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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화자 May 10. 2016

글 쓰는 할머니의 오늘 이야기(15)

사십팔년만의 해후

1968년은 거의 오십 년이 지난 옛날이다.

어떻게 수소문을 했는지 그때 춘천 초등학교 3학년 8반 제자 L이 전화를 했다.

옛날 제자들이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름을 듣고 잠깐 어리둥절하다가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사십팔 년 전 소녀가 생각났다.  L의 집은 우리 집과 가까웠다.  “몇 번 선생님 댁에 놀러 간 적도 있어요. 마당이 넓고 꽃이 많았어요. 선생님 동생이 있었지요.”  

 그동안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이 세월은 흘렀다. 48년 전 아이들이 어떻게 변했을까?    

 수화기 저편에서 전해오는 옛날 추억의 조각들이 퍼즐을 맞추듯 하나씩 수수께끼의 열쇠를 풀어가고 있었다.

 L의 어머니는 교육열이 남다르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시던 어머니 회장이고 아버지는 당시 춘천시 산하의 기관장이었다.  L은 노래도 잘 부르고 합창단에 뽑혔었다. 자신만만하고 적극적이었다.  오만하고 도도한 아이였다.

아이들의 자신감에는 어머니의 교육열과 영향력도 얼마쯤은 작용했을 것이다.  사십팔 년이 지났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보고 싶어서 찾았단다. 전화를 받고 3학년 아이들과 그때 교실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억해 보려고 애를 쓰는데 내 외손녀가 지금 초등학교 3학년이다.  

 왜 나를 찾고 싶었을까?  어떤 사연이나 동기가 있을 것이다.  너무 오래전이라서 그동안 내가 변한 것처럼 그들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많이 궁금하다.

 정작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친구는 따로 있단다. “ P가 선생님을 많이 뵙고 싶어 해요.”

 그때도 그랬을 것이고 지금도 난 그렇게 상냥하지는 않다. 따뜻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무 쪽 같이 무덤덤한 선생님을 기억하고 찾고 싶어 한다니... 뭘까?

 L의 설명은 좀 더 계속되었다. “ P 하고는 화해하고 만남도 계속 이어가고 요즘도 친하게 지내고 있지만 그때는 P와 싸운 적이 있었어요.”

 P는 미화 부장이었는데 L이 뺀질거리고 청소도 안 하고 그런저런 사소한 다툼으로 싸웠다. 다음 날 L의 오빠가 P를 화장실에 끌고 가서 때리고 발로 차서 많이 얻어맞았단다. 지금으로 말하면 학교 폭력이었다. 심하게 맞았던 모양이다. L의 어머니는 어머니 회장이었다. P의 어머니는 소극적이었고 폭력에 대해서 항의를 하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에 있었던 억울한 기억이 오래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좋은 기억으로 옛날 담임 선생님을 찾게 된 것은 그 시절에 내가 편견 없이 강직했던 모양이다.  “그때 담임 선생님이시던 선생님께서 사과를 하도록 강력하게 말씀을 하셔서 L의 어머니가 저희 집에 찾아와서 사과하고 그랬어요.” P의 설명이다.

 그 시절의 치맛바람은 대단히 힘이 있었다. 아이들은 예민하다. 모를 것 같지만 다 알고 있다. 강력한 파워를 행사하던 어머니 회장의 사과를 받아 낸 담임 선생님의 강직함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만나고 싶은 것이다.    

 1968년 춘천 초등학교 3학년이던 열 살 아이들은 오십 대 후반이 되었고 스물 몇 살이던 교사는 칠십 대 할머니가 되었다. 그간의 세월이 얼마인가.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이삼일 동안 그 시대의 초등학교 교실과 학교 일들을 영화 필름 되돌리듯 돌려 보느라 밤잠을 설친다.   전쟁 중에 미군이 쓰다가 버리고 간 철제 콘세트 교실은 흙바닥이었다.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웠으며 교실은 어둡고 칠판 글씨는 역광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자리가 있었다.  출근과 함께 학교 교정을 청소하고 오후에 조개탄을 태운 난로 청소를 하는 것은 교사들의 기본 업무였으며 한 학급 육십 명 이상 칠십 명이나 되는 과밀학급에다 교실이 모자라서 한 때는 2부제로 수업을 했었다. 학생들의 위생검사와 혼 분식 장려에 저축 업무 등등.... 교사들의 업무는 실적을 기록으로 남기느라 장부정리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국가의 정책과 경제 발전의 밑바탕이 되는 일들과 국민생활의 위생청결 습관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힘을 보태느라 교사들은 바빴다. 옥수수 죽을 나눠주고 옥수수 빵을 나눠 주기도 했었다. 부끄럽게도 어린아이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전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학교 재정이나 교육재정이 부족해서였을 것이다. 학교의 축대 울타리와 담을 쌓고 운동선수들이 출전을 한다거나 무슨 일이 있으면 찬조금을 걷었다. 어렵게 살던 시절에도 자식들의 교육이라면 열심히 뒷받침을 해주는 학부형들이 많았다. 빈부격차는 아이들 동심에 상처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게다가 스물 몇 살이었던 여교사는 아이들을 낳아 본적도 키워 본 적도 없는 철부지가 아닌가. 내가 학부모가 돼서야 많이 반성하고 자책을 하고 그랬으니까 말이다.  

 참으로 오래전 인연으로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의 만남은 설레 임이었다. 그녀들은 초등학교 졸업 앨범을 스마트 폰에 저장해서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을 소중하게 담고 있었다. 사진을 보면서 옛날 모습이 되살아난다.  오래전에  어리고 귀엽던 소녀들은 어느새 그들도 손녀를 본 할머니가 돼 있다. 남편의 능력으로 멋진 차를 가지고 마당발 여사인 P와 음악을 전공해서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는 L과 국방부에서 군무원으로 근무를 하다가 정년퇴임을 한다는 그녀들의 친구들. 예쁘고 공부 잘하던 누구는 서울의 명문대학에서 간호학을 전공하고 교련교사를 하고 누구는 며느리를 보고 누구는 사위를 본다고 한다. 사업을 하는 친구도 있다. 오십 대 후반이면 인생의 중반부 중년이다. 직장에서는 중견 간부급이다. 대화를 하다가 잠시 멈칫한다. 말을 함부로 놓을 수도 없다. 그렇다고 존칭을 올려 높이면 그들이 어색해할 것이다.

 점심을 약소한 걸로 내가 샀다. 옛날도 아주 옛날 선생님을 찾아 준 고마움의 표시로는 약소하지만 부담 없이 만남에 의미를 두고 싶어서다.  내게 선물을 준비한 것도 고맙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시간을 보내면서 옛날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이 이어진다.  너무 열심히 가르친 의욕 많은 선생님들보다는 인간적으로 따뜻했던 선생님들이 기억에 남는단다. 내가 다시 교단에 선다면 옛날에 부족했던 모든 것을 채워주고 싶으나 이미 물처럼 흘러간 세월을 어쩌겠는가.  부끄럽지 않게 늙어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을 따름이다.  

강직함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꼿꼿하고 곧음이다.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며 쉽게 흔들리지 않고 무게가 있는 사람이다. 썩 좋은 건 아닐 진대 아주 나쁜 것도 아닌 것 같다.

“엄마는 강직하시지요.”라고 딸도 인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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