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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주 Oct 25. 2024

먹고사는 이야기

믹스커피의 완벽한 타이밍

 


"나가 나가 나가. 1번아 나가서 엘리베이터 좀 잡아.

 2번아 뭐 하니! 양말을 왜 아직도 안 신었어. 로션? 로션은 무슨. 됐어 나가 그냥 나가."

 "신호 바뀐다 뛰어!!!" 



 큰 딸은 분명히 나를 닮았다. 저 아침잠 많고 굼뜬 행동에도 차마 '얘는 누굴 닮아 이러니'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건 일말의 양심일까. 유전자의 신비란 놀라울 뿐이다. 오히려 당황스러운 건 둘째다. 여섯 살밖에 안된 애가 뭔 욕심인지 새벽같이 일어나 소리도 없이 살금살금 깨금발로 나가 꼬물꼬물 오늘치 구몬을 다 끝내놓고서야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가족들을 하나씩 흔들어 깨우러 들어온다. 


 "엄마아, 일어나. 나 구몬 다했어. 봐봐."


 아니 이렇게 기특할 수가. 비록 9의 다음 수는? 10. 10의 다음 수는? 11 수준이지만. 아무렴 어때!


"아구 내 새끼, 장하다 내 새끼, 뽀뽀뽀뽀뽀"


 비몽사몽 한 와중에도 자식 공부한단 소리는 그 어떤 잘생긴 아이돌의 사랑노래보다 달콤하다. 괜히 그동안 동네 다른 엄마들한테 '글쎄요, 저희 애들은 공부보다 운동과 사회성을 어쩌고저쩌고' 하고 다닌 것이 굉장히 머쓱해진다. 


  쿨한 척해서 죄송해요- 

  저도 어쩔 수 없는 욕심 많은 애엄마였어요 다시는 특별히 오픈마인드 엄마인 척하지 않겠습니다!


 밤새 입 벌리고 자느라 단내 나는 입술로 뽀뽀세례를 퍼붓고 나면 둘째는 얼굴에 뭍은 침을 가차 없이 닦아내며, 하지만 숨길 수 없는 뿌듯함으로 미소가 비죽비죽 새어 나오는 입꼬리를 애써 진정시키고는 다음 목표물을 깨우러 홀연히 떠난다.


 아름다운 아침이다. 아름다운 아침이 여기까지 뿐이라는 점이 안타깝지만. 

 

 그새 아빠는 누가 쫓아올세라 정신없이 제 한 몸 잽싸게 챙겨 출근하러 튀었, 아니 급하게 나섰고, 무시무시한 엄마 일어났고, 이제는 잠꾸러기만 남았다. 자... 본 게임을 시작하자.


 일어나라 밥 먹어라 옷 입어라 그 옷 안된다 춥다. 에헤이 안된다니까. 김 없어. 그냥 먹어. 준비물 챙겼냐. 모른다고? 왜 몰라? 엄마 준비물이냐 네 준비물이잖으악!!!


 분명히 우리나라 수많은 육아고수님들께서 엄해도 괜찮고 다정해도 괜찮으니 일관성만 지키라 하셨던 것 같은데. 아뿔싸 또 망했구나. 방금 롹커 못지않게 성대 짱짱한 샤우팅을 해놓고도 (아무래도 나는 진짜 가수들만 쓴다는 두성을 터득한 것 같다.) 가느다란 밝은 갈색빛 머리카락을 양갈래로 곱게 빗어 뽀얗게 드러난 가르마에 나도 모르게 입을 맞추며 스스로도 지금 상황이 앞뒤가 전-혀 맞지 않다는 걸 알기에 부러 더 무심하게 말한다. 포인트는 툭 뱉듯이. 쿨하게. 느낌 아니까.


 "사랑해. 알지?" 


 그래, 너 고작 여덟 살인데... 그럴 수도 있는 건데 아까 너무 크게 혼낸 것 같아서 미안-하다는, 

말로 하긴 구차하고 그냥 넘어가긴 켕기는 소심한 마음을 담아.

 

자, 여기서 우리 딸의 대답은?

 .

 .

 .  

 "엄마 근데 나 공주머리띠 하게 양갈래 말고 여기를 이렇게 땋아서 위로..." 

 "됐어. 그만 말하고 앞에 봐." 

 "넵."



 단짠도 이런 단짠이 없다. 





 현관문 나서자마자 앞뒤 없이 쌩하니 뛰어가는 푼수 같은 큰 애 돌다리 조심해서 건너라 n차 샤우팅, 뒤에서 느릿느릿 굼벵이세요? 엉금엉금 기어 오는 작은 애 손 잡아주는 척 온 힘을 실어 잡아끌고 축지법으로 착착 뛰듯이 걸어 각자 학교와 유치원에 데려다 놓고 나면


 후... 끝났다.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애국가 절로 나오고 새 희망이 피어날 것만 같은 상쾌한 가을 아침 아홉 시에, 왜 내 체력은 벌써 소진되어 빨간불이 깜빡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아침을 보낸 것 같은 까치집 머리에 입술도 못 발라 허여멀건한 얼굴로 나온 다른 1학년 엄마들을 마주치면 말하지 않아도 진한 눈빛으로 동지애를 나누는 것도 소소한 재미 중 하나다


 북적북적한 와중에도 귀엽다고 몇 장 남겨놓은 사진들을 남편에게 전송하며 터덜터덜 집에 들어오면 운동화 속에 숨어있던 빼꼼- 빵꾸 난 양말. 

훗, k아줌마에게 이딴 구멍 난 양말 따위. 버릴 것 같지? 아닌데, 방향 바꿔서 한번 더 신을 건데.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한숨 돌리며, 오늘도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스스로에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선물한다. 제-일 좋아하는 이 시간.

 

 보글보글보글. 

 믹스 어딨어 믹스.


 보글보글보글.

 찾았다! 맥심 화이트골드. 오 내 사랑.


 보글보글보글.

 보글보글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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