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 이야기
도 장 이 야 기
오늘도 보물 찾기를 시작한다. 어딘가에 꼭 있을 것 같은 생각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해서 이곳저곳을 뒤지고 찾는다. 도장은 세 개가 얌전히 주머니 안에서 주인인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얘들이 길을 잃고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맨 마지막에 사용한 것이 은행이었다는 것만 확실하다. 늘 가지고 다니는 가방의 지퍼 안쪽 주머니에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무심했다가 며칠 전에야 없어진 걸 알아차렸다. 있을만한 곳은 모두 찾아보았지만 도장주머니는 어디에도 없다. 심심하면 꼭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아서 보물 찾기를 하듯이 도장 찾기를 또 시작한다. 가방과 핸드백과 주머니를 뒤집어 속을 확인하고 서랍과 장롱과 필통을 뒤진다. 주방의 구석구석도 살피고 어딘가에 숨어 있을 만한 구석을 찾고 또 찾는다. 검은색의 큰 도장은 남편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빨간색 중간 크기의 것은 내 이름을 새긴 도장이다. 수십 년 동안 우리 가족을 위해서 내가 책임질 일들에 대해서 약속을 하고 나를 인증하고 인정받고 종이 위에서 나를 대신하던 또 다른 내가 아니던가. 길고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이리저리 부딪치고 시달리느라 홈은 무뎌지고 약간의 쪽이 떨어져 나간 그들의 모양새 또한 나의 주름 진 모습과 닮아가면서 낡고 빛깔은 바래졌으나 나와 함께 한 세월만큼 정이 들었다.
내가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한 것은 스무 살이 채 되기도 전이었으니까 아주 오래전부터 나와 함께 한 도장들이다. 녹두 알 만큼 작은 글씨가 새겨진 콩 도장도 검은색이 바래져 있다. 콩 도장은 서류의 잘못된 부분을 고쳤음을 시인하는 용도로 쓰였다. 모든 글씨는 손 글씨로 쓰던 옛날에 콩 도장은 당당하게 붉은 줄 위에서 잘못된 부분을 고쳤음을 인정받고 책임을 지는 역할을 한몫 단단히 했었다. 다른 방법으로 고치고 지우는 것은 인정을 받지 못해도 틀린 부분을 바로 잡았음에 대해서는 콩 도장을 확실하게 믿어 주었다. 작아서 귀엽다고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도 했다. 창구에 내밀면 은행의 직원들은 ‘아유, 깜찍해라!’ 놀람과 경탄으로 반색을 하였다.
서화(書畫)에는 낙관을 찍는다. 누구의 글씨라든가, 누구의 그림이라고 확실하게 인증한다. 낙관은 여백과의 조화로움으로 멋을 부린다. 자신만의 예술작품에 인증을 하고 조화로움으로 그림과 글씨의 품격을 높인다. 공공기관에서 사용하는 관인과 직인도 책임이 중하다. 나라의 국새는 더욱 중요한 인장이다.
일상생활에서 도장을 쓸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필적으로 사인을 하고 숫자와 암호와 카드가 도장 찍을 일들을 대신하고 있다. 종이 위에 붉은 인주를 꼭꼭 눌러주며 도장 찍던 일을 비밀번호와 본인서명이 대신하고 있다. 온라인 정보 통신망은 통장을 넣으면 비밀번호로 본인을 확인한다. 인증번호나 비밀번호가 확실하게 도장을 대신하고 숫자와 암호가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자신 만의 수결 방법이 서명으로 발전하고 비밀번호가 만능열쇠가 되고 있지만 도장이 꼭 필요할 때가 있었다. 서류를 만들고 중요한 일을 결정하고 법의 보호를 받고 권리를 주장할 때에는 인감도장이라야 한다고 믿었는데 그 일도 요즘은 인감 대신 자필서명 사인을 권하고 있다. 도장과 인감보다 자신의 습관이 새겨지는 필적을 믿어주고 있다.
아직 널리 쓰이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는 공인인증서 폐지를 앞두고 지문(指紋), 홍채(虹彩), 혈관(血管), 얼굴의 생체인식 기술이 뜨고 있다. 생체인식 기술과 지문인식 센서 관련 제품들이 신뢰성과 가격경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인장을 꼭 필요로 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그러고 보니 어느 날, 혼잣말로 “이제 은행 갈 때 도장은 필요 없게 되나 보다.”라고 중얼거렸던 것 같다. “너무 깊이 두면 보이지 않아서 못 찾을 수도 있겠지?”라는 치밀한 생각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앞으로는 점점 더 쓸 일이 없을 것 같은 도장이지만 애착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은 지나간 추억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인 것 같다. 그러니 어느 구석에 얌전히 모셔져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마음을 달래 본다. 내일이 되면 또다시 그들이 어딘가에서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물 찾기는 안 동안 계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