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클럽(1985), 소마이 신지

by 봄눈

아이들끼리 학교에 갇히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학창 시절에 텅 빈 학교에 있으면 굉장한 자유로움을 느꼈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넓은 공간, 조용한 공기,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 바람까지. 평소에 학교가 얼마나 비좁고 숨 막히는 장소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순간이다. 주인공인 7여 명의 아이들이 태풍이 몰려와도 텅 빈 학교에서 집에 가려고 하지 않는 기분이 왠지 이해가 되었다. 그러다가 그 아이들은 태풍이 너무 강해져서 결국 학교에 갇히게 된다.

태풍이 올 때 보통 사람들도 흥분하고, 화를 내고, 좀 소란스러워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 날을 배경으로 주인공 아이들은 금기시되는 행동들을 한다. 80년대의 가족의 문제, 성정체성 문제, 강간 미수, 자살 충동 등, 그 당시 사회의 문제들을 아이들이 한 명씩 대표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이들은 모두 같은 반이지만 분절되어 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연극의 무대에 서 있는 것처럼 연기하는 느낌이 강하다. 이런 과장된 연기와 파편화된 장면은 감독이 일부러 나열하면서 관객이 영화에 빠져들지 못하게 하고, 관객이 영화의 밖에서 생각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 같았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아이들끼리 무대에서 춤을 추다가 더워지니까 교복을 벗어던지고 속옷 바람으로 자유롭게 춤을 추는 상황으로 시작한다. 그러다가 밖에서 쏟아지는 폭우를 보더니 하얀 속옷 바람으로 밖에 나가서 춤을 추는데, 그 상쾌한 공기 속에서 휘젓는 팔다리가 얼마나 시원할까 하는 부러움마저 들었다. 그런데 영화 모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보니, 이런 장면을 찍기 위해서 그 당시 학생 배우들을 착취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f6axl8M1nM4uvaEMBGpx5eZ1IRt.jpg 폭우 속에서 신나게 춤을 추는 아이들

영화가 거의 마지막에 다달아 태풍도 그치고 조용한 아침이 왔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많은 여자아이들이 흠모하는 미카미가 자살을 감행한다. 높은 창문 앞에 올라서서 미카미는 "죽음은 삶의 전제야. 엄숙한 삶은 엄숙한 죽음으로 완성되는 거야. 우리가 엄숙한 삶을 살지 못하는 건 엄숙한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내가 너희들에게 엄숙함 죽음을 보여줄게."라고 말하고 뛰어내린다.

이전 장면에서, 미카미는 형이 '종' 얘기를 할 때, 대답도 안 하고 그냥 나간다. 평소에도 말수가 적고,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으며, 그만큼 자기표현을 안 하는 아이이다. 미카미가 자기 욕구를 많이 억누르는 아이인데 아이들이 일탈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왜 이렇게 타락하는가 하고 속으로 개탄을 했을 수 있다. 그래서 자살을 감행하지만, 멋있고 무게 잡는 미카미가 우스꽝스럽게 죽지도 않는 장면이, '개' 주제에 생과 사를 논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것이라는 의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미카미가 아무리 혼자 진지해도 '개'일뿐 '종'을 벗어날 수 없음을,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개'의 한계를 보여주는, '종'을 벗어나려고 하다가 우스워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wOis85Mrc0WYfYQcnFgOAtRwcaw.jpg 아침이 밝아오자 교실에서 뛰어내리려는 미카미

사실, 미카미가 뛰어내리려는 결심을 한 것이 나는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지 않았으면 모를까, 함께 신나게 뛰어놀고 나서 왜 그랬을까? 신나게 논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던 것일까? 철학의 사고방식에 빗대어보면, 그 부끄러움에서 평소에 하던 죽음에 대한 사유가 증폭된 것이고? 레비나스에 의하면 사유의 시작은 고통이다. 정돈되지 않는 삶을 사는 수학 선생님을 경멸하면서 자신도 정신을 잃고 신나게 놀았다는 것이 스스로에게 몹시 부끄러웠고, 그 부끄러운 감정이 극단적 사유를 불러일으켰을까?

미카미가 말한 '죽음은 삶의 전제이다.'라는 말은 '존재자'는 '존재'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인 것 같다. 이전 장면에서 '개(個)는 종(種)을 벗어날 수 없다.'는 미카미 형의 설명도 레비나스를 생각나게 했다. 죽음은 종이 개를 완전히 정복하는 순간이다.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존재'의 특징이 미카미라는 개체, 즉, '존재자'를 압박하는 순간이 레비나스의 표현대로 '무차별적'이었던 것일까. 미카미의 자살시도는 '향유'가 극에 다달아, '존재의 압박이 존재자를 해체시킬 만큼 위협적인 상황'이 되었기 때문일까? 여기에서 미카미는 무엇을 '향유'했다고 볼 수 있을까?

영화에 나오는 아이들과 사람들은 다 개체들, '존재자'들이다. 미카미와 다르게 다른 이들은 삶을 그저 '향유'한다. 아키라는 적당히 이리저리 구르며, 지며, 분노하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아이는 아키라이다. 학교의 다른 아이들도 이상한 옷을 입으며, 친구들과 사랑을 나누며 생활을 '향유'한다. 영화의 이름도 '클럽'이다. '태풍결사', '태풍가족'처럼 생사를 같이 해야 하는 모임이 아니다. 클럽이란 생계와 관계없이 즐기려고 모이는 사람들 아닌가. 사실 미카미도 자살을 감행하지만 진흙뻘에 빠져서 살아있을 가능성을 가진다. 수학 선생님도 자신을 모욕한 사람들과 즐겁게 술을 마시고, 다른 남자에게 갔던 여자도 다시 받아준다. (영화에서는 여자친구와의 사이에 아이가 있는 것을 암시하는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이것이 '종'을 거스르는 '개'의 자유이다. 언젠가 종은 우리를 삼킬 것이다. 그전까지 평범한 '존재자'들은 '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것이 '태풍'이라는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종'의 특성 속에서도 '개'의 자유를 보여주는 '태풍 클럽'이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은 바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tewpbIoYUbvh1e7jITDkE2IAg3k.jpg 폭우가 쏟아지는 도쿄 거리를 방황하는 리에

이 영화의 가장 문제적 인물은 '켄'이다. '켄'은 타인에게 고통이 되는 방식으로 상대를 좋아하는 미성숙한 아이이다. 좋아하는 여자아이인 미치코의 등에 염산을 넣어서 화상을 입히고, 미치코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을 멀리서 보고만 있다. 또한 자신의 본능적인 추격이 자신이 좋아하는 미치코에게 얼마나 공포가 되는지 가늠하지 못한다. 미치코를 추격을 하면서 켄이 '다녀왔습니다.'라고 반복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켄에게 엄마가 없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좋아하는 미치코에게 하는 것이다. 정서적으로 크게 문제가 있음을 이해하기에는 지나치게 폭력적이다. 남을 괴롭히는 것은 '개'의 자유가 아니다. 자신이 너무 괴로워서 남을 괴롭히는 방식으로 밖에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켄은 어떤 과정을 지나야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면서 '개'의 자유를 누리는 삶에 다를 수 있을까?

영화 토론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 중 하나. 염산 테러를 당한 미치코가 그렇게 쫓김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아이들과 춤을 추고 논다는 설정이, 감독의 생각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고 한다. 그 말씀을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그렇게 쫓김을 당하고 나서 그 공포를 일으킨 인물, 나쁜 의도를 가지고 폭력을 행한 켄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지나갈 수 있는가? 현대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설정이다.

이렇게 폭력적인 영화가 지금 이 시점에 개봉할 수 있는가? 이 영화는 제1회 도쿄 국제 영화제 최우수작 수상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폭력성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영화 토론 모임에서 언급된 <씨네 21> 기사에 따르면, 그 시기는 영화를 실내가 아니라 실외에서 찍기 시작한 시기이고, 그 특징을 이 영화가 가장 잘 담고 있기 때문에도 상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더더욱 이 영화 자체가 대단하다고 받아들여지기보다는, 폭력성에 대한 합당한 주석이 붙어서 개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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