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작용 의례
작품명: 여유로운 카페의 풍경
제작 시기: 저녁 식사 후
재료: 카페의 따뜻한 조명과 고소한 커피 향, 사람들, 상호작용 의례
설명: 카페의 여유로운 풍경 속에 각자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조화롭게 표현했다.
점심을 먹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 문득 허전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혹시 식당에 뭘 두고 왔나 싶어서 체크해 보는데, 지갑도 있고 핸드폰도 잘 챙겼습니다. 뭘 잊어버렸지 곰곰이 생각하는 순간 깨닫습니다. “아, 커피를 안 마셨네.”
우리나라에서 ‘식후 커피’는 ‘치맥’, ‘목욕탕 바나나 우유’, ‘짜파게티와 파김치’ 만큼이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국룰’입니다. 배는 채웠는데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느낌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카페를 찾습니다. 혈관을 짜릿하게 타고 흐르는 카페인을 수혈받기 위해서!
카페를 가는 이유는 제각각이죠. 직장인은 오후를 버티기 위한 각성 효과가 필요해서, 연인들을 데이트를 위해서, 학생들은 공부를 하려고 카페 갑니다. 카페에 들어서면 도떼기시장처럼 시끄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클래식 공연장만큼 조용하지도 않습니다. 여기저기서 도란도란 흘러나오는 목소리, 컵이 맞닿는 소리, 커피 머신의 일정한 리듬이 섞여서 묘한 안정감을 만듭니다. 이런 적당한 소음 속에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죠.
우리가 ‘소비와 문화’ 전시장에서 마지막으로 마주할 작품은 <여유로운 카페의 풍경>입니다. 그림 속 인물들은 커피를 앞에 두고 저마다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대화를 나누고, 누군가는 공부를 하고, 누군가는 노트북 화면에 집중하고, 심지어 누군가는 엎드려 자고 있죠. 무엇을 하든 카페 안의 사람들은 모두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 어우러집니다. 이처럼 카페는 바쁘고, 시끄럽고, 신경 쓸 일이 너무나 많은 도시의 삶 속에서 누구나 잠시나마 숨을 고를 수 있는 공간입니다.
카페의 기원은 17세기 초반 저 멀리 중반 오스만 제국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걸 보고 프랑스 사람들이 1645년 파리에 유럽 최초의 카페를 열면서 오늘날 카페 문화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파리에서 시작되어 곧 유럽 곳곳으로 퍼져나간 카페는 단순히 음료를 마시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정보를 공유하던 공간이었습니다. 저명한 독일의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공적인 문제를 토론하고 여론을 형성하던 유럽의 카페를 근대 시민사회의 핵심 무대인 ‘공론장(public sphere)’이라 설명하기도 했죠.
우리나라에는 개화기에 서구식 카페가 들어왔는데요. 본격적으로 ‘대(大) 카페 시대’가 열린 1990년대 이전까지 우리에게 더 익숙했던 공간은 ‘다방’이었습니다. 지금이야 뭔가 퇴폐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지만, 과거 다방은 유럽의 카페와 마찬가지로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모이던 대표적인 문화 공간이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 서구식 프랜차이즈 카페가 상륙하면서 우리나라 카페 문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습니다. 1999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인근에 스타벅스 1호점이 문을 열었을 때, 저도 친척 어른들과 함께 갔었는데요. 달디 단 인스턴트커피에 길들여졌던 어른들이 처음 아메리카노와 라떼를 마시며 ‘쓰다’고 얼굴을 찌푸리시던 모습이 기억나네요.
그 이후 우리나라에서 카페는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2009년에 2만 7천 개 수준이었던 카페는 2024년에 10만 개를 돌파했습니다. 편의점 수의 두 배를 육박하는 규모로, 대략 인구 500명 당 카페 한 곳이 있는 셈입니다. 카페 옆에 카페가 있는 건 뭐 이젠 놀랍지도 않습니다. 커피는 또 얼마나 많이 마시는지, 1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은 416컵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스타벅스가 처음 들어온 지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는 명실상부한 ‘커피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카페를 자주 찾게 되었을까요? 다소 단순한 이유이지만, 카페라는 공간이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에서 누군가를 만나기에 가장 적합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캘리포니아처럼 1년 내내 날씨가 좋으면 공원 같은 곳에 앉아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텐데, 우리나라는 사정이 다릅니다. ‘봄-여어어어어름-갈-겨어어어어울’ 야외 활동이 가능한 계절이 아주 짧기 때문이죠. 게다가 과거 사랑방이나 집에 손님을 초대하던 문화도 개인화된 사회에서 점차 사라졌습니다.
이때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사적인 공간이 아니면서도 접근하기 쉬운 카페가 도시의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소개팅을 하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든,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고 싶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카페로 향합니다. 이렇게 카페는 어느새 도시의 핵심적인 ‘상호작용 인프라’로 자리 잡게 된 것이죠.
우리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랜들 콜린스(Randall Collins, 1941~)는 일상생활 속에서 주고받는 정서적인 교류를 상호작용 의례(interaction ritual)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의례’라고 하면 흔히 예배나 제사 같은 종교적 의식을 떠올리기 쉽지만, 콜린스가 이야기하는 의례는 꼭 복잡한 형식과 절차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짧은 마주침, 매일 주고받는 인사, 표정이나 몸짓과 같은 사소한 행동들도 이런 상호작용 의례의 구성요소가 될 수 있죠.
콜린스에 따르면 이런 상호작용 의례에는 네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먼저,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함께 존재해야 하고, 누가 상호작용에 참여하는지 구분되는 경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더해, 구성원들이 공통의 대상이나 활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일시적으로 비슷한 감정을 함께 경험하는 상태에 있어야 하죠. 이러한 조건이 충족될 때, 상호작용 참여자들 사이에는 집단적인 유대감과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정서적 에너지, 상징, 그리고 도덕적인 감각이 만들어집니다.
예를 들면,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기가 있다고 해봅시다. 경기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시간에 모이고, 출입구를 기준으로 경기장의 안과 밖이 분명히 나뉘죠. 관중들은 모두 경기의 상황과 점수에 관심을 집중하고,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환호하고 탄식하는 등, 비슷한 감정을 공유합니다. 그 결과, 같은 팀을 응원한다는 이유로 처음 본 옆 사람과도 집단적인 유대감이 형성되고, 소속감과 같은 정서적인 에너지가 생성됩니다. 또한, 팀이 위기에 빠졌을 때 부르는 응원가는 집단의 힘을 모으는 상징이 되고, 상대팀 선수의 비매너적인 플레이에 분노하는 도덕적인 감각도 자연스레 따라오죠.
콜린스는 이런 상호작용 의례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한 번의 만남에서 생성된 정서적 에너지는 다음 만남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의례는 사슬처럼 반복됩니다. 경기를 보고 소속감과 활력을 얻는 사람들은 다음 경기에도 다시 경기장을 찾으며 경기장 문화가 만들어지듯이 말입니다. 콜린스는 이렇게 상호작용 의례가 축적되면서 경기장 문화 같은 사회의 구조가 형성되고 유지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카페는 어떨까요? 카페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 의례는 경기장만큼 격렬하지는 않습니다. 카페라는 공간에 함께 모인 사람들은 그 안에 머무는 동안 자연스럽게 카페 외부와 구분됩니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 노트북을 펼치거나, 상대와 대화를 나누거나, 책을 읽는 등 활동은 제각각이지만, 공통적으로 ‘커피’를 마시면서 여유로운 카페의 분위기에 스며듭니다.
그 결과, 카페 안의 사람들은 낯선 타인들 속에서도 묘한 편안함을 느낍니다. 이때 인테리어와 브랜드 로고, 흐르는 음악과 고소한 커피 향은 이런 카페의 편안한 분위기를 상징하는 요소들이죠. 동시에 너무 시끄럽게 떠들지 않는다거나, 냄새가 강한 외부 음식을 삼가는 것처럼 암묵적인 도덕적 감각도 형성됩니다. 카페의 여유로운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는 집단적인 합의가 작동하는 셈입니다.
이렇게 카페에서 경험한 여유로운 정서적 에너지는 또다시 카페를 찾게 만드는 동기가 됩니다. 카페에서의 상호작용 의례가 사슬처럼 이어지고, 그 반복을 통해 카페 문화가 만들어지는 것이죠. 격렬하지는 않지만 꾸준히 정서적 에너지를 공급하는 일상의 의례, 그것이 바로 오늘날 카페가 도시에서 수행하는 역할입니다.
오늘날의 카페는 과거에 비해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는 카페를 집처럼 사적인 공간도 아니고, 직장이나 학교처럼 공식적인 공간도 아닌, 다양한 사람들이 느슨하게 어울릴 수 있는 ‘제3의 공간’이라고 했습니다. 덕분에 카페는 집이 아닌데도 책을 읽거나 유튜브를 보며 쉬는 곳이 되고, 직장과 학교가 아닌데도 노트북을 펴고 일하거나 공부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사회에 등장한 현상이 바로 ‘카공’입니다. 카공은 ‘카페에서 공부’를 줄인 말인데요. 장시간 자리를 차지하고, 콘센트를 독점하거나 주변의 대화 소리에 지나치게 불쾌감을 드러내는 극단적인 사례도 종종 회자됩니다. 이런 장면은 카페가 지닌 ‘만남과 대화의 공간’이라는 성격이 점점 밀려나고 ‘개인의 작업 공간’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카공 자체가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러한 변화가 확산된다는 사실은 결국 카페에서 자연스러운 대화와 사회적 교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하버마스가 이야기했던 과거 카페의 공론장 이미지와는 거리가 느껴지는 풍경이죠.
그럼에도 카페는 여전히 우리 도시를 대표하는 상호작용의 공간입니다. 같은 음악, 같은 조명,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각자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완전히 서로를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집에서보다 집중이 잘 된다고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직접적인 시선이 오가지 않더라도 ‘함께 있음’ 이 자체가 의식되면서 딴짓을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아도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카페 안에서 이미 상호작용 의례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죠.
카페에 흐르는 안정감과 여유로움 속에서 생성되는 정서적 에너지는 특별한 약속이 없더라도 우리의 발걸음을 카페로 향하게 합니다. 이렇게 보면, 아무리 대화와 만남의 경험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카페가 단순히 개인화된 커피 소비 공간으로 전락한 것은 아닙니다. 카페는 혼자 있을 때의 외로움과 함께 있을 때의 불편함이라는 미묘한 경계에 위치해 있습니다. 바로 그 경계 위에서 카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편안한 분위기, 그러나 완전히 혼자는 아닌 소속된 느낌’이라는 정서적 에너지를 ‘커피 한 잔’이라는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도시의 상호작용 인프라입니다.
혹시 오늘 하루를 버겁게 보냈지만, 그 이야기를 나눌 마땅한 상대가 떠오르지 않으시나요? 그렇다면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시키고 앉아 보세요. 옆자리 커플의 웃음소리, 뒷자리 선후배의 진지한 대화, 각기 다른 사연들이 라디오처럼 흘러나와 섞이는 동안, 카페에 축적된 정서적 에너지가 천천히 전해질지도 모릅니다. <여유로운 카페의 풍경>이 보여주듯, 카페에서의 시간은 오늘도 우리의 도시적 삶 한가운데에 편안함과 여유로움을 조용히 쌓아가고 있습니다.
"상호작용 의례 이론은 개인이 한 상황에서 다른 상황으로 이동하게 되는 동기를 설명한다. 개인은 정서적 에너지를 추구하며, 특정 상황이 개인에게 매력적으로 인식되는가는 해당 상호작용 의례가 정서적 에너지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산출하는지에 달려 있다."
- 랜들 콜린스, ≪상호작용 의례 사슬≫, 2004 -
랜들 콜린스(Randall Collins)의 상호작용 의례 이론은 사회적 삶의 핵심 동력을 개인들 사이에서 반복되는 미시적 만남에서 찾는다. 콜린스에 따르면 사람들은 일상 속 대면적 상호작용을 통해 일시적인 감정을 공유하고, 그 결과 자신감, 활력, 소속감과 같은 정서적 에너지를 획득하거나 소진한다. 이러한 상호작용이 의례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함께 존재하고, 참여자와 비참여자를 가르는 경계가 형성되며, 공동의 대상에 주의를 집중하고, 유사한 감정을 함께 경험해야 한다. 조건이 충족된 상호작용 의례는 집단적 유대감, 성스러운 상징, 도덕적 표준을 산출해 낸다. 특히, 생성된 정서적 에너지는 개인을 다시 그 상황으로 이끌어 유사한 만남을 반복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콜린스는 상호작용 의례가 사슬처럼 연결되며 축적되고, 그 반복을 통해 집단, 문화, 제도와 같은 거시적 사회구조가 형성되고 유지되는 것으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