 생각, 북한에 대한 생각, 우리나라 사람들 특징과 우리나라를 여행하게 되면 어디가 좋은지 등등. 이런 질문들을 자주 받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많이 느낀다. 우리 나라도 젊을 때 국어 교육이 이런 식이었으면 좋겠다고. 책을 한 권 읽어도 각자의 생각을 말하고 호기심을 가질 수 있고 서로 토론 할 수 있는, 말이다.
부부가 나보고 전공이 뭐냐고 묻길래 전자공학이라 했더니, 졸업하고 더 공부할 거냐, 뭐 그런걸 물었다. 난 내 학과에 흥미가 없어서 공부를 더 할 생각은 없다고 했더니 그러면 꿈이 뭐냐고 묻는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친구들은 꿈이 뭐냐는 걸 참 많이 묻는 것 같다. 거기서 말문이 막힐 때 참 스스로가 답답하다. (참고로 이 때는 2019년도라 대학 졸업 직전이었다) 졸업하면, 그러게. 내 꿈이 뭘까. 원래는 하고 싶은게 참 많았는데 현실이 눈앞에 닥치니 나도 궁금해진다 이제는.
아무튼 우리의 한마디 한마디에 그 부부는 굉장히 재밌어하고 관심이 많았다. 우리도 물론 재밌었지만 너무 피곤했었기에 들어가야겠다고 하니까 폴란드 남편이 붙잡는다. 가지말라고 거의 애원했다. 가장 말 없던 분이었는데 약간 취하신 듯 했다. 그래도 우린 자야하므로, 아쉽지만 들어가기로 했다. 너무 피곤하니깐.. 새해 넘어가는 일자는 보지 않을래.. 생리적 욕구가 더 강한 우리였다.
근데 자다가 정말 콜카캐년에 폭탄이 떨어지는 줄 알고 기겁하면서 일어났는데 알고보니 새해가 밝았다며 폭죽을 터뜨리는 소리였다. 진짜 1시간 동안 그 소리가, 형언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깨서 일어나진 않았다. 추워죽는 줄 알았기에 침낭에 꽁꽁 싸매고 누워 있었다.
아무튼 그리고 나서 아침에 하이킹 하는 사람들은 5시에 모이고 당나귀를 타는 사람들은 6시에 모이면 되어서 늦게 나갔다. 내가 자다가 밖에서 '엄마~~ 여기 모닥불 있어~~' 라는 엄~~청 큰 소리를 들은 거 같아서 '스페인어 중에 되게 우리나라 말 같은 말이 있네. 근데 좀 시끄러운데 조용히 하지' 싶었다. 아무튼 그렇게 일어나서 준비하고 당나귀를 타러 갔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나와보니 정말 모닥불 흔적이 있었다. 엇, 한국인들이 있나 싶어서 보는데 정말 있었다. 여행지에 오래 있으셨던 탓인지 얼굴이 까만 모녀였지만, 여하튼 한국말을 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두 모녀가 정말 미친듯이 싸우기 시작한다. '엄마!!! 먼저 가지 말랬지!!!!' '아, 그냥 가면 되지!!!!!' 어쩌고 저쩌고. 엄청 소리지르며 싸운다. 같은 한국인인 척 안하려고 급하게 아무말도 안 했다. 아는 척 하지 말자 우리..
당나귀는 세 명 당 한 담당자로 잡혔는데 하필 나와 그 모녀가 같이 묶였다. 근데 그 중에 엄마가 하는 말, '아니 이 당나귀는 왜 이렇게 허약해보여 똑같은 돈 냈는데 왜 약한거 주냐!'라고 하고, 딸은 더 큰 목소리로 '아, 다 똑같겠지! 그냥 타!!!!'라며 소리지르면서 말하고. 내가 저 사람들이랑 같이 가야한다고? 제발. 이건 아닌 듯 했다. 그래서 얼른 다른 담당자 한테 짧은 스페인어로 말했다. '저기 쟤가 내 친구다. 우리 같이 탈래요..' 했더니 오케이 하더라. 휴... 다행이다.
그렇게 조금 가다 보니 어제 함께 늦게 걸어가던 영국 언니를 발견했다. 부럽다고 하기에 내가 엉덩이 엄청 아프다고 엄살부렸다. 겨우 도착했는데, 폴란드 부부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한시간 반만에 올라왔다고 한다. 어제 얘기하는데 원래 하이킹 좋아하는 부부였다. 그 언니는 집 앞에 산이 있어서 맨날 가족들과 산 탔었다고. 새해 전 날 대화하던 중 비몽사몽한 와중에 들었던 기억이 얼핏 난다.
그렇게 다 도착 후 아침을 먹고 온천으로 향했다. 우와, 너무 좋다, 정말로. 모든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어차피 당나귀를 탈 것이라 수영복은 미리 입고 있었지만 그곳에도 갈아입는 곳은 충분히 많았다. 그렇게 따끈한 온천을 하다가 프랑스 커플이 옆에서 말을 걸었다. 'Are you korean?'. 맞다고 하니, 남자분이 너무 좋아한다. 자기가 한국 놀러 갔었는데 너무 좋았단다. 뭐가 그렇게 좋았냐니까 다 좋았단다. 남자분이 자기는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얘기한다. '그정도라고? 대체 왜?'라고 했더니, 한국인들의 패션을 너무 좋아한단다. 오호, 나랑은 관련 없는 일이군. 나는 아무렇게나 입고다니는 한국에 몇 없는 패션 별종이니깐. 그래도 한국인들이 정말 옷 잘입는 건 세계에서 많이 알아주는 구나, 싶었다. 다양한 이유로 우리나라를 좋아한다니 뿌듯하기도 했고.
온천이 끝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점심은 미리 20솔 주었던 뷔페식이었는데, 그럭저럭 괜찮았다. 배를 두드리며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하이킹 전, 원래 묵었던 1호점이 자리가 없었기에 2호점으로 미리 예약했었었다. 근데 우리 짐까지 친절하게 미리 그곳으로 갖다주었더라. 서비스 최고였다. 규모만 보면 2호점이 사실 더 크고 좋은 듯 하다. 위치는 1호점이 더 좋고.
너무너무 피곤한 1박 2일이 드디어 끝났다. 내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도운 도시, 쿠스코로 향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