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소
작품명: 찰나의 편의점
제작 시기: 24시간 언제나
재료: 끼니를 때워줄 컵라면,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편의점, 비장소
설명: 컵라면을 골라 계산하는 그 찰나의 순간을 번쩍이는 바코드 스캐너의 불빛으로 표현했다.
요즘 세상이 흉흉하다 보니, 늦은 밤 사람이 뜸해진 거리를 걷다 보면 괜히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그때 어두운 도시를 환하게 비추는 불빛 하나가 시야에 들어오는데요. 바로 편의점입니다. 우리나라의 밤거리가 비교적 안전하게 느껴지는 이유에는 아마 24시간 꺼지지 않는 편의점의 불빛이 한몫하지 않을까요?
편의점은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에 대표적인 인프라가 되었습니다. 택배를 보내고, 간단히 식사를 해결하고, 생필품이나 의약품을 사는 등 우리는 일상에서 필요한 많은 일들을 편의점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해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는 편의점에서의 경험은 아이러니하게도 매우 짧습니다. 포켓몬빵을 사러 왔는데 진열대가 비어 있으면 우리는 아무 미련 없이 문을 열고 나섭니다. 이 세상은 넓고 편의점은 많거든요. 우리 앞에 있는 <찰나의 편의점> 작품에는 이런 찰나의 편의점 경험이 바코드 스캐너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백화점이나 마트와 달리 편의점에서는 입장-소비-퇴장이라는 일련의 과정이 빠르게 이루어집니다. 마치 바코드 스캐너의 빛이 번쩍이는 것처럼 말이죠!
편의점의 시작은 1927년 미국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얼음을 팔던 사우스랜드 제빙 회사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에는 냉장고가 보편화되기 전이라서 제빙회사는 한 지역에 중요한 인프라였죠.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찾다 보니까 우유, 빵, 계란 같은 식료품도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편의점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아 참, 이 회사는 오전 7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영업했는데요. 우리에게 친숙한 세븐일레븐의 모체입니다.
우리나라의 편의점 역사는 미국보다는 한참 늦습니다. 1982년에 서울 중구 신당동에서 롯데가 '롯데세븐'이라는 편의점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까지만 해도 동네 슈퍼마켓이 든든하게 우리의 일상 소비를 책임지고 있었기에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2년 만에 폐점했죠.
우리나라에서 편의점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였습니다. 1989년, 세븐일레븐 1호점이 올림픽선수촌에 들어왔고, 1990년에는 훼미리마트(현재 CU)와 LG유통(현재 GS25)이 잇따라 편의점을 개점하면서 우리나라 편의점 시대가 시작됐죠. 그즈음 최수종과 최진실 주연의 드라마 <질투>에 등장한 '편의점 데이트' 장면은 편의점을 새로운 소비와 문화 공간으로 인식하게 만든 상징적인 장면이었습니다.
하지만 '편의'점이라는 이름과 달리, 사실 이때까지도 편의점은 그렇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뭔가 비싸다는 인식이 박혀있었죠. 제가 90년대생인데, 어렸을 때 아이스크림을 사 먹더라도 편의점이 아니라 동네 슈퍼마켙(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켙’이라고 쓰여있더라고요)에 갔습니다. 편의점보다 훨씬 싸고, 주인아주머니와 적당히 딜(?)을 하면 가끔 사탕도 하나 그냥 주셨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편의점에 ‘1+1 행사’와 도시락 같은 PB(자체 브랜드 상품)이 등장하면서 편의점이 ‘가성비 좋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묶음으로 판매하는 마트보다도 언제 어디서나 쉽게 소포장 상품을 이용할 수 있는 편의점의 장점이 더욱 부각되었습니다. 2007년에 1만 개를 돌파한 편의점 점포 수는 2021년에 5만 개를 돌파했는데요. 대략 인구 920여 명당 편의점 한 개꼴입니다. 편의점 건너편에 편의점, 편의점 옆에 편의점이 있는 풍경이 낯설지 않을 정도로 이제 도시 곳곳에 편의점이 위치하고 있죠.
그러다 보니 편의점 매출액도 대단한데요. 오프라인 유통업 매출액 비중을 보면 편의점은 17.3%를 차지하면서 1위인 백화점(17.4%)과 단 0.1%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80년대에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편의점이 동네 슈퍼마켓은 물론 마트를 압도하고 백화점의 위상까지 넘보는 유통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이렇게 편의점은 도시 어디에서나 보이고,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과자 사 먹어야지”해도 편의점에 가고, “택배 보내야지”해도 편의점에 가며, “간단하게 점심 때워야지”해도 편의점에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4년 GS25의 조사에 따르면 편의점에 들어갔다 나오는 평균 체류 시간은 불과 3분 7초라고 합니다. 2018년에 1분 30초가량 밖에 안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꽤 많이 늘었습니다만, 들어가면 기본 두세 시간을 보내는 백화점이나 마트에 비할 때 정말 찰나의 순간이죠. 그래서 우리에게 편의점은 ‘머무는 장소’라기보다는 마치 지하철역처럼 그냥 통과하는 ‘장소 같지 않은 장소’처럼 느껴집니다.
이렇게 뭔가 '장소 같지 않은 장소'를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Marc Auge, 1935~2023)는 ‘비장소(non-place)’라고 불렀습니다. 비장소는 쉽게 말해서 일시적이고 획일적인 공간을 의미합니다. 오제는 비장소와 구분되는 개념으로 '인류학적 장소'를 제시하는데요. 인류학적 장소에는 인간적의 삶의 근간이 되는 정체성, 관계, 역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정체성의 장소는 개인이나 집단이 소속감과 자기 인식을 부여하는 곳입니다. 여러분이 태어난 동네, 다니던 학교, 데이트하던 골목길 같이 그곳에 대한 기억과 경험을 통해 ‘나는 여기 사람이다’라는 감각이 생기는 곳이죠.
관계의 장소는 우리가 사회적인 교류를 만들어가는 곳입니다. 혹시 어렸을 적 명절에 시골 할머니댁 가시지 않으셨나요? 겨우 1년에 한두 번 갈까 말까 하는 곳이지만, 할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는 곳이죠. 거기에 가면 할머니께 남들에게 이야기 못할 고민도 이야기하고, 배 터지게 먹고, 편히 쉴 수 있잖아요. 이렇듯 관계의 장소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역할이나 규범이 작동하고 우리의 사회적 위치가 드러납니다.
역사적 장소는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기억, 다시 말해서 추억과 전통이 쌓이는 곳입니다. 바로 앞서 지나쳤던 작품 <고궁 앞에서>처럼 문화유산이 있는 곳이 대표적인 역사적 장소죠. 연인이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지게 된다고 하는 이야기는 세대를 넘어서 계속 전승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이런 일이 있어왔다’라는 서사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연속성 있게 이어지는 곳이죠.
지금까지 ‘장소’를 알아봤는데, 그렇다면 ‘비장소’는 어떨까요? 비장소는 정체성과 관련 없고, 관계적이지도 않으며, 역사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입니다. 예를 들면, 공항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공항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일시적입니다. 여권을 확인할 때만 잠깐 정체성이 생기죠. 공항에서는 ‘내가 여기에 속해 있다’라는 마음을 갖기 어렵습니다. 또한 관계도 말이나 텍스트로 대체됩니다. 공항에 가면 여러분을 반겨 주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오른쪽 줄에 서시오’, ‘금연’과 같은 텍스트 혹은 ‘안내방송’이죠. 사람과 교류하더라도 그 관계는 지속되지 않고 순간적입니다. 더 나아가서 공항이라는 곳은 머무름이 아니라 통과하는 공간입니다. 그러다 보니 역사성도 큰 의미가 없죠.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실시간 운항 정보입니다.
오제의 비장소 개념으로 봤을 때 편의점도 그렇습니다. 편의점은 대표적인 프랜차이즈로 어느 곳이나 비슷한 인테리어를 갖추고 있고, 비슷한 상품을 진열하고 있습니다. 소비하는 사람의 정체성은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맥주나 담배 살 때에나 잠시 정체성 확인이 필요할 뿐이죠.
관계는 어떨까요? 백화점에서 물건을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누군가 와서 상품을 설명해 줍니다. 그런데 편의점에서는 여러분이 뭘 보고 있던 점원이 개입하지 않습니다. “봉투 드려요?”와 같은 최소한의 대화를 빼면 점원과의 대화는 바코드 스캔과 신용카드로 대체됩니다. 이렇듯 편의점에서는 사람과 사람 간 교류가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편의점이 기념과 전통의 공간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죠? 편의점에서 중요한 것은 '현재 재고가 있는지 없는지'입니다. ‘연세 우유 교보문고맛’ 크림빵이 먹고 싶은 여러분에게 편의점의 과거가 알 게 뭡니까. 지금 당장 그 상품이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것이죠.
이렇듯 편의점은 우리가 누구인지, 누구와 마주치는지, 과거가 어땠는지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 비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장소라고 해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 같은 ISTJ들은 백화점에서 누가 말 거는 상황을 굉장히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리고 어디 들어갔으면 필요한 게 없어도 괜히 뭐라도 하나 사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죠.
그에 비해 편의점은 참 편합니다. 말을 안 해도 되고, 지금 필요한 게 없으면 아무 부담 없이 쉽게 뒤돌아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런 익명성과 관계의 가벼움, 그리고 현재의 중요성이 편의점을 일종의 해방 공간으로 만들기도 하죠. 물론 그만큼 외로운 공간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최근 이런 편의점도 장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과거 동네 슈퍼마켙 같이 말이죠. 천편일률적인 인테리어와 상품 구성을 넘어서 특화된 체험형 편의점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주류특화 매장, 라면 특화 매장 등이 있고, 외국인이 많이 방문하는 경복궁 근처에는 한글 간판 편의점도 있습니다.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사람들이 편의점을 이용하는 방식에서 생기고 있습니다. 학원가로 유명한 대치동의 편의점은 학원을 전전하는 아이들에게 잠깐의 휴식 공간입니다. 바쁜 스케줄에 끼니를 때우고, 부모님을 기다리는 공간이죠. 여기서 아이들은 머물고 추억을 쌓습니다.
이런 대치동에는 일명 ‘강대치’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편의점이 있는데요. 이 편의점은 어린 학생들이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편의점 안에서 편하게 부모님을 기다리거나 쉬고, 숙제를 해도 된다는 안내문을 붙여 놓습니다. 따뜻한 편의점 할아버지의 마음으로 그 편의점은 아이들에게 아지트가 됩니다. 이때 편의점은 더 이상 비장소가 아니라 인류학적 장소가 되는 것이죠.
오제의 비장소 개념이 추상적이고 주관적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동일한 공간이 어떤 사람에게는 장소, 다른 사람에게는 비장소일 수 있고, 같은 사람에게도 단기적으로는 비장소, 장기적으로는 장소일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애초에 장소와 비장소를 구분하는 것은 저마다의 마음이죠. 예시로 들었던 공항도 매일 거기에서 일하는 스튜어디스에게는 장소가 될 테니까요.
편의점에는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안고 들어갔다가 나갑니다. 우리의 마음에 따라 편의점은 장소이기도 하고 비장소이기도 하죠. 단 3분 7초를 머무는 공간이지만, 찰나의 편의점은 외로움 속에서 자유를, 자유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우리 삶의 양면성을 고스란히 비추고 있습니다.
<찰나의 편의점> 속에 그려진 인물들에게 이런 편의점은 어떤 공간일까요? "오늘은 다른 컵라면을 드시네요", "어, 근무시간 옮기셨어요?"와 점원과 손님 사이에 서로를 알아보는 대화가 오간다면 그때만큼 편의점은 찰나의 순간을 머무는 도시의 장소일 것입니다.
"장소가 정체성과 관련되며 관계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서 규정될 수 있다면, 정체성과 관련되지 않고, 관계적이지도 않으며 역사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은 비장소로 규정될 것이다."
- 마르크 오제, 《비장소: 초근대성의 인류학 입문》, 1992 -
마르크 오제에 따르면 인류학적 장소는 정체성(소속감), 관계(사회적 유대), 역사(기억과 시간의 축적)를 형성한다. 반면 공항, 고속도로, 호텔, 대형 쇼핑몰처럼 사람들이 주로 통과하거나 소비하는 과정에서 머무는 비장소는 이러한 세 요소와 관련되지 않은 공간을 의미한다. 오제는 이런 비장소성의 확산을 초근대성(supermodernity)의 결과로 보았는데, 이는 '현재'만 끊임없이 갱신하는 사건의 과잉, 그저 '통과하는 공간'처럼 장소 간 차이를 희석하는 공간의 과잉, 집단적인 정체성을 약화하는 개인화의 과잉이 겹쳐진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비장소에서 사람들은 물리적으로는 함께 있지만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한 채 익명성과 고독을 경험하고, 동시에 여권, 결제수단, 예약번호 같은 표식을 통해 끊임없이 사진의 ‘신원’을 증명해야 한다. 다만 오제는 장소와 비장소의 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했다. 같은 공항이나 마트라도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의미와 관계가 축적되는 장소가 될 수 있듯, 장소와 비장소는 공존하고 변화될 수 있는 연속선 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