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진 행진 행진 하는거야 - 코저의 갈등기능주의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 어렸을 적부터 어른들에게 수도 없이 들었던 단골 멘트였다. 어른들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가! 마음에 안 들어도 인내하고, 미워도 떡 하나 더 주려고 했으며, 참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살아왔다. 우리의 이러한 노력들이 모여 그나마 ‘사회’라는 것이 유지되고, 어떠한 사안에 대해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합’이 가능한 게 아닐까?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뻔하고도 감미로운 공간은 아니었다. 최대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려는 우리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세상은 갈등 투성이인 것 같다. 집 안에서는 고부갈등, 회사에서는 노사갈등, 한반도를 둘러싼 남북갈등 등 사회 곳곳에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갈등 상황에 놓여 있다,
2023년에 진행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9명 정도는 우리 사회의 갈등 정도가 심각하다고 느끼고 있다. 세부적으로 보면 지역갈등이 가장 심각하다고 조사되었고, 빈부갈등, 정치갈등, 남녀갈등, 세대갈등, 노사갈등, 종교갈등이 그 뒤를 따랐다. 좀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우리는 늘 무언가와 싸우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분명히 갈등은 나쁜 것이고, 당연히 갈등 없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믿으며 자라왔는데... 그럼 우리는 나쁜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인간이 갈등을 빚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우리는 지나치게 갈등을 경계하도록 우리 사회에게 가스라이팅(?) 당해왔던 것이 아닐까?
이러한 사회적 갈등이 외부적으로 표출되는 것이 바로 집회이다. 우리나라는 헌법 제21조 1항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를 통해 집회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이 집회란 것은 다수가 공통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정한 장소에 일시적으로 모이는 것이다. 그 공통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갈등이 필연적이다. 결국 집회를 통해 한 집단의 특정한 의견, 신념, 목표를 관철시키려면 우리 사회에서 유지되어 온 통합을 깨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특정 장소에 모여야 집회가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갈등은 도시 공간으로 전개된다. 도심 속 촛불집회, 태극기 집회, 퀴어퍼레이드, 기독교 집회, 노동단체 집회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집회와 집회로 표출되는 갈등은 우리 사회와 도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더 나아가 우리 사회와 도시에서 통합과 갈등은 공존할 수 있을까? 오늘의 사회학자를 만나 통합과 갈등으로 도시를 관찰해보자.
오늘의 사회학자는 루이스 코저(Lewis Coser)이다. 코저는 갈등을 일방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갈등의 긍정적인 기능에 초점을 맞췄던 사회학자이다. 1956년에 집필한 그의 저서 사회적 갈등의 기능(The Functions of Social Conflict)에 그의 갈등기능주의(Functionalist Conflict Theory)가 잘 나타나 있는데, 이 개념을 이해하려면 먼저 사회학의 주요 이론적 접근틀인 기능론(funcrtionalism)과 갈등론(conflict theory)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기능론은 사회를 경제, 정치, 문화, 교육, 제도 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요소들이 함께 유기적으로 작동해 사회 전체의 안정과 결속이 유지하는 복잡한 시스템이라 간주한다. 기능론적 관점에 따르면 사회학은 이러한 사회 각각의 요소들과 사회 전체의 관계를 연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교육은 정치, 경제, 문화와 같은 사회의 다른 요소들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교육을 연구할 때는 사회 내에서 교육이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른 사회 요소들과 어떠한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기능론은 이를 더 잘 설명하기 위해 사회를 살아있는 유기체에 비유해왔다. 우리 몸을 생각해보자. 팔, 다리, 몸통, 머리를 비롯한 인체의 다양한 부분들은 우리 몸 전체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상호적인 관계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사회의 각 요소들도 사회 전체가 원활하게 작동하고 균형을 유지 할 수 있도록 상호적인 관계 속에서 역할에 맞게 기능한다. 기능론적 관점에서 사회문제라는 것은 결국, 특정한 사회 요소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사회문제는 그 사회 요소의 기능을 회복하거나 보완하여 해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 범죄가 들끓는다는 것은 결국, 범죄를 통제하는 법 제도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아서라고도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형량을 높이거나 단속을 강화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사회문제에 대한 기능론적 접근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사회 요소가 각 역할을 위해 충실히 기능하여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유지시킬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사회적 합의’ 덕분이다. 합의는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동일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을 때 형성된다. 예를 들어, ‘예의범절’은 우리 나라 국민들이 따르는 핵심적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고, 이에 따라 모르는 사람들과 수없이 마주치는 우리 사회에서 질서가 유지될 수 있도록 기여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은 사회 규범과 통합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기능론의 토대를 세웠고, 미국 사회학자 탈콧 파슨스(Talcott Parsons)가 사회구조와 기능 간의 연관성을 더욱 정교화하여 1950년대 구조기능주의(structural functionalism) 패러다임으로 발전시켰다.
기능론적 관점은 세계대전 이후 전성기를 맞이했던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사회적 풍요와 정치적 합의가 오랜 기간 지속되는 상황과 맞물려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틀로서 타당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사회 갈등이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베트남 전쟁, 급진적 학생 운동이 미국과 유럽에 걸쳐 대두되면서 이러한 기능주의는 빛을 잃게 되었다. 이와 반대 급부로 이제 ‘갈등’이 주목 받기 시작하였다.
기능론은 우리 사회에서 빈번한 이해관계의 근본적인 충돌과 무질서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이를 비판하며 갈등이론이 대두하였다. 갈등이론은 사회 내의 분열, 권력을 위한 투쟁, 불평등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설명하고자 했다. 갈등이론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서로 다른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집단들이 모두 같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회에는 우월한 집단과 불리한 집단이 나뉘게 된다. 갈등 이론가들은 이 집단 간의 긴장을 연구해 어떻게 통제가 이루어지고 지속되는지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갈등이론은 기능론에서 주장하던 균형과 질서가 상위 집단에 의한 강요로 인한 것으로 보았다. 즉, 사회질서는 기능론자들이 주장하던 것처럼 사회적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강압적인 권력의 힘으로 인한 것이다.
계급 갈등을 강조했던 마르크스(Karl Marx)와 계층 간 갈등을 경제, 지위, 정치 영역으로 확장한 베버(Max Weber), 갈등이 우리 사회에 필연적이며 사회 결속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 짐멜(Georg Simmel) 등, 갈등론에서는 다양한 이론적 기원을 발견할 수 있다. 현대적 시점에서 갈등론을 발전시킨 대표적인 학자는 독일 출신의 다렌도르프(Ralf Dahrendorf)이다. 다렌도르프는 우리 사회에서 보여지는 합의의 근저에는 강제적 구속이 존재한다고 보았고, 이해관계 속에서 이에 반발하는 집단 간의 갈등으로 발생하는 사회구조적인 변화를 강조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론도 비판을 피해갈 수는 없었는데, 기능주의가 갈등과 그로 인한 변화를 무시하여 비판을 받은 것처럼 갈등론은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는 질서와 안정을 무시하여 비판을 받았다. 또한 질서와 균형을 강조하는 기능주의가 지나치게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라고 비판을 받은 것처럼, 변화와 분열에 초점을 맞춘 갈등이론 또한 지나치게 급진적인 이데올로기라고 비판을 받았다. 갈등론과 기능론에 대한 비판과 고유의 제한점으로 인해 이 두 이론을 조화시키거나 통합함으로써 문제에 대처하려는 많은 시도가 생겨났는데, 대표적인 학자가 바로 루이스 코저다. 코저는 갈등이 사회적 결속을 강화한다고 본 짐멜의 시각을 확장하여 기능론과 갈등론 사이에서 갈등을 기능적으로 재조명하였다.
코저에 따르면 갈등은 먼저 분열되고 있는 집단을 결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 다른 집단과의 갈등은 분열되어가는 사회가 통합적인 중심성을 회복하고, 사회를 결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집에서 동생과 피 터지게 싸우더라도, 동생이 밖에서 맞고 들어오면 갑자기 형제애가 폭발하여 똘똘 뭉치는 게 우리 아니겠는가.
두번째로 한 집단과의 갈등은 다른 집단들과의 동맹관계를 견고하게 만드는 기능이 있다. 요즘 시끄러운 중동의 상황을 보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이 이스라엘-미국의 동맹, 반대로는 아랍국가들의 동맹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있다.
세 번째로 한 사회 내에서의 갈등은 고립된 개인들에게 활동적인 역할을 맡게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그동안 정치에 큰 관심이 없던 젊은이들도 1960년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국 정부에 반대하는 반전운동을 통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갈등은 의사소통 기능을 담당한다. 갈등 이전에는 각 집단은 타 집단의 영향력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갈등 상황에서는 각 집단들의 영향력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이에 따라 갈등의 당사자들은 각자의 영향력을 인지하고, 친선 혹은 갈등상황에 대한 평화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가능성이 크다. 모순적이게도 갈등이 평화의 메세지를 전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코저는 이러한 갈등의 기능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인 갈등’은 경계하였다. 현실적인 갈등이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이용되는 갈등이다. 예를 들면 노조의 파업이 있다. 한편, 비현실적인 갈등은 상반되고 대립되는 목표 때문이 아니라, 일방적인 긴장해소를 위해 발생하는 갈등이다. 이러한 갈등에 활용되는 방식은 쟁점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예를 들어, 인종갈등은 사실상 인종과 관계가 없다. 그저 공격의 대상이 특정 인종이 되는 것이다. 그게 흑인이든, 동양인이든, 원주민이든 크게 중요하지 않다.
현실적인 갈등의 경우, 그 갈등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수월하게 해결된다. 노사 간 갈등은 노동에 대한 임금 인상이나 노동 환경 개선을 목표로 발생하는데, 파업, 단체교섭, 협상 등의 방법으로 갈등상황을 종결할 수 있다. 한편, 요즘 트럼프가 특정 인종을 공격함으로써 백인 사회의 결집을 도모하는 선거 전략을 실행하는 것처럼, 인종갈등과 같은 비현실적인 갈등상황은 특정 목표 달성보다 상대 집단에 대한 공격 그 자체가 중요하다. 인종갈등이 있다고 타 인종들을 미국 밖으로 추방할 수도 없지 않는가. 이러한 갈등상황은 혐오만 낳을 뿐, 실제 갈등 해결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한다.
우리사회에서는 여러 집단이 서로 충돌하며 다양한 갈등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갈등에서는 갈등기능주의를 통해 코저가 주장한 것처럼 일부 갈등의 기능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제 그 충돌이 표출되는 공간인 도시에서 코저의 렌즈를 빌려 갈등을 관찰해보도록 하자.
우리 사회에서 집단적인 갈등은 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온라인 상에서도 이루어지지만, 아직까지는 실제 공간을 점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갈등이 표출되는 집회만큼 큰 영향력을 보이지는 못하는 것 같다.
집회의 주요 공간이 되는 도시는 갈등을 가시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공간이다. 특히 정치, 행정, 경제의 중심인 서울은 1960년 4.19혁명, 1965년 한일협정 반대투쟁, 1987년 6월 항쟁 등 우리 사회에 굵직굵직한 갈등의 역사를 보여주는 집회의 주요 공간이었다.
서울의 집회 명소는 누가 뭐래도 광화문 일대인 것 같다. 요즘도 크고 작은 단체들에 의해 집회가 자주 있는 곳이다. 사담이지만, 광화문 일대에 집회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던 김 씨는 소개팅 장소로 광화문을 골라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광화문은 조선시대부터 유생들의 집단농성 장소이기도 했고, 세월호 시위, 민주노총 집회, 문재인 정부 규탄 집회, 태극기 집회 등등 보수/진보 따지지 않고 다양한 목소리가 충돌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광화문 일대에는 늘상 경찰기동대가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광화문을 거쳐간 수많은 갈등과 집회 중에서 근래에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박근혜 대통령 퇴진 집회’를 코저의 갈등기능주의 렌즈로 살펴보도록 하자.
박근혜 대통령 퇴진 집회는 박근혜 대통령과 민간인인 최순실을 중심으로 발생한 국정농단(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분노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모여든 집회였다. 2016년 10월 29일부터 박근혜 태동령의 탄핵이 결정난 2017년 봄까지 매주 토요일 광화문에서 집회가 열리곤 했다. 주최 측보다 참가인원을 보수적으로 추산하는 경찰 추산으로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집회는 정부 수립 이래 사상 최대 규모라고 한다. 이 집회에서의 갈등 양상은 박근혜 정부, 친박계 인사, 보수단체들과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는 시민들 및 정치 세력 간의 충돌로 나타났다.
코저가 주장한 것과 같이, 이러한 집단과 집단 간의 갈등은 집단 내부의 결속을 더 강력하게 만들었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은 다양한 배경의 수많은 시민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이에 대응하여 박근혜 대통령 퇴진 집회는 또 다른 집단의 결속을 낳았는데, 바로 태극기 집회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강경 보수단체들이 역시 하나로 뭉쳐 또 다른 대규모 집회가 열린 것이다. 이 두 집회가 광화문 일대 서로 인접한 곳에서 동시해 발생해 긴장 속에서 두 집단의 대치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즉, 갈등의 상황은 각 세력의 결집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집단 내부뿐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 퇴진 집회는 타 집단과의 결속도 강화했는데, 바로 정치 세력들 간의 연합이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 주최한 단체는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이라는 단체이다. 이 단체는 4.19연대, 민주주의국민행동, 민중총궐기본부, 백남기투쟁본부,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를 포함한 2~300여개 진보 단체의 연합으로 구성되었다. 각 단체마다 서로 추구하는 목표와 이익이 다르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정부와의 갈등에서 한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정치권에서도 보기 드문 연합이 만들어졌는데, 제1야당이었던 민주당과 중간지대의 국민의당, 민주당보다 더 진보적인 정의당, 그리고 심지어 당시 새누리당의 비박계까지 광화문 광장에 함께 나왔다. 정부와의 갈등이 범야권의 통합을 이루어낸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 집회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활동도 이끌어냈다. 시위에 익숙한 586세대 정치권 인사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정치에 큰 관심이 없다고 여겨져 온 학생과 청년 세대들의 참여도 활발했다. 대학가에서는 학생들에 의해 연이어 시국선언이 빗발치기 시작했고, 광화문으로 나와 행진과 농성에 참여하였다. 평범한 시민들의 참여 열기도 대단했는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집회는 폭력 없는 촛불집회로서 성숙한 시위 문화를 보여주었다는 외신의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박근혜 대통령 퇴진 집회 당시의 갈등 양상은 우리 사회에 시민들의 결집과 그 영향력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2016년 올해의 사자성어는 군주민수(君舟民水)였는데, 이는 ‘백성은 물, 임금은 배이니, 강물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 집회는 결국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 내어 이를 바라던 시민들의 힘을 증명하였다. 정부에 대항한 시민들이 모인 집회로 한 나라의 대통령이 탄핵되었다는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정부와 정치권은 시민들을 의식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 집회로 인한 갈등이 민심의 중요성을 명료하게 드러낸 것이다.
물론 개인마다 느끼는 감정은 다를 수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2016년 가을부터 겨울을 지나 2017년 봄까지 서울 도심 광화문에서 표출된 갈등은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는 갈등의 긍정적인 기능을 보여주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코저가 경계하였듯이 비현실적인 갈등은 오히려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한다. 집회의 긍정적인 기능도 있지만, 집회의 부정적인 측면도 적지 않다. 바로 선동과 혐오 조장이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저항한다는 표면적인 목표 아래 집단의 이익이라는 실질적인 목적이 숨어 있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집단은 대규모의 시민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 동조시키기 위해 사실과 다른 정보로 시민들을 선동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참사를 이용한 정치 선동이 있다.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는 참사가 일어나면 이에 대한 추모 집회가 열리기도 하는데, 이때 참사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진정으로 추모하는 위로와 애도의 메세지보다 그들의 죽음을 이용해 정치적 이득을 얻고자 하는 집단도 존재한다. 또한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한 건실한 비판보다 그저 상대 진영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과 혐오로 얼룩진 집회도 많다. 극단적인 보수와 진보 세력 간의 갈등이 그 예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갈등 양상에서의 집회는 우리 사회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그저 도시 한 공간을 점유하여 시민들에게 불편함만 전가할 뿐이다.
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는 속담이 있듯, 갈등은 우리 사회가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는 이러한 사회 발전을 뒷받침하는 공간을 제공한다. 그 옛날부터 여러 갈등 상황을 헤치고 살아온 우리 시민들은 전 세계가 주목할 만큼의 높은 시민의식을 보여주며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왔다.
우리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갈등의 양상이 다양해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갈등의 도시는 앞으로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될 것인가, 아니면 선동과 혐오로 오염되어 오히려 뒷걸음치게 할 것인가. 그 답은 아마 우리들의 시민의식 수준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무언가를 변화시키기 위해 행진하는 우리 도시는 갈등 속에 있다.
루이스 코저는 1913년 베를린의 성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3년에 코저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이주해 소르본 대학교에서 비교문학과 사회학을 전공했다. 1941년에는 전쟁으로 얼룩진 파리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고,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머튼과 밀즈를 만나 지도를 받으며 갈등의 사회학적 연구를 주제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코저는 1951년부터 브랜다이스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로 활동하였고, 1968년에는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로 옮겨 계속 사회학을 가르쳤다. 1975년에는 미국 사회학회의 66대 회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코저는 핵심 사상은 이 글에서 소개한 갈등기능주의이다. 당대 기능론과 갈등론이 첨예하게 날을 세우던 때, 코저는 갈등이 반드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결속이라는 기능적 측면을 조명하면서 기능론과 갈등론의 한계를 넘고자 하였다.
그 외에도 루이스 코저는 사회학을 공부하는 사회학도들에게 아주 엄청난 선물을 해주기도 했는데, 바로 사회사상사(원제는 Masters of Sociological Thought로 한길사에서 번역하여 국내에 출간되었다)를 집필하였다. 코저의 사회사상사는 사회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15명의 사회학 거장들의 사상을 정리한 저서이다. 단지 그들의 이론만 나열한 것이 아니라, 사상가들의 개인적 배경과 사회적 배경을 함께 정리하여 이론이 탄생한 배경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조명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김 씨도 코저가 쓴 사회사상사의 도움을 받아 지금 이렇게 어설프게나마 사회학적인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