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지배’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지배란 ‘어떤 사람이나 집단, 조직, 사물 등을 자기 의사대로 복종하게 하여 다스림’을 뜻한다. 그러나 좋든 싫든, 안타깝게도 우리는 모두 지배당하고 있다. 지배라는 것이 사회 질서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국가는 우리에게 특정한 행동을 강제할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세상에 세금 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지만 우리는 세금을 낸다. 법은 우리가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지배 관계 속에 있다. 올빼미형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김 씨는 아침 일찍 일어나 회사에 나간다. 회사에는 말단인 김 씨 위로 여러 직급들이 존재하고, 그들의 계획과 결정에 따라 김 씨의 업무가 결정된다. 하기 싫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벌어먹고살려면 해야만 하는 일이다.
과거나 현대나 지배는 존재한다 (무한도전 中)
이렇듯 사회 질서가 생겨난 이후부터 지배는 인류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그런데 지배관계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불평등함 때문에 역사적으로 지배받는 집단이 지배하는 집단에 저항하고, 이들을 몰아내는 혁명들이 수없이 많이 발발하였다. 1789년에는 프랑스의 구체제와 계급체제에 저항하는 시민들에 의해 발발한 프랑스혁명은 민주주의의 씨앗이 되었고, 1917년에는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러시아 혁명이 이루어져 전 세계에 공산화 바람이 불기도 했다. 우리나라로 가보면, 1919년 남녀노소 한인들이 일본 제국의 무단 통치에 저항권을 행사한 3.1 운동이 있고, 독재에 항거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4.19 혁명, 그리고 군부 정권에 맞서 대통령 직선제를 이룩한 1987년 6월 항쟁도 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 1830)
그런데 과거에 비해 현대사회에서는 혁명이 흔치 않다. 그 이유는 바로 현대의 진보된 통치술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지배는 강제적이고 억압적인 힘뿐만 아니라, 예술, 스포츠, 미디어와 같은 문화적 측면에서도 이루어진다. 예술과 스포츠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지배계층의 이데올로기(이념)에 스며들며 지배체제를 전복시킬 동력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기록으로 증명된 바가 없어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전두환 정권의 ‘3S(Screen, Sports, Sex)’정책을 예로 들 수 있다. 전두환 정권은 영화 산업, 스포츠 산업, 성 산업을 육성하여 군사 독재에 대한 반발을 억제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활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문화적 통치는 도시 곳곳에 경기장, 콘서트홀, 영화관 등이 생기는 등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에도 반영되었다.
올림픽 개최도 문화적 지배가 도시에 투영되는 대표적인 예시라고 볼 수 있다. 못 살고 가난하던 우리나라에서 전 세계적인 스포츠 메가이벤트인 올림픽이 열린다는데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있을까? 올림픽 개최로 국민들은 소속감과 자부심을 느끼게 되고, 어느새 가지고 있던 정권에 대한 불만은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에 대한 염원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서는 경기장과 도시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져 있어야만 한다. 올림픽을 기대하는 여론과 호의적인 언론 덕분에 정부는 빠르고 강력한 추진력으로 도시의 경관을 변화시켰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이렇게 스포츠를 통한 국가의 문화적 지배를 공고히 하는 동시에 올림픽이 개최되는 수도 서울의 경관을 개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서울의 도시개발은 지배의 그림자와 같았다고 볼 수 있다.
잠실 서울올림픽주경기장
오늘 연재글에서는 지배계층이 총칼이 아닌 문화로 지배를 유지하는 전략과 그 결과로서 도시개발을 조명하고자 한다. 그전에 어느 한 이탈리아 사상가를 만나보고, 사회와 도시를 바라보는 렌즈를 빌려보도록 하자.
2. 그람시의 헤게모니
오늘의 사회학자 안토니오 그람시(A. Gramsci)는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이자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하여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에 맞선 혁명가이다. 그람시는 무솔리니 정부에 의해 11년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감옥에서 쓴 그의 옥중수고(Prison Notebooks)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틀을 구성한 그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옥중수고에서 그람시는 헤게모니(hegemony)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제시한다.
안토니오 그람시와 그가 감옥에서 쓴 옥중수고
그람시의 헤게모니를 이해하려면 먼저 마르크스를 다시 살펴봐야 한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구조가 토대(base)와 상부구조(superstructure)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토대는 생산과 관련된 경제적 기반이고, 상부구조는 생산과는 직접적으로는 관련되지 않은 예술, 문화, 종교, 철학, 교육, 법 등의 이념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진짜 중요한 건 바로 경제적 토대라고 보았다. 물질생활에 따라 이념적인 상부구조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마치 김 씨가 점심 메뉴를 결정하는 기준이 김 씨의 미식 수준이 아니라 지갑 사정인 것처럼... 이러한 마르크스 사상에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경제에 의해 사회가 결정된다는 ‘경제결정론(economic determination)’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산을 둘러싼 계급 간의 갈등이 심화될수록 상부구조가 흔들려 노동자들의 단결과 혁명을 유발하고, 마침내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자본주의는 아직까지도 건재하다. 마르크스를 추종하여 자본주의가 반드시 붕괴할 것이라 생각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제 ‘왜 자본주의가 안 망했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람시는 경제적 토대가 아닌 지배를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상부구조로 눈을 돌렸다.
이념적 상부구조와 경제적 토대
그람시는 자본주의가 건재한 이유에 대해 헤게모니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헤게모니는 '지배계급에 의해 행사되는 문화적 지도력'으로서 상부구조에 속하는 개념이다. 이는 사법적이고 행정적인 권력이나 국가의 경찰력 등을 포괄하는 '강제성'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시민들의 자발적인 동의에 기반한다. 여기에는 지배계층의 이념을 반영하는 교육, 언론, 문화 등이 큰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는 자유시장경제의 효율성을 강조하며 학생들을 교육하고, 언론에서는 대기업에 대한 제재가 국가적 위기로 이어질 것이라 겁을 준다. 이로 인해 시민들은 지배계층의 물리적인 협박 없이도 알아서 자본주의 체제를 지지하고 지금의 지배관계에 동의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시민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어느새 지배계층의 관점과 같아진다. 이렇듯 헤게모니를 전략적으로 사용하여 지배계층은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이제 총칼로 지배하는 사회를 넘어 펜으로 지배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문화적 헤게모니
그래서 그람시는 사회의 변혁과 혁명을 위해서 이러한 지배계층의 전략을 간파하고, 자본가와 권력가와 같은 지배계층과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먼저 승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람시를 이를 기동전(war of maneuver)과 진지전(war of position)으로 표현하였다. 기동전은 말 그대로 직접적으로 전면에 나서는 혁명, 즉 물리적 충돌과 실천을 뜻한다. 한편, 진지전은 피지배계층이 지배계층의 헤게모니에 도전하고 대안적인 사상을 제시하여 교육, 미디어, 시민단체의 동의를 얻어내기 위한 문화적인 과정이다. 그람시는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기동전보다 진지전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지배계층이 그러는 것처럼 총칼보다 펜으로 먼저 헤게모니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람시의 시각에서 보면, 우리나라에서 계속되는 역사교과서 논쟁도 역사를 둘러싼 세력 간 진지전의 한 유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민사회를 지배하는 지배계층의 헤게모니를 깨고, 시민들이 사회의 모순을 깨달을 수 있도록 문화적인 주도권을 잡은 뒤에야 비로소 실천을 통한 새로운 질서로의 전환이 가능하다. 따라서 그람시는 파시즘(극단적 민족주의에 기반한 전체주의적 사상) 및 자본주의 헤게모니와의 싸움에서 좌파 지식인과 공산당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2004년부터 시작된 역사교과서 진지전 (경향신문, 2020. 09. 09.)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은 세계화 시대에서 미국과 중국 같은 강대국들의 패권 다툼으로도 확장되는 등 오늘날 사회과학 전반에서 지배와 권력을 해석하는 데 널리 활용되고 있다. 이제 그람시의 헤게모니 렌즈를 통해 올림픽이라는 최대의 이벤트와 도시개발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3. 88올림픽과 서울의 도시개발
1988년, 식민지배와 분단의 아픔을 딛고 한강의 기적을 일군 대한민국에서 드디어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서울에 올림픽을 유치하고자 한 의지는 1979년부터였다. 당시 유신체제를 유지하던 박정희 정권은 그해 10월 8일 기자회견을 통해 1988년 올림픽의 서울 유치 계획을 공표하였다. 그러나 불과 며칠 뒤인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올림픽 유치 계획이 백지화되었다. 이러한 혼란 가운데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대통령은 “장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사회 분위기를 일신하고 국민의 힘을 한데 모으려면 올림픽을 유치하는 게 좋을 것이다”라는 일본 우익인사 세지마 류조의 조언을 들었고, 군사반란으로 민주적 근본 없이 시작한 전두환 정권을 이를 받아들여 올림픽 유치에 사활을 걸었다.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당시 국내 최고 기업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적극적인 유치전 덕분에 결국 서울의 올림픽 개최가 확정되었다. 덕분에 군사정권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던 국민들의 눈을 올림픽으로 돌리는 데는 성공하였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그 올림픽을 아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문화적인 지배력, 즉 헤게모니를 통해 군사반란으로 시작된 정권의 정당성과 위대함을 국민들에게 새겨주는 것이다.
1981년, 제24회 하계 올림픽 서울 유치 확정(박영수 서울시장과 정주영 회장이 보인다.) / 88 서울올림픽 결정 축하 플래카드
세계가 바라보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성공을 위해 정부는 대대적인 서울의인프라 구축과 도시개발에 착수하였다. 서울 올림픽의 주 무대가 될 잠실지역이 정비되었고, 한강종합개발이 추진되었으며, 저수로 정비, 시민공원 조성, 올림픽대로 정비가 급하게 이루어졌다. 올림픽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1987년까지 공사가 계속되었을 정도이다.
잠실 서울올림픽주경기장, 올림픽 공원, 한강종합개발사업 공사 현장
이렇게 서울이 세계가 보기에 남부끄럽지 않을 만큼 개발되고 있을 때, 정부의 눈에 걸리적거리던 게 하나 있었다. 바로 불량주거지로 불리는 판자촌과 달동네였다. 세계인들에게 대한민국을 제대로 각인시켜 국민들로 하여금 자부심을 얻도록 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부는 서울의 도시 미관을 해치는 판자촌을 제거해야만 했다. 이때 서울 내의 판자촌과 달동네 200여 곳이 강제로 철거되었다.
강제 철거에 저항하는 불량주거지 주민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대표적인 곳이 바로 지금의 노원구 상계동이다. 1980년대 상계동 일대는 서울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집값이 쌌기 때문이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었다. 주민들은 가난했지만, 그래도 이웃 간의 정이 있던 동네였다. 하지만 88서울 올림픽 개최 계획과 함께상계동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상계동 일대가 올림픽 성화가 지나가는 루트로 선정되고, 1985년 지하철 4호선이 들어서면서 재개발이 추진되었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게 생긴 상계동 주민들은 강제 철거를 결사 반대하며 농성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국제적 메가 이벤트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가 국익을 위한다는 언론보도와 올림픽을 염원하는 여론에 힘입어 상계동의 철거는 더욱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그리고 전 국민이 역사적인 올림픽 개최로 한창 들떠 있던 1987년, 서울시의 행정대집행으로 용역 1,000여 명, 구청직원들, 전경들이 동원되어 주민들은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고, 상계동 판잣촌은 서울에서 완전히 제거되었다. 그들이 사라진 판자촌은 곧 건설자본에 의해 아파트촌으로 바뀌게 된다. 이 과정은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에 잘 기록되어 있다.
상계동 판자촌 철거의 기록
1987년 상계동 신시가지 아파트 건설 현장과 현재 모습
올림픽이라는 국제 행사와 대의를 위한 정부의 도시개발은 서울에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웠을까?
잠실 서울올림픽주경기장, 올림픽공원, 서울의 지하철 확장, 한강변의 공원화, 강남의 발전 등, 서울의 현대적인 도시경관을 남겼다. 반면, 올림픽을 위한 도시개발은 서울의 약자들, 가난한 사람들, 정든 삶의 공간은 지워버렸다.
올림픽이 남긴 서울의 경관과 올림픽이 지운 서울의 약자들(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 中)
이러한 대조적인 상황 속에서 88년 서울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올림픽을 위한 도시개발로 세계도시가 된 서울의 경관을 바라보며 시민들은 세계 속의 당당한 국제시민이 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시민들이 올림픽과 올림픽이 남긴 결실에 열광하는 사이, 상계동을 비롯한 강제 철거된 불량주거지 주민들의 슬픔은 잊혀만 갔다.
88 서울올림픽과 전두환 대통령
4. 누구를 위한 도시개발인가
도시계획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아마 개발과 포용 사이에 많은 딜레마에 빠질 것이다. 도시에는 본질적으로 개발이 필요하다. 높은 인구밀도로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인프라가 필요하고, 주택이 필요하며, 시민들을 위한 공공공간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발을 하려고 하다 보면, 누군가는 그 개발의 열매에서 배제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도시계획을 둘러싼 우리나라의 헤게모니 진지전에서는 늘 개발이 포용을 이겨왔다.이러한 맥락에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경관은 결국 누군가의 눈물로 만든 것이라 봐도 무방하겠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1988년 서울올림픽과 서울의 도시개발이 시사하는 바로 그렇다. 올림픽이라는 것이 대한민국에 많은 이윤을 창출하고, 세계 속에 대한민국의 위상을 세웠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 올림픽을 민주적 근본 없는 정권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헤게모니로 이용하였고, 그 도구로 도시개발이 쓰였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특히나 이러한 국제 행사와 도시개발을 늘 엮여서 추진한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준비 당시에도 스키장을 개발하기 위해 산림유전자보호구역이었던 가리왕산을 훼손하여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얼마 전에 무산된 부산 엑스포 유치에도 부산 북항개발, 신공항 건설, 부산형 급행철도 등 많은 도시 및 인프라 개발이 연계되어 있었다. 이는 개발도상국 시절을 거치며, 세계인들에게 발전되고 좋은 면만 보여주면서 자부심을 느끼는 우리나라 특유의 성향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이후 철거된 올림픽 스타디움 주변 (경향신문, 2019. 02. 07.)
2022년부터 서울 오세훈 시장은 2036 서울 올림픽 유치에 최선을 다하며 흑자 올림픽을 개최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서울의 경우, 이미 올림픽 개최 경험이 있고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일부 도시정비만 하면 어렵지 않게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과연 그 설명처럼 2036 서울올림픽 유치는 약자를 배제하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 이제 진지전을 시작할 때이다. 국제 행사가 반드시 국익과 시민을 위해 유치되어야만 하고, 이를 위한 도시개발이 필수적이라는 헤게모니에서 벗어나, 누구를 위한 국제 행사이고, 또 누구를 위한 도시개발인가를 먼저 논의해야 한다. 서울의 어두운 측면을 가린 올림픽의 흑역사는 한 번만으로 족하기에.
2036년 서울 올림픽 유치 추진 (SBS, 2022. 10. 19.)
안토니오 그람시 (1891 - 1937)
안토니오 그람시는 1891년 이탈리아 남부 사르데냐 알레스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안타깝게 4살 때 척추를 다쳐 장애인이 되었고, 그의 성장은 150cm에서 멈추었다.
몸이 병약하고 외모가 뛰어난 것도 아니라서 자격지심에 집에 숨어서 살 법도 한데, 그람시의 집안이 넉넉한 것이 아니라 일을 안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토리노 대학에 장학금을 받아 입학하였지만, 안타깝게 건강 때문에 결국 중퇴하게 되었다.
이후 1913년 이탈리아 사회당에 입당한 그람시는 토리노 지역 노동자들을 결집해 좌파 세력의 중심이 되었고, 1921년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하여 반파시스트 운동에 투신한다. 이 와중에 키 큰 미녀 바이올린리스트와 결혼한 인생의 승리자(?)이기도 했다.
당시 파시스트의 우두머리는 그 유명한 무솔리니였다. 무솔리니는 공산당 리더인 그람시를 감옥에 투옥시켰는데, 이때 그람시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위험한 두뇌", "이 자가 20년 동안 두뇌를 쓰지 못하게 해야 한다"라는 판사의 평을 듣기도 하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감옥에서 오히려 두뇌가 더 잘 돌아간 것일까. 그람시는 2,848 페이지의 옥중수고를 저술하였고, 헤게모니 이론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한 단계 더 진화시켰다. 경제적 토대에 매몰되었던 기존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달리 눈을 들어 세상을 지배하는 문화를 본 것이다. 한 평 감옥에서도 옥중수고로 혁명을 이어나갔던 혁명가는 투옥 11년째인 1937년, 46세의 나이로 결국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돈이 많아 책 읽을 시간이 많았던 당대 지식인들과 달리, 그람시는 진짜 흑수저 프롤레타리아 출신 지식인이었고, 키는 작았지만 당대 이탈리아에서 정치적, 사상적으로는 누구보다 큰 거인이었다. 그의 헤게모니 이론은 현재까지 사회학, 정치학 등 사회과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으며, 활발히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