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
작품명: 별이 빛나는 고층빌딩
제작 시기: 야경으로 도시가 가장 멋져 보이는 밤
재료: 고층빌딩,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설명: 도시의 밤을 빛내는 고층빌딩의 불빛으로 도시의 번영을 몽환적으로 표현했다.
2전시실 ‘소비와 문화’를 지나 이제 우리는 3전시실인 ‘주거와 공간’으로 왔습니다. 여기서 처음 만나게 될 작품은 고층빌딩이 뿜어내는 빛으로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을 담아낸 <별이 빛나는 고층빌딩>입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고층빌딩은 소위 ‘잘 나가는 도시’의 상징입니다. 뉴욕의 맨해튼, 도쿄의 신주쿠, 서울의 여의도를 떠올려 보면 시선이 위로 끌리죠. 고층빌딩이 밀집한 스카이라인은 그 자체로 도시의 번영과 성공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어릴 때 저는 63빌딩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빌딩인 줄 알았는데요. 부모님 손잡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63빌딩으로 올라가던 중 어느 순간 귀가 먹먹해져서 침을 꿀떡 삼켰던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전망대에서 발아래 펼쳐진 서울의 모습을 보며 마치 ‘세상의 정점’에 서 있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63빌딩 정도는 그렇게 높은 빌딩이 아닙니다. 도곡동의 타워팰리스 같이 63층을 훌쩍 넘는 주상복합 아파트도 있고, 세계 곳곳에서는 100층이 넘는 고층빌딩들이 서로 경쟁하듯 하늘을 찔러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점점 건물의 높이에 무뎌지는 것 같기도 하네요.
보통 고층빌딩은 도시의 중심부이면서 땅값이 천문학적인 오피스 타운에 세워집니다. 그러다 보니 소유자는 대개 그만큼의 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거대 기업일 수밖에 없죠. 이런 기업들은 멋지고 웅장하며 하늘에 더 가까운 사옥을 지어 기업의 세를 뽐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도시를 지나다니면서 고층빌딩을 올려다보고 감탄하게 되죠.
도대체 고층빌딩은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요?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높은 것을 좋아하는 것일까요?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지은 건물을 우리는 마천루(摩天樓)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하늘(天)을 문지르는(摩) 다락(樓)’인데요. 영어로는 ‘skyscraper’, 즉 하늘(sky)을 긁어내는 건물(scraper)이죠.
그럼 도대체 ‘얼마나 높아야 마천루인가?’가 궁금해집니다. 사실 마천루의 공식적인 기준은 없습니다만, ‘세계초고층도시건축학회(Council on Tall Buildings and Urban Habitat, CTBUH)는 150m를 이상을 ’마천루(skyscraper)’, 300m 이상을 ’슈퍼톨(super tall)’, 600m 이상을 ‘메가톨(mega tall)’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250m인 63빌딩이 마천루이고, 555m인 롯데월드타워가 슈퍼톨이네요. 메가톨에 속하는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828m)는 강북-강남을 잇는 한남대교(919m)와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새삼 건축 기술이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우리는 흔히 수직화된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기술의 발전과 결부합니다. 물론 철골 구조, 엘리베이터, 설비·안전 기술의 발전이 결정적이기는 했죠. 하지만 기술만으로는 하늘 공간을 침범할 수 없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거대한 건축이 가능해지는 순간에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든 권력과 자원을 집중시킬 수 있을 때, 건축은 비약적으로 발전합니다. 10만 여 명을 20년 동안 동원하여 까마득히 먼 기원전 2770년에 지은 이집트 피라미드처럼 말이죠.
오늘날 하늘 공간을 점유한 도시의 마천루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시 한복판 금싸라기 땅을 매입하고, 수많은 노동자를 고용하며, 건축비용과 유지비용까지 감당하려면 천문학적인 돈을 투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축적된 자본을 투입할 수 있는 능력이 필수적이겠죠.
자본이 없었다면 뉴욕의 크라이슬러 빌딩도, 서울의 롯데월드타워도 불가능했겠죠. 그렇기에 도시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고층빌딩은 단순한 업무 공간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끝없는 성장의 상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때 고층빌딩의 높이는 자본이 남긴 직관적인 성장의 척도인 셈이죠.
땅에 발 붙이며 살아가는 우리는 도시에서 지나다니면서 고층빌딩을 우러러보게 됩니다. 고층빌딩 숲은 마치 인류 발전사의 한복판 같달까요? 이런 감각은 어느새 ‘고층빌딩 = 발전과 성장’이라는 상식처럼 다가옵니다.
이렇게 ‘우리 사회 내에서 상식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생각’을 이데올로기(ideology)라고 합니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이데올로기를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계급, 즉 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요인이라고 본 대표적인 사회학자입니다.
사람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아마 조금씩 다를 텐데요. 어떤 사람은 ‘생각’의 변화가 세상을 바꾼다고 보고, 또 다른 사람은 ‘산업구조’의 변화가 세상을 바꾼다고 보기도 합니다. 마르크스의 관점은 이 중 후자에 가깝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핵심적인 요인을 물질적 조건, 즉 경제 시스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경제적 시스템을 토대, 종교, 도덕, 법, 철학, 문화 같은 정신적인 것들을 상부구조로 구분하고, 토대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고 보았죠.
여기서 토대에 속한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지배하는 자본가 계급은 상부구조에 속한 이데올로기를 통제하고 조작하면서 불평등한 현실을 가립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는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는 경제 시스템이야”라는 이데올로기를 교육, 언론으로 확산시켜 열악한 노동환경에 불만을 가지는 노동자 계급을 ’노력하지 않는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논리가 보편적인 논리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죠.
고층빌딩 역시 이데올로기 역할을 합니다. 고층빌딩의 수직성은 계급 질서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업 총수는 고층빌딩 몇 층에 있을까요? 우리는 자연스럽게 최고층에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실제로 낮은 직급의 노동자는 아래층에 있고, 직급이 올라감에 따라 층수가 높아지죠. 그리고 위로 갈수록 공간은 더 넓고, 조용하고, 쾌적해지며 소수의 사람만 접근이 가능하게 통제됩니다. 높이가 마치 신분처럼 작동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고층빌딩은 ’성공 신화‘로 해석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열심히 노력해 자본을 축적해 성공한 기업의 표식이죠.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와 지자체도 고층빌딩을 통해서 ’글로벌 경쟁력‘ 내지 ’랜드마크‘를 과시하고자 하는데요. 결국, 기업, 국가, 도시 모두 고층빌딩을 통해 ’높을수록 성공한 것‘이라는 생각을 일반화시킵니다.
이런 수직성에 기반한 이데올로기는 고층빌딩을 건설하고 유지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노동‘을 은폐하기도 합니다. 건설 노동자의 위험 노동, 청소나 경비 같은 시설 관리 노동, 그렇게 지어지고 유지되는 사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노동이 도시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반짝이는 유리, 세련된 디자인과 첨단 기술이라는 외피를 입은 고층건물의 외벽에 가려지는 것이죠.
다시 말해, 고층빌딩은 자본 축적과 계급의 질서를 근사한 도시 풍경으로 보이게 만드는 이데올로기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도시의 일상 속에서 그 풍경에 익숙해지며 ’당연하고 추구해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도시경제학자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고층빌딩의 효율성을 강조합니다. 사람이 밀집하고 가용할 수 있는 토지가 부족한 도시에서 넓은 저층 건물을 짓는 것보다 고층빌딩을 짓는 게 더 경제적이라는 것이죠. 같은 면적이라도 고층으로 지으면 임대할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나고, 시설 설비를 위한 고정비용이 분산되니까 일종의 규모의 경제가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일리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고층빌딩이 등장하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묘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고층빌딩이 세워지는 시점과 국가나 기업이 경제적으로 휘청이는 시점이 자주 겹친다는 것이죠. 이른바 ’마천루의 저주‘입니다.
실제로 1929년에 착공한 뉴욕의 크라이슬러 빌딩은 대공황과, 1998년 완공된 쿠알라룸푸르의 페르토나스타워는 아시아 외환위기와 겹쳤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63빌딩이 완공된 지 2년 만에 소유주인 신동아그룹이 해체되었고, 롯데그룹도 롯데월드타워를 건설한 뒤 오랜 기간 부진에 시달리며 2024년에 은행권에 담보로 내놓은 상태입니다.
물론 우연일 수도 있습니다만, 미국의 수학자 존 캐스티는 자본이 쌓이는 경제호황기에 고층빌딩 건축이 시작되고, 그 빌딩이 건설되는 동안 거품이 꺼지면서 경기불황의 직격탄에 맞은 결과라고 설명하며, “어떤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될 거라고 말하며 고층 빌딩의 첫 삽을 뜨는 순간 빨리 그 나라 주식시장에서 빠져나오라”라고 조언했습니다. 안 그래도 경기가 어려운데 천문학적인 건설비용과 유지비까지 상담한 부담이 되어 기술개발과 신사업에 집중하는 역량이 분산된다면 국가와 기업이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관점을 바꿔보면 마천루는 ’성장의 상징‘이 아니라 ’위기의 전조‘일 수도 있습니다.
서울 삼성동에 105층 높이의 초고층빌딩을 구상하던 현대자동차그룹도 최근 54개 층 3개 동으로 설계안을 변경 제출했습니다. 초고층 랜드마크를 기대하던 서울시는 아쉬워하는 분위기이지만, 이런 상황은 더 높이 올라가고 싶은 자본의 욕망도 자본주의의 한계에 부딪힐 수 있다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늘에 닿으려는 인간의 허영이 무너져 내린 성경 속 바벨탑 이야기 말입니다. 비록 종교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어느새 고층빌딩을 도시 경쟁력의 증거로, 기업의 성공 신화로, 자본주의 사회 번영의 상징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에게 마천루의 저주는 현대판 바벨탑 이야기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과연 어디까지 높아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높아져 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별이 빛나는 고층빌딩>에서 도시의 밤에 빛나는 고층빌딩들의 불빛들은 ’성공한 도시‘라는 이데올로기를 저 멀리까지 비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시대에서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 사상이 된다. 즉 사회 안에서 물질적 힘을 지배하는 계급은 동시에 지적 힘도 지배한다."
- 카를 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 1932 -
이데올로기는 본래 한 사회에서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는 관념과 널리 공유된 신념을 가리킨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 개념을 통해, 이러한 상식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봉사하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우리는 흔히 세상을 인식할 때 생각과 의식 같은 관념적 차원을 중시하지만, 마르크스는 법·정치·도덕·종교와 같은 상부구조적 관념들이 사회의 경제적 구조와 권력관계, 즉 경제적 토대에 의해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지배적인 사상은 언제나 지배계급의 이해를 반영하며, 그 결과 사회에 내재한 불평등과 모순은 은폐되고 기존 질서가 마치 자연스럽고 불변의 진리처럼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분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폭로하고, 사회 변혁을 모색하기 위한 출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