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순 없죠 - 기든스의 구조화 이론
어릴 적 봤던 만화영화에서는 초반에 세상의 벽에 가로막힌 주인공이 결국 그 벽을 뛰어넘고 꿈을 이룬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왔다. 주인공을 가로막는 벽은 여러 가지다. 가난하거나, 신체가 변변치 않거나, 출신이 고귀하지 않거나 등등. 그렇지만 주인공은 노력과 다른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그 한계를 극복하고 목표를 이루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우리에게 친숙한 ‘홍길동전’을 봐도 그렇다. 홍길동은 서자 출신이기 때문에 영특해도 과거를 볼 수 없고, 이미 결말이 정해진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세상에 나와 의적 활동을 하며 영향력을 키우며 결국 ‘율도국’이라는 곳의 왕이 된다.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도 우리를 제약하는 수많은 벽이 존재한다.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우리가 원하는 바와 상관없이 많은 것들이 결정된다. 인종, 성별, 부모님의 재력, 태어난 곳 등은 우리 사회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커다란 구조를 이룬다. 누군가는 강남에서 태어나 아무나 받지 못하는 사교육을 받고, 좋은 대학에 진학해 좋은 직업을 얻어 훌륭하게 우리 사회의 중상류층 가정을 이룰 것이다. 반면에 누군가는 지방의 어느 섬에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그 섬사람들이 살아가는 정해진 방식대로 어부가 되어 평생을 살아갈 수도 있다. 중상류층의 삶이 좋고, 어부의 삶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우리 삶에 사회의 구조가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개천에서 용 났다’는 케이스도 가끔 살펴볼 수 있다. ‘개천의 용’은 주어진 환경이 열악함에도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마치 메시처럼 뛰어난 선수 한 명이 견고한 상대팀 수비를 하나하나 뚫고 골을 넣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도 한다. 이렇게 주어진 사회적 구조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힘으로 사회적 성취를 이루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다.
그동안 사회과학에서는 구조가 더 중요하다는 쪽과 개인의 행위가 더 중요하다는 쪽이 각각 이론적 틀을 발전시켜 우리 사회를 해석해보고자 하였다. 그런데 구조와 개인의 행위 중 꼭 하나만 선택해야만 하는 것일까? 구조와 개인의 행위가 동등하게 중요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선택지는 없을까? 있다! 오늘 만날 사회학자는 구조와 개인의 행위를 선택해야만 하는 딜레마에서 벗어나 이 둘을 통합하고자 했다. 그 렌즈를 빌려서 사회의 구조와 개인의 행위를 어떻게 바라보고, 또 도시에서 정해져 온 질서가 개인의 행위와 맞물려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오늘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는 오늘날 사회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세계적 석학이다. 아마 사회학을 전공한다면 그가 쓴 사회학 교과서인 ‘현대사회학’이 책장에 꽂혀있을 가능성이 크다. 또 그가 주장한 중도주의 노선인 ‘제3의 길’ 역시 2000년대 정치 이념 지형을 변화시켰다. 이렇게 걸출한 이론들을 제시해 온 기든스의 가장 큰 역작은 뭐니 뭐니 해도 ‘구조화 이론(structuration theory)’이 아닐까 싶다.
기든스의 저서 사회구성론(the Constitution of Society)에 구조화 이론이 잘 설명되어 있다. 1984년에 출판된 사회구성론에는 구조와 행위의 상호작용에 따라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고 변화하는 가에 대한 질문이 담겨 있다. 구조화 이론은 여기에 대답하는 핵심 개념이다. 기든스에 따르면 구조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재생산되는 사회적 규칙과 자원’이고, 행위는 ‘개인이 하는 모든 행동과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구조화 이론은 지금껏 우리가 다뤘던 사회학자들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통합하는 이론적 틀이다. 28장까지 달려오면서 우리는 구조가 중요하다고 보는 사회학자들(뒤르켐, 마르크스 등)과 개인의 행위가 중요하다고 봤던 사회학자들(미드, 고프만 등)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를 다뤘었다. 기든스가 보기에 기존 사회학자들의 한계점은 구조이든 개인의 행동이든 한 가지를 너무나도 과장한다는 것이었다.
일례로 뒤르켐의 ‘사회적 사실(social fact)’을 복습해 보자. 뒤르켐은 사회적 사실을 ‘개인들의 외부에 존재하면서 그들에게 강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구조와 규범, 혹은 가치들’이라 정의하면서 개인의 행동에 사회가 강제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보았다. 마치 벽과 문의 배치가 공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경로를 결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김 씨는 화폐제도를 만들지 않았으나, 화폐제도에 의해 경제활동의 상당 부분이 제약된다. 김 씨가 화폐 이용의 자유를 외치며 편의점에서 부루마블 화폐를 사용하고자 한다면 경찰이 출동할 것이다.
이러한 뒤르켐의 핵심 아이디어는 고프만과 같은 상징적 상호작용론자들에 의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기억이 나실지 모르겠지만, 고프만은 우리 사회를 연극의 연속이라고 보았다. 우리 사회는 내 앞에 있는 '타인들'과 그 앞에서 연기하는 '내'가 상호작용하면서 의미와 상징을 주고받고 만들어내는 연극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사회의 피조물이 아니라 사회의 창조자인 것이다. ‘손님이 왕’이라는 말은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정말 고객들을 존경하기 때문에 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 고객만족도를 높여서 인사고과에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고객들과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이 서비스업계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기든스는 이러한 거시적인 시각과 미시적인 시각 양쪽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통합하고자 하였다. 애초에 개인의 행위와 사회적 구조는 따로 떼어 높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 같이 붙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회구조는 개인의 행위를 포함하고 있고, 모든 개인의 행위 역시 사회구조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둘은 서로 상호작용한다.
언어를 예로 한번 들어보자. 언어는 대표적으로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언어는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되어 온 문법적 틀에 구조화되어 있다. 그 문법적 틀을 지키지 않으면 의사소통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인지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인지 구분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법 구조를 따를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언어생활이 전부 문법적 틀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스타벅스에 가서 주문하고 기다리면 ‘OO님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라고 알려주지 않는가. 문법적으로 아메리카노는 ‘나오실’ 수 없지만 우리는 다 알아듣고 아메리카노를 받으러 간다. 왜냐하면 모두가 이러한 문법에서 벗어난 언어에 익숙해지고 그에 맞게 반복적으로 행위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언어와 같은 사회생활은 구조와 행위 모두를 필요로 한다. 구조가 있기에 행위가 있고, 행위가 있기에 구조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든스가 이야기하는 ‘구조의 이중성(duality of structure)’이다. 이러한 구조의 이중성은 사회가 변화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행위자에게 가해지는 구조의 속박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행위자에게 선택지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개인은 언어라는 구조의 제약 속에서도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그때그때마다 자율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구조는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하고, 우리가 습관처럼 반복하는 행동이 구조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신호등 규칙에 의해서 우리는 빨간불에 멈춰 선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빨간불에 멈춰서는 반복적인 행위가 있기 때문에 신호등 규칙이 유지되는 것이다. 만약 신호등이 비효율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민원을 제기하면, 시에서 검토하고 신호등 위치 자체를 바꿀 수도 있다. 사회구조와 개인의 행동이 주고받는 피드백 덕분에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유지와 변화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든스에 구조의 이중성은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에서 적용된다. 도시라는 공간 자체가 사실 우리에게는 커다란 구조적 제약인 셈이다. 김 씨는 서울 시민이지만 고양시로 출퇴근한다. 거주지와 직장의 행정경계 때문에 서울시가 야심 차게 시작한 ‘서울기후동행카드’를 사용할 수 없다. 또 대중교통이 애매하게 연결되어 있어 차로 40분 정도인 거리인 직장을 1시간 30분이나 들여서 출퇴근한다. 도시라는 공간 구조가 김 씨의 이동을 제약하는 것이다. 이렇듯 도시라는 공간은 사회적이고 물리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도시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렇다고 도시의 구조가 변화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행위에 따라서 도시 구조가 변화되기도 한다. 뉴욕 남부에 소호(SoHo) 지역은 원래 산업화 시기에 사용되던 의류 방직 공장과 창고가 밀집해 있던 곳이었다. 그러나 산업구조의 변화로 인해, 공장과 창고가 버려진 채 방치되고 있었고, 이에 1970년대에 싼 임대료와 넓은 작업공간을 찾던 예술가들의 눈에 띄어 예술가들이 유입되기 시작한다. 화랑이 곳곳에 생기고, 예술가들이 선호하는 레스토랑과 카페, 옷가게, 서점 등이 흑색 공장지대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 따른 지가와 임대료 상승으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지역 발전에 따라 원주민이 쫓겨나는 현상)이 두드러졌지만, 어찌 됐든 공장지대로 주어진 도시구조를 예술가들이 핫플레이스로 변화시킨 것이다.
뉴욕의 하이라인(the High Line)도 시민들의 행위가 도시구조를 바꾼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원래 하이라인은 화물운송을 위해 만들어진 2.33km의 고가철로였다. 1934년부터 운영되었던 이 고가철로는 뉴욕이 발전함에 따라 도로망이 확충되고 트럭 운송이 보편화되면서 1980년 이후 운행이 중단되었다. 운행이 중단되면서 20여 년 간 방치된 폐철로는 부동산 개발사와 토지소유자들에 의해 철거될 위기에 직면했는데, 이때 산업유산으로서 하이라인을 지키고 보존하자는 시민들의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 중심에는 ‘하이라인의 친구들(Friends of High Line)’이라는 이름의 뉴욕시민들로 구성된 시민단체가 있었다. 하이라인의 친구들은 20여 년 동안 운행이 중단된 고가철도에 각종 야생식물과 관목이 자라난 것에 착안하여 이를 공원화하자는 운동을 펼쳤고, 결국 뉴욕시가 철거 방침을 철회하면서 하이라인을 공원으로 바꾸었다. 2.33km의 폐철도는 세계 곳곳에서 벤치마킹하는 선형공원으로 탈바꿈되어 시민들의 산책로와 휴식공간이 되었다. 시민들의 행위가 폐철도라는 도시 공간을 공원으로 바꾼 것이다.
이렇듯 도시에서 우리의 삶은 상당 부분 주어진 도시 공간에 크게 영향을 받지만, 우리 역시 행동을 통해 도시구조를 변화시키고 있다. 기든스가 구조의 이중성으로 설명한 것처럼 도시와 우리 시민들은 상호작용하며 변화해 나간다. 이렇게 변화된 도시의 구조는 또다시 우리가 그 공간 안에서 반복적으로 활동하는 틀을 제시해 주며 새로운 구조를 이루는 것이다.
지금까지 구조와 행위, 거시와 미시의 통합을 추구했던 기든스의 구조화 이론으로 도시에서 구조와 행위가 얽혀 새로운 도시 구조를 만들어낸 예시들을 살펴보았다. 기든스는 구조와 행위가 얽혀 변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성찰성(reflexivity)’이 중요하다고 한다.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관습적으로 기존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구조적 제약에 따라 살아갈 뿐인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인간은 성찰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기든스는 인간이 반복되는 행위를 스스로 돌아보고 구조적인 흐름을 감시할 수 있는 성찰성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성찰성을 통해 우리는 사회구조를 인식하고, 행위를 통해 기존과 다른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도시를 계획하는 전문가들은 도시에 특정한 기능을 부여하고, 이에 따라 도시가 성공적으로 구조화되기를 바란다.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이 따로 있고, 상업시설이 들어올 수 있는 땅이 따로 있듯이, 도시는 질서 있게 계획된다. 물론 도시계획가들이 합리적인 근거에 따라 이런 용도지역을 설정한 것이겠지만, 이렇게 정해진 대로 살아가는 도시의 삶은 재미가 없지 않을까.
성찰적으로 주어진 도시의 구조를 살펴보고, 더 역동적으로 재미있는 도시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결국 우리의 행위에 따른 것이다. 주어진 공간을 그대로 사용하기보다는 그 공간을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우리는 도시의 새로운 질서를 이루는 데 충분히 동참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도시를 더 가치 있고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는 방식이 아닐까.
기든스는 명실상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학자 중 한 명이다. 1938년에 런던 북부 에드먼턴에서 태어난 기든스는 가족 중 유일하게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기든스는 영국 헐대학에서 사회학과 심리학을 공부하고, 1961년에는 런던정치경제대학교(LSE)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레스터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한 기든스는 1970년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옮겨 1972년에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초기에 기든스는 고전사회학자들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연구하고 현대사회학 맥락에서 재해석하며 마르크스, 뒤르켐, 베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이론적 틀에서부터 시작하여 기든스는 인간의 일상적 실천에서 구조가 형성되고 재생산되는 과정을 연구하였고, 1984년에 그를 대표하는 저작인 ‘사회구성론’을 집필하였다. 더불어, 근대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불확실성을 성찰적으로 바라보는 ‘성찰적 근대성’,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넘어 중도적인 사회변화를 모색한 ‘제3의 길’ 등 영향력 있는 이론적 관점을 제시하며 왕성한 연구활동을 하였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기든스가 잘 알려진 이유는 그가 집필한 사회학 교과서 ‘현대사회학(Sociology)’ 덕분일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60만 부 이상 팔린 교과서이다. 과장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회학도라면 책장에 ‘현대사회학’이 무조건 꽂혀 있을 것이다.
기든스는 1985년에 폴리티(Polity)라는 출판사를 설립해 사회학 저서들을 활발하게 출간해 왔고, 그 와중에 명예박사학위를 15개나 가지고 있다. 1996년부터 2003년까지는 런던정치경제대학교의 학장으로 활동하면서 학교의 위상을 높이는 교육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고, 2004년에는 노동당 상원에 진입하여 남작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학문, 행정, 정치 여러 영역을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해 온 기든스는 여전히 위르겐 하버마스와 함께 살아있는 유럽의 지성, 영국 사회학의 자존심으로 불리며 학문적이지만 대중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