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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신혁 Jul 06. 2024

빛나는 도시의 피곤한 노동자들

개미는 오늘도 열심히 일을 하네 - 마르크스의 소외론


1. 개미는 오늘도 열심히 일을 하네


    김 씨는 고양시의 한 지하철역에서 공익 근무를 했었다. 김 씨가 지하철 공익 생활에서 꽤나 놀랐던 것은 김 씨의 상상 이상으로 7시부터 8시 출근 시간대에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는 것이었다. 출근 시간대에 열차 이용객이 많을 것이라는 것은 당연히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나 많을 줄은 몰랐다. 김 씨는 사람이 많아 혹시 모를 안전사고가 발생할까 싶어 지하철 개찰구 옆에서 사람들은 지켜보았다. 그럴 때마다 같은 시간대에 늘 마주치는 사람들을 보며 혼자만의 내적 친밀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곧 들어오는 열차에 타기 위해 멀리서부터 뛰어오는 사람,  열차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신문을 읽는 사람 등 사람마다 유형은 다르지만,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일하러 간다는 것이다!


출근길 광화문역 (뉴스1, 2023. 03. 29.)


    우리는 얼마나 일을 하는 것일까?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근로시간 최상위 국가이다. 우리나라의 근로시간은 2021년 기준 연평균 1,829시간이라고 한다. 우리 위로는 멕시코와 칠레가 있다(이 나라들은 도대체 뭐지..?). 그나마 예전에 비하면 우리나라 근로시간은 많이 줄어든 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OECD 평균인 1,648 시간보다 월등하게 많다. 그 차이를 하루 8시간 근무로 환산해 봤을 때 다른 나라들보다 대략 22일 정도 더 근무하는 것이다! OECD 기준이 아니라 초과근무 같이 실제 근무 시간에 포함되는 시간들을 포함하면 우리나라 직장인들은 주당 평균 48.3시간, 그러니까 하루에 9시간 넘게 일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수도권 평균 출퇴근 시간이 84분이니, 하루 노동에 소요되는 시간은 10시간 이상이라고 볼 수 있겠다.             


대한민국 근로시간과 출퇴근 소요 시간 (연합뉴스, 2023. 12. 19. / 조선일보, 2019. 01. 24. / 잡코리아, 2022)


    이렇게 긴 근로시간 때문일까?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보면 대체로 피곤에 찌들어 있다. 출근 시간에 "아이 신나!"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일은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상이지만, 우리에게 스트레스이다. 피곤하고 힘들면 쉬면 되지 왜 출근을 할까? 당연히 일하고 돈을 벌어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슬프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우리가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은 우리 몸뚱이에서 나오는 노동력뿐이다. 그건 의사건 변호사건 일용직 노동자이건 마찬가지이다. 당장 하와이로 가서 해변을 즐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먹고살려면 하루하루 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을 포기하면서 직장에 몸을 맡기고 움직여 일해야만 하는 것이다. 도대체 자본주의가 뭐길래 원치 않는 노동을 개미처럼 매일매일 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제 오늘의 사회학자를 만나보자.




 2. 마르크스의 소외론


    오늘 렌즈를 빌려올 사회학자는 문과계의 끝판왕 마르크스(K. Marx)이다. 마르크스에 대해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던 나쁜 인식을 가지고 있던 어쨌든간 마르크스만큼 유명하고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친 학자는 없다. 사회학에서는 뒤르켐, 베버와 함께 3대장으로 여겨지는데, 마르크스 경제학, 마르크스 지리학, 마르크스 정치학, 마르크스 철학, 마르크스 역사학, 마르크스 미학 등등 다른 인문사회과학계에서도 아예 본인의 이름을 딴 ‘마르크스주의(Marxism)’라는 브랜드가 있을 정도로 GOAT 중의 GOAT이다. 마르크스는 산업혁명이 온 유럽을 휩쓸던 시기, 유럽 자본주의의 발전과 노동 착취 현장을 직접 목격하였고, 사회구조적인 모순과 갈등에 관심을 가지며 노동자 혁명에 적극적으로 몸 담기도 하였다. 마르크스는 경제적 문제와 사회구조의 관련성에 초점을 맞춘 수많은 저작들을 남겼는데 공산당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자본론(The Capital) 등이 유명하다. 이 두 저서는 무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마르크스와 누구나 다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자본론'


    자본주의 사회는 아주 간결하게 표현하자면 생산물, 즉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판매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것에 기초한다. 마르크스는 사회 변동의 주요 원천이 관념이나 가치가 아니라 경제, 즉 먹고사는 문제를 둘러싼 계급 간의 갈등이라고 보았다. 법, 제도, 문화, 종교 등의 관념은 그저 지배 계급의 사상일 뿐이지, 진짜 중요한 것은 지배를 가능케 하는 경제체제인 것이다. 마르크스는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보았는데, 계급투쟁의 결과로 경제체제가 변화되고 새로운 질서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도 고대의 귀족-노예 관계, 중세의 지주-농노 관계를 거쳐 이행된 새로운 경제적 질서인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은 생산수단(means of production)의 소유 여부에 따라 나누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은 말 그대로 생산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투입되는 기계, 도구, 공장, 인프라, 건물, 땅, 자원 같은 것들을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을 소유한 쪽은 부르주아(bourgeoisie)라고 불리는 자본가 계급(capitalist class)이다. 반면,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쪽은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라고 불리는 노동자 계급(working class)이다. 

    노동자는 생산수단이 없기 때문에 생산물을 만들어 팔아 자본을 축적할 수 없다. 그렇기에 노동자는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는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팔고, 일을 한 대가로 임금을 받아 생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운명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을 갖춘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대다수는 임금을 받는 노동자 계급에 속한다. 아무리 명망 있는 교수님이라도 공공기관 계약직인 김 씨와 마찬가지로 임금 노동자일 뿐이다. 교수님이 일하는 데 필요한 캠퍼스 건물과 강의실, 각종 시설과 사소한 집기들, 그리고 대학원생(?)도 교수님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생산수단이 없으면 연구와 강의 능력이 출중한들 교수님은 돈을 벌 수 없다. 결국 마르스의 구분에 따르면 수백억을 관리하는 금융맨도, 뛰어난 의사도, 축구선수도, 연예인도 모두 노동자일 뿐인 것이다.  


대표적인 생산수단인 공장을 소유한 자본가와 고용된 노동자들


    여기서 문제는 다수의 자본가 계급이 소수의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면서 자본을 축적한다는 점이다. 생산 과정에서 상품에 가치를 직접 부여하는 것은 노동자이다. 물론 생산수단의 감가상각 등 더 복잡한 과정과 변수가 있겠지만 아주 간결하게 예를 들어 보자. 오븐, 반죽기계, 베이킹 도구를 가지고 있는 자본가가 원료인 밀가루 1,000원어치를 사 왔다. 이렇게 밀가루를 사 와도 가만히 놔두면 그냥 1,000원어치 밀가루일 뿐이다. 노동자가 밀가루를 '뚝딱!' 하여 빵이라는 '상품'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 있어야 이를 시장에서 1,500원에 판매하고 500원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500원의 이익은 순전히 노동자가 만들어낸 추가적인 가치이다. 마르크스는 '뚝딱!' 하는 노동에서 추가적인 가치가 발생한다는 노동가치론(labor value theory)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노동으로 창출한 500원은 온전히 노동자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임금으로 200원만 주고 300원을 가져간다. 이 300원은 뭘까? 상품으로 생산된 가치(500원)와 임금(200원)의 차이(300원)를 잉여가치(surplus value)라고 한다. 상품의 가치를 창출한 것은 노동자이지만, 모순적이게도 자본가들은 노동의 강도를 높이거나 임금을 줄여서 잉여가치를 늘리는 방식으로 자본을 축적한다. 고소득 직장인은 그만큼 긴 근무시간과 강도 높은 노동으로 갈리기 마련이다. 즉, 자본주의 사회구조는 지배계급인 자본가가 피지배 계급인 노동자를 착취하는 계급관계로 형성된다.      


노동으로 창출한 가치에 비해 적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


    이러한 모순적인 자본주의는 노동자 계급의 '소외(alienation)'에 바탕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소외를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기인한 인간본질의 왜곡이라고 정의하였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의식적이고 주체적으로 세계를 창조해 나가는 인간의 노동이 인간의 본질이다. 본능적으로 집을 짓는 거미와 달리 인간은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노동으로 창조성을 발휘해 집을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관계로 인해 이러한 인간본질이 왜곡되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총 네 번이나 소외를 경험한다.

    먼저 노동자는 자신이 만들어낸 생산물로부터 소외된다. 상품을 만드는 것은 노동자 자신이지만 자기가 생산한 상품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는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에게 있다. 노동자가 강철을 만들어내었을 때 그 강철이 건물을 지을 때 쓰일지, 탱크를 만들 때 쓰일지, 선박을 만들 때 쓰일지는 노동자의 권한 밖에 있다. 모든 생산물의 소유권은 생산수단을 제공한 자본가에게 속해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노동자는 노동, 즉 생산활동 그 자체로부터 소외된다. 노동자에게 부여된 노동은 본인이 원하고 만족감을 주는 자율적인 노동이 아니다. 자본가와의 게약 조건에 종속되어 컨베이어 벨트 혹은 사무실의 좁은 책상에서 임금이라는 외적인 힘에 의해 강요되는 노동이다. 노동자들이 어떻게 일을 할 것인지는 자본가가 통제한다. 잘리기 싫으면 노동자는 자본가의 통제에 맞춰 일할 수밖에 없다. 

    셋째로 노동자는 인간관계로부터 소외된다. 과거에는 인간이 협동하여 자연환경에 함께 대응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낯선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경쟁하고 갈등을 빚는다. 직장 동료들은 같은 노동자 계급에 속해 있지만 성과와 승진을 위해 협력하기보다는 경쟁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정말 친밀한 인간관계가 발전되기 어렵다.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자들 간의 사회적 고립과 알게 모르게 형성되는 적대감으로 노동자들을 서로 소외시킨다. 

    마지막으로 노동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기본적으로 사회과학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하지만 생산과정에서 인간은 짐 나르는 짐승이나 기계처럼 전락하여 인간다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없다. 일터에서 노동자가 하는 모든 일은 단순히 생계유지를 위한 수단일 뿐이지 자아실현의 수단이 아니다. 무역회사 직원이 매일매일 인도네시아의 석탄 자원 현황을 파악하고 보고서를 쓰는 게 정말 그의 삶의 가치를 높이는 일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의식이 마비되고 결국 인간의 잠재력을 성취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존재로 전락한다.   


노동자가 경험하는 네 가지 소외


    자본가 계급은 스스로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노동자들의 노동에 의존하여 자본을 축적하고 사회를 지배하는 힘을 갖게 된다. 한편, 노동자 계급은 생산의 진정한 주체이지만 생산활동과 생산활동의 열매, 동료,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까지 소외된다. 마르크스는 이 기가 막히고 아이러니한 자본주의 사회를 꿰뚫어 본 것이다.      




 3. 도시로부터의 소외


    도시는 노동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노동자들은 일거리가 많은 도시로 몰려든다. 과거 우리나라도 1960년대부터 산업화와 함께 도시화가 시작되었고, 이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얻기 위해 농촌을 떠나 도시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현상과 맞물려 급격히 팽창한 우리나라 수도 서울 역시 명실상부 노동자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서울은 근로 중인 종사자와 이들을 고용한 사업체가 가장 밀집한 도시이다. 쉽게 말하면 직장과 직장인이 가장 많다고 할 수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서울의 사업체수는 442,207개로 전국의 21%, 종사자수는 4,668,912명으로 전국의 2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서울 내에서도 직장과 직장인이 가장 많이 밀집한 곳을 업무지구(business district)라고 하는데, 대표적으로 광화문과 중구 일대 도심의 중심업무지구(Central Business District, CBD), 여의도업무지구(Yeouido Business District, YBD), 강남(Gangnam Business District, GBD)이 있다. 각각의 지역마다 특화된 직종이 조금 다른데, CBD는 대기업 본사, 은행, 언론사가 많고, YBD는 금융회사가 많으며, GBD는 법률, IT/벤처, 뷰티/의료 산업이 발달해 있다. 출퇴근으로 사람이 많이 오가기 때문에 이러한 업무지구에는 음식점, 카페, 편의점, 상점 등 다양한 서비스업종도 함께 분포되어 있다. 도시에서는 대기업 직원, 은행원, 기자, 애널리스트, 변호사, 의사, 데이터 엔지니어, 식당 종업원,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스타벅스 직원 등 수많은 노동자들이 함께 살아간다. 분야마다 임금 수준과 업무 환경은 다를지라도 모두가 노동자라는 본질은 다르지 않다. 


광화문, 여의도, 강남

    

    이러한 노동자들의 도시에서 노동자는 또 한 번 소외되는데, 바로 도시공간으로부터 소외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누가 수도권 전역에 혈관처럼 뻗어 있는 철도를 깔고, 목동에 아파트를 건설하였으며, 잠실에 롯데타워와 백화점을 세웠을까? 철로를 연결하고, 높은 빌딩과 고급 아파트 단지를 지으며, 화려한 백화점을 입점시키는 등 도시를 만드는 데에도 ‘자본’이 필요하다. 그럼 그 자본은 어디서 온 것일까?

    공공을 위한 도시계획에 활용되는 자본은 우리가 노동력을 팔아 벌어서 낸 세금에 기반하고, 민간개발에 필요한 자금은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력으로부터 얻은 잉여가치에서 나온다. 즉, 도시계획/개발을 위한 자본의 출처는 모두 ‘노동’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직접 도시를 만드는 것은 도시의 노동자들이다. 더 나아가, 철로 위를 운행하는 지하철의 기관사, 빌딩과 아파트를 짓는데 필요한 공사 인력, 백화점의 직원들이 각자의 노동을 하지 않으면 도시는 완성되지 않는다. 이들의 노동으로 도시가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도시의 열매가 실제 도시를 만드는 노동자들에게 고루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시의 자본가들은 축적한 자본으로 부동산, 임대사업, 투자를 통해 도시의 열매를 따먹고, 얻은 이윤을 다시 도시공간에 재투자하는 방식으로 자본을 순환하며 키워간다. 그러나 임금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노동자는 도시공간으로부터의 소외를 경험한다. 자본가들이 그들만의 폐쇄된 고급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주거지역)에서 쾌적한 도시생활 환경을 즐길 때, 노동자들은 치솟는 집세를 감당하지 못해 도시 외곽으로 내몰리게 되고, 공원과 교육시설을 비롯한 생활 인프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한남더힐에 거주하는 자본가와 서울 외곽 빌라촌에 거주하며 출퇴근하는 노동자 중 누가 도시로부터 소외되고 있는지는 자명하다. 하루에도 4번씩 소외되고 있는 마당에 노동자들은 도시로부터 한번 더 소외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시는 계급에 따라 불평등한 소외의 공간이다. 


계급에 따라 상반된 주거환경




 4. 빛나는 도시의 피곤한 노동자들


    지금 이 순간에도 자본가는 조금이라도 더 노동자의 노동력을 최대한 뽑아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에 따라 노동자는 계속 착취되고 소외되고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이렇게 계속 운영되어 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시도 자본의 논리로 구성되고 있다. 자본가는 노동자들을 착취해 축적한 자본으로 도시를 그들에게 더 유리한 공간으로 만들어 낸다. 교통 인프라, 생활환경, 경관 등 도시공간은 가진 사람들을 위주로 구성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도시는 자본과 노동자들이 모여드는 자본주의의 중심지이면서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노동자 계급의 결집이 이루어지는 이중적인 공간이다. 자본가가 노동자의 임금을 최소화하고 착취하는 만큼, 빈곤해지는 노동자의 구매력이 감소한다. 직장에서야 노동자이지 직장 밖에서는 노동자도 상품을 구매하는 고객이다. 한편, 점점 발전하는 기술은 생산력을 폭발적으로 증대시킨다. 그 결과, 상품의 공급 대비 수요가 떨어지게 되고, 상품을 만들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경기 침체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 와중에 점점 더 빈곤해지는 노동자들은 그들이 일하는 도시에서 단결하여 자본주의에 저항한다. 마르크스는 소수의 자본가 계급과 다수의 노동자 계급 사이의 계급투쟁에서 끝내 노동자들이 승리할 것이라고 보며 자본주의 붕괴를 예언하였다. 이것이 경제 위기 때마다 마르크스가 심심치 않게 소환되는 이유이다. 


자본주의의 붕괴를 예언한 마르크스


    물론 마르크스의 예측과 달리 자본주의는 아직 살아남았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경고등이 늘 켜져 있다. 우리나라 도시개발사업 대부분은 미래의 사업성을 담보로 금융회사로부터 거액의 투자를 받는 프로젝트 파이낸싱(Project Financing)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렇지만 만약 주택을 짓는다 하더라도 점점 더 열악해져가는 노동조건으로 인해 임금을 모아 주택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사라진다면? 휘황찬란한 대규모 상업시설을 짓는다 하더라도 이를 이용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들이 줄어든다면? 도시개발사업은 실패하게 되고, 그 손해는 연쇄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에도 전가된다. 우리는 최근까지도 태영건설을 비롯한 여러 기업들이 쏘아 올린 PF 위기로 인해 다발적인 부도 폭탄이 언제 터질지 몰라 조마조마했었다. 


PF 위기 (매일경제, 2023. 12. 27.)


    지금까지는 위태위태하게 온갖 위기에도 살아남은 자본주의이지만 자본주의는 무적이 아니다. 이렇게 불안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은 오늘도 어제처럼 빛나는 도시를 향해 지친 몸을 이끌고 출근한다. 오늘도 소외받을 당신의 삶에 같은 노동자로서 미리 위로를 보낸다. 언젠가 당신이 한 노동의 가치가 온전히 인정받을 날이 오길 기대하며, 오늘도 우리 인생 파이팅! 





칼 마르크스 (1818 - 1883)

    마르크스는 1818년 독일과 프랑스 접경지대인 트리어(Trier)의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마르크스는 베를린대학(humboldt university of berlin)에서 법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1841년에 예나대학(Friedrich Schiller University Jena)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졸업 후 급진노선 신문사의 편집장이 된 마르크스는 정치적 문제로 신문사가 폐간되자 파리로 가서 프랑스의 사회주의와 영국의 정치경제학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일생의 동반자이자 물주(?)인 엥겔스를 만났다. 이후 마르크스는 노동자 혁명을 주도하며 1848년 공산당선언을 발표하였다. 

    1849년 런던으로 옮겨간 마르크스는 대영박물관에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시작하였는데, 그 결과가 바로 자본론이다. 학자로서도 뛰어난 성과를 남겼지만, 마르크스는 1883년에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노동자 혁명에 몸 담은 혁명가이기도 했다. 

    한때 세계의 절반이 그를 추종하는 공산주의 국가였다는 사실만 봐도 마르크스의 영향력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의 변증법적 유물론, 계급론, 이데올로기론 등은 문과 계통에 전방위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이 연재글에서도 다루는 베버, 부르디외, 카스텔, 르페브르, 하버마스 등 수많은 사회학자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다.

    마르크스는 한창 자본가가 이윤추구를 위해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던 자본주의 태동기에 활동하였다. 이러한 현실을 직접 목도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구조의 모순과 갈등을 연구하며 자본주의의 신랄한 비판자이자 노동자 계급의 대변자가 되었다. 비록 마르크스는 그의 이론에 대한 오해와 편견으로 누군가에겐 그저 ‘원조 빨갱이 털보’로 인식될지 몰라도, 당대의 비참한 노동자의 삶에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인 휴머니스트가 아니었을까? 마르크스는 불합리한 자본주의 사회를 앞장서서 변화시키고자 했던 실천적 사회학자로 길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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