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9일에 쓴 글
이제 내 인생에 없으니까 편한 것 같은데 못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사람은 바뀌지 않더라며 섭섭함을 내비치면서도 정작 나는 바뀌었는지, 혹시 그 사람은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생각한다. 인생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의 ‘많은’은 몇 명일까? 그 정도면 됐어의 ‘그 정도’는 서 너 명이면 될까?
드디어 애장할 과거의 책까지 찾아내게 하는 작가가 생겼다. 작가 황정은. 등장인물의 이름에 험난한 서사를 함축하지 않고 알파벳으로 점쳐버리는 그 쿨함에 반했다. 단편 ‘문’의 주인공 이름도 그저 m 일뿐이다. 열 수도 닫을 수도 없는 문이 있다. m의 등 뒤에 있는 문에서 어제 잠시 스쳤던 인물이 나와 본인의 인생 이야기를 한다. 동문에서 나오신 m의 할머니는 생전 좋아하시던 커피를 마신다. 할머니가 또 보고 싶어 그라인더를 갈아놓으면서도 m은 아주 전부터 희로애락이 희박하다고 말한다. 커피를 좋아해서 나오셨겠냐, 네가 걱정돼서 나오셨겠지. 라는 인물의 말에도 ‘쓸쓸하다, 그 얘기’라고 답할 뿐이다. m이 속으로 자문자답한 것인지 실재하는 허상의 차문에 구답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니면 뇌의 주름들 사이사이에 구겨버린 말을 끄집어내 하나씩 열거한 것일 수도 있다.
점점 버겁다. 그냥 그렇게 된 거고 더 이상 곁에 둘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한두 명이 아니라 적어도 열댓 명이 말을 내 귀에 우수수 쏟아낸다. 씁쓸하다. 내 귓속이 온갖 단어로 흘러넘쳐도 나는 말을 목구멍으로 씹어넘기거나 입 밖으로 한 글자 내뱉지 않는다. 소설 속 m의 문도 ‘언제나 등 뒤에, 한두 발짝 떨어진 곳에 있어서 m이 문을 좀 자세히 보려고 뒤로 돌아서면 문도 돌아서 m의 등 뒤로 갔다.’. 등과 문의 거리만큼 ㄱ과 ㄴ이 혀끝과 목구멍 사이에서 공전한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지? 수없이 되풀이될 자문과 반문이다. 내 등 뒤에 문이 하나 달려있다고 가정할 때 누가 첫 번째로 문고리를 틀 것인가. 누가 제일 먼저 찾아오길 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