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일 3시. 시청역 5번 출구 옆 무인보관함 3번에 있는 내 물건을 일주일만 맡아줘. 부탁이야. 비밀번호는 우리 대학교 개교연도.
소식도 없이 사라졌던 그에게 3년 만에 문자가 왔다. 그것도 달랑 한 통.
나의 대학 동기였던 그는 존재감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홀연히 사라지기 일쑤였고 결코 동기들과 밥 한 번을 먹거나 술 한 잔 마시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 과 내에서는 그와 관련된 다양한 소문들이 퍼졌는데, 몇 가지를 굳이 꼽아 말하자면 그가 생긴 것만 어려 보이지 우리보다 나이가 10살은 더 많다던지, 재벌 집 2세에 고급 바와 최고급 와인 애호가여서 막걸리에 파전, 삼겹살에 소주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던지와 같은 소문들이 그 예였다. 하지만 무성한 소문도 한순간이었고 신비주의를 향한 동기들의 관심은 점차 식어갔다.
마침내 다음 해 학기 초, 그의 이름 석 자와 그것에 얽힌 그의 존재감(예컨대 그의 사물함 위치라던지, 그의 패션이라던지, 그가 과제로 진행했던 발표에 대한 소감이라던지.)은 그와 동명이인인, 군 휴학 후 이제 막 복학한 한 선배가 온전히 차지하게 되었다.
나 역시 그를 거의 잊고 그의 이름을 들으면 그가 아닌 선배를 떠올리게 됐을 무렵, 나는 3학년이 됐다. 그 당시 우리들은 슬슬 취업에 대해 생각해야 할 나이가 됐고 취직하면 바빠져 얼굴 볼 시간도 없을 것이라는 핑계로 훗날의 술을 댕겨 마시곤 하였다. 나는 동기들 사이에서 술을 잘 마신다고 소문난 사람이었다.
(사실 여기에는 꼼수가 있는데 소주 한 병 마실 때마다 슬그머니 화장실로 들어가 게워버리는 것이다. 속은 쓰라리지만 술에 훨씬 덜 취한다.)
그날도 마침 동기들과 소주 한 궤짝을 거덜내고(총 다섯 번 토해내야했다.) 집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일어나자마자 속이 너무 쓰려 나는 학교 앞 중국음식점으로 기어갔다. 2500원에 한 그릇이라는 엄청난 가성비는 지갑이 얇은 대학생, 특히 술값이 밥값보다 많이 나오는 대학생들에게 거룩한 은총이었고 사장님은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주문을 하기 위해 사장님을 찾으며 두리번거리던 찰나 나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바로 존재감이 증발해버린, 복학한 선배에게 이름을 뺏긴 ‘그’였다. 이른 시각에 그가 짜장면집에 있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지만 더욱 신기한 일은 뒤이어 일어났다. 멀뚱히 나를 쳐다보던 그가 나를 보고 먼저
–안녕이라고 인사를 건넨 것이었다. 학교 입학 후 처음 듣는 그의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톤이 높았다. 워낙에 과묵했기에 모두가 그가 동굴 같은 저음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아쉽게도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반말과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하지만 친숙한 목소리에 나 또한 반말로 답했다.
그는 나의 황폐한 몰꼴을 아래서부터 위로 훑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 짜장면 한 그릇 사줄까?
그렇게 그와의 기묘한 합석이 시작됐다. 그는 짜장면 두 그릇을 시킨 후 앞에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어색한 정적을 깨고 짜장면이 나오자 그는 곧바로 젓가락을 든 후 짜장면에 올려져 있는 오이들을 빼낸 후 휴지에 돌돌 싼 후 옆으로 치웠다. 그리곤 내 짜장면 위에 있는 오이들 역시 그런 식으로 제거했다. 제거가 끝나자 그는 – 내가 사주는거니까 이 정도는 해도 되지..? 라고 물었다. 나는 허락보다 행동을 먼저하는 그가 너무나 당황스러웠지만 속이 쓰라려 말할 힘도 없었기에 그냥 대충 고개를 끄덕인 후 짜장면을 먹기 시작했다. 3분도 안돼서 짜장면 한 그릇이 사라졌다. 배가 어느 정도 차자 제정신이 돌아온 나는 오이를 싫어하냐고 물었다,
- 아니. 그가 대답했다.
- 그럼? 왜..
- 증오해
- 증오해? 오이를? 왜?
- 오이는 내 존재를 부정해
나는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내성적인 사람이 아니라 그냥 미친 사람이었다. 한낱 식재료인 오이에 증오심을 품는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나에게 그는 구태여 말을 걸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계산을 하고 먼저 나가버렸다. 그 후 난 그를 학교에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린 그는 3년이 지난 후 나에게 뜬금없이, 내용은 더 뜬금없는 문자를 보냈다. 환장할 것만 같았다. 왜? 갑자기? 하필 나? 짜장면 한 그릇 한번 사줬다고 이러는 거야? 잠시 고민 후 나는 그 문자를 삭제했다. 출근,업무.퇴근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가 끝나고 침대에서 눕자 계속하여 그 문자가 마음에 걸렸다.
- 그래. 짜장면 값이야. 이자 쳐서. 혼잣말을 뱉은 후 잠에 들었다.
무인보관함의 두꺼운 자물쇠에 학교의 개교연도인 1955를 맞추자 – 덜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오이 한 개가 들어있었다. 큰 크기, 푸른 초록색, 거친 표면. 잘 자란 오이였다. 유난히 싱싱해 보이긴 했지만 평범한 오이와 다를 게 없었다. 다만 말을 한다는 거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