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준 Nov 08. 2021

노스탤지아 上

 “야, 일어나.” 

공원 벤치에 누워 자고 있는 채영을 누군가 손으로 툭툭 건들며 말했다. 

채영은 몹시 졸렸지만 계속하여 잠을 깨우는 불청객이 거슬려 도통 잠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아이..시발..누구야..” 

채영은 짤막한 욕지거리를 입에 머금으며 눈을 살며시 떴다. 내리쬐는 햇빛 때문 에 새카만 형체만 간신히 보일 뿐 불청객의 얼굴을 확인할 순 없었다. 채영은 다시 눈을 감았다. 부모와 대판 싸우고 가출한 어젯밤의 기억이 파도처럼 쓸려왔다. 채영은 또래에 비하면 나름대로 이성적인 편이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어젯밤 일은 그런 그녀도 참을 수 없었다. 

-그깟 술 좀 몇 모금 마셨다고 노발대발하다니.. 호기심에 맥주 한 두 캔 먹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녀는 별것도 아닌 것에 화를 내 는 부모가 못마땅했다. 무엇보다 진열장에 있던 양주를 마시려던 것을 참고 냉장고 구석에 있는 맥주를 마신 것이기에 더욱 억울하였다. 채영에게 호기심은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자 자신의 본질과도 같은 것이었다. 호기심에서 탄생한 탐구능력과 상상력은 그녀가 어릴 때 ‘영재’ 소리를 듣는데 크게 한 몫 했다. 딸의 ‘영재’ 소리에 들뜬 그녀의 부모는 채영이 원하는 것은 여건이 되는 한 뭐든지 지원해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대부분의 ‘영재’가 그렇듯 채영 또한 호기심‘만’ 많은 평범한 아이가 됐고 그녀의 부모 역시 학교 성적만 신경 쓰는, 잔소리 많은 평범한 어른들이 됐다. 




채영은 그런 부모가 실망스러웠고, 짜증났고, 미웠다.

그렇게 그녀는 모두가 잠든 새벽, 덜컥 집을 나와버렸다. 잘 곳을 찾기 위해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렸지만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대다수가 안 받거나 받아도 난색을 표했다. 갈 곳이 사라진 채영은 

-큰 마음을 먹고 가출했는데 지금 돌아가면 체면이 안서는 것은 물론 더욱 혼날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계속 시내를 돌아다녔다. 새벽공기의 비릿한 냄새를 맡으며 어둠으로 뒤덮인 도시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은 꽤나 흥미로웠다. 수년간 매일같이 지나다닌 거리였지만 빛이 사라진 도시의 거리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고 그 속에서 채영은 마치 타국을 홀로 떠돌아다니는 유랑자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몇 시간을 걷자 새끼발가락 한쪽이 쓸려 빨갛게 부어 있었다. 채영은 그동안 오기로 발가락의 비명을 무시했지만 통증이 심해져 더이상은 그럴 수 없었다. 때 마침 공원 근처를 지나 가고 있던 그녀는 벤치에 털썩 주저 앉고 아픈 발가락을 달래듯 만지작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직 어둑하긴 하지만 집을 막 나왔을 때보다는 확실히 어둠이 옅어져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채영에게 는 위안이 됐다. 그녀는 늦은 밤에 거리를 유유자적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대담하고 겁 없는 성격이긴 했지만 아직 16살, 어린 소녀였고 어둠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완전히 걷어낼 순 없었다. 점차 걷혀지는 어둠에 마음이 놓이자 졸음이 쏟아졌다. -잠시 눈 좀 붙일까..라며 눈을 감자마자 채영은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지금 앞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이 그녀를 잠에서 깨우고 있다. 




채영은 다시 살며시 눈을 뜬 후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흐렸던 시야가 선명해지자 새카만 형체가 점차 윤곽을 잡아갔다. 채영을 깨우고 있던 사람은 짧은 머리, 날카로운 눈매와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였다. 중성적인 외모와 더불어 그녀의 두배는 돼 보이는 맨투맨 티와 통바지를 입고 있었기에 채영은 그녀가 ‘그녀’라는 것을 알아차리기에는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성숙해 보였지만 아직 채 사라지지 않은 약간의 여드름자국이 그녀의 나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야, 일어나 지금 대낮이야.” 그녀는 계속하여 채영을 흔들며 말했다.  

“벌써..? 하.. 잠만 눈만 붙이려고 했는데..” 채영이 얼굴을 찌푸리며 작게 웅얼거렸다. 

“근데 누구세요? 경찰..은 아닌 것 같은데...” 

채영은 의심의 눈초리로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며 말했다. 

“뭐?” 외마디의 외침과 함께 불청객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난 너 누군인줄 몰라, 하지만 분명히 아는 건 하나 있지. 너가 앉아 있는 그 벤치, 주인이 곧 돌아오거든” “공원 벤치에 주인이 어디 있어요?” 채영이 어이없다는 말투로 물었다. 

“그쪽 세계의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벤치는 단순히 들렸다 가는 곳이 아니라 인생을 같이 살아가는 연인이거든. 소중한 연인을 남들과 공유할 순 없잖아?” 그녀가 키득거리면 답했지만 대답 속에는 왠지 모를 무거움이 느껴졌다.  

“그건 그렇고, 너 가출한 거 맞지?”  

“네..”

 채영이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금 집에 돌아가는 거 어때, 가족이 걱정할텐데. 경찰 부를게 경찰차 타고 가.” 

그녀가 공원 끝 쪽에 있는 공중전화부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뇨, 지금은 못 돌아가요. 지금 들어가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될거에요. 하루만, 하루만 더 있다..” 채 영이 전화부스를 가리키던 그녀의 손을 끌어내리며 말했다. 자신을 깨우던 사람을 향해 욕을 뱉던 앙 칼진 여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고 순한 양 같은 눈빛을 한 어린 소녀만 있었다.  

“하.. 어쩔 수 없나.. 거긴 좀 맘에 걸리는데...” 

채영의 눈빛을 본 그녀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읊조렸다. 

“그래 그럼 딱 하루만, 하루만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거다? 알겠지?”

“네, 근데 어디로 가요? 호텔? 모텔? 찜질방?” 채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니? 너 같은 애들을 위한 쉼터가 있어.. 물론 개인이 운영하는 것이긴 하지만 하루만 지낸다면 괜찮을거야.”




둘은 쉼터를 향해 가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채영이 자신의 가출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읊자 그녀는 경청하며 중간중간 -응, -진짜?와 같은 짧은 맞장구를 쳤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채영은 그제서야 자신이 여태 상대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름을 묻자 그녀는 자신을 -노아, 나이는 18살이라고 소개했다. 채영이 특이하다는 반응을 보이자, 노아는 집에서 나온 후 과거의 나와 결별하는 의미에서 스스로 지은 이름이라고, ‘노스탤지아’의 양 끝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채영은 자신과 같이 가출한 사람이 ‘향수병’을 뜻하는 ‘노스탤지아’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 이상했지만 굳이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며 걷자, 그들은 마침내 쉼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쉼터는 오래된 건물 3층에 있었다. 건물의 1층에는 국숫집, 2층에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공장의 사무실 같아보이는 것이 들어와 있었고. 올라가는 계단 입구 유리문에 -3층, 가출 청소년들을 위한 쉼터, 누구나 환영합니다. 라는 문구가 노란색 A4용지에 검은 매직펜으로 쓰여 있을 뿐 그곳이 쉼터라는 것을 알 수 있는 표식은 하나도 없었다.


편으로 이어짐.

작가의 이전글 [No. 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