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라캉

발췌한 문장들(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 철학 6)

by 봄눈

자크 라캉의 소유할 수 없는 편지 - 김서영


1) 라캉 이야기

라캉의 입장에서 우리는 어쩌면 인생의 대부분을, 기다리는 편지가 오지 않는 느낌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그래서 라캉은 프로이트로 돌아가야 된다는 입장이었고, '에크리'라는 책 한 권을 썼다. 상상계는 의미를 만드는 순간으로 두 가지 전략을 탄생시킨다. 다른 사람 내부에 있는 어긋남을 가리려는 전략은 히스테리적 전략이고 내 안에 어긋남을 숨기는 전략은 강박적 전략이다. 둘 다 완벽함에 대한 허상을 추구한다. 상상계적 전략을 계속 사용하면 우리는 남 안에 갇히거나 내 안에 갇혀 결국 주체적인 인생을 살 수 없게 된다.

상징계는 어긋남이 있는 세상이다. 언어와 규칙을 따라야 하고 타인의 욕망을 대면해야 된다. 중심은 비어 있으므로 안정될 수 없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정신병은 상징계로의 진입이 실패한 경우로 정의된다. 실제는 상징계 내부의 빈 곳 자체를 말한다. 내부와 외부가 이어진 뫼비우스 띠와 같다. 상상계, 상징계, 실제를 하나로 모으는 개별적 층위를 생톰이라고 부른다. 데리다가 <우편엽서>라는 자신의 책에서 언급한 그림을 보면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시키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라캉은 프로이트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라캉이 프로이트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시키는 게 아닌가라고 데리다는 생각한다. 라캉은 두 가지 방식의 말이 있다고 한다. 텅 빈 상태로 공허하게 하는 말이 빈 말이고, 무의식이 나를 통해 하는 말이 찬 말이다. 무의식이 하는 말은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는 경직되고 의식은 거짓말만 쏟아내게 된다. 이렇게 말을 분석하는 것이 정신 분석의 시작이라고 라캉은 주장한다.

라캉은 모든 것은 기표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기표는 문자라고 불렸는데, 문자는 기표의 보편성이 개별화되는 지점이다. 기표를 분석하면 그것이 실어 나르는 다양한 내용과 무의식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정신분석은 말실수를 많이 하게 만들어서 무의식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하는 치료이다.


jacques-lacan-lexique-bhl-1536x1128.jpg 자크 라캉

2) <도둑맞은 편지> 이야기

편지는 모든 인물들을 움직이면서도 그 자체는 움직이지 않죠. 라캉은 그것을 '실재'라고 불렀어요. 내가 의지를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떤 결정을 하고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와 무관하게 문자에 의해 말해지고 결정되고 배치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라캉은 편지를 중심으로 배치되는 인물들의 지도를 분석해 낸 거예요. p.189


무의식은 우리를 배치하고 결정하고 움직입니다. 라캉은 도둑맞은 편지 분석에서 바로 그 사실을 강조하고 싶은 거예요. p.190


인물들은 편지를 중심으로 이동할 뿐 편지를 영원히 소유하거나 그 자리에 멈추어 영원히 정박할 수 없습니다. 라캉은 이것이 바로 문자 또는 기표와 우리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생각했어요. 문자, 기표는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죠.... 기표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때때로 의미를 만들어 내게 되죠. 하지만 의미가 생성되면 바로 그 순간 다시 위치가 이동되고 이전의 의미는 사라지게 됩니다. p.191


이렇게 성숙하지 못한 위치, 착각하는 위치를 우리는 상상계라고 부를 수 있어요. 그것은 장소라기보다는 순간입니다. 편지를 영원히 소유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이 바로 상상계적 덫입니다. 상상계의 특징은 '척'하는 거예요. 그러나 상상계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우리가 하는 모든 말들은 다 상상계적인 것이니까요. 의미를 만들어내는 모든 순간은 다 상상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p.191


반면 그다음 위치로 이동하는 것, 이미지가 깨지는 것, 어긋나는 것은 상징계적인 특징입니다..... 라캉은 거울 단계에서 자신에 대한 하나의 또렷한 이미지가 형성되며 자아가 생성된다고 설명했어요. 그건 일관성 있는 내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일관성은 그 자체가 허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일관성이란 변하지 않는 무엇을 뜻하는 단어인데 우리의 욕망은 끝없이 우리가 가지지 않은 다른 무엇으로 우리를 이끌잖아요. p.192


라캉 역시 자신의 편지를 부여잡고 그것을 정답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겁니다.... 속이 텅 비어있으면서도 가장 우월한 기표로 등장하기 때문에 그는 남근을 주인 기표라고도 부릅니다. 상징의 차원으로 격상된 남근은 이제 팔루스라고 불리죠.... 라캉은 그 껍데기를 환상이라고 부르고 그렇게 만들어진 기표를 팔루스라고 부릅니다. p.194


그러나 이때 라캉은 편지를 거머쥐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바로 다음 순간 보지 못하는 위치에 배치되죠. p.195


데리다는 여기서 더 나아가 오이디푸스적 숫자인 3보다는 4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해요. 라캉이 해설자를 간과했기 때문에 4를 볼 수 없었고, 분신 모티브를 간과했기 때문에 2를 볼 수 없었다고 하면서요.....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삼각형들 속에서 어느 누구도 편지를 소유할 수는 없답니다. 인물들이 모두 간절히 원하는 편지는 라캉의 개념 중 대상 a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고 손에 넣게 되면 바로 오물로 변해버리는 환상 대상이죠..... 대상 a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 대상이며, 인물들이 편지를 소원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편지를 대상 a로도 볼 수 있습니다. 주체의 의지를 넘어서 주체를 배치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기표의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p.196


후기 세미나에서 라캉은 문자를 더욱 강조합니다.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징계 속에서 주체의 고유한 세상을 만들고 그 세상의 일관성을 부여하는 것이 문자이기 때문이죠..... 당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라캉의 말은 또 무슨 뜻인가요? p.197


3) 욕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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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도식은 자아와 소타자의 이자 관계가 대타자에 의해 파괴되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것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이행하는 주체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햄릿)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는 정신분석의 종결에 이르러 발언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죠. p.198


욕망의 그래프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아랫부분은 의미의 그래프이고, 윗부분은 욕망의 그래프인데 욕망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상위 그래프는 의미의 그래프를 다시 만나야 합니다. 의미의 그래프는 우리가 기표들을 모아 이야기를 전달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A는 기표의 모음이라고 보면 되고 SA는 기표들이 모여 하나의 문장이 되고 주체가 드디어 의미를 만들어내는 순간을 말합니다. p.199


그런데 내가 만든 의미는 사실 타자들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어요. 우리 마음속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타자. 우리가 동일시하는 타자 즉 IA가 그래프 아랫부분 하단에 연결되어 있죠. 이때 의미를 만들어내는 조금 쉬운 지름길이 있어요. 기표의 연쇄 아래 M moi과 이상적 자아 IA를 잇는 선이 있죠. 그게 바로 상상계적 영역입니다.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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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는 의미를 고착시키죠. 그런데 과연 내가 한 말이 하나의 의미로 고착될 수 있을까요? 편지를 소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라캉의 말은 하나의 의미, 유일한 정답을 찾는 게 가능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속에 있는 말을 100%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해요. 말은 불완전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충분히 전달하지 못해요.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 마음이 원하는 것을 100%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라캉은 이러한 이유로 주체를 빗금 그어 버립니다. 주체는 정답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타자도 마찬가지죠. 아무도 정답을 몰라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중요한 부품 하나가 빠진 채 설계된 미완성작입니다. p.200


상위 그래프를 만드는 것은 욕망에 대한 질문입니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뭐지? 또는 타자가 나로부터 원하는 게 뭐지 라는 질문은 상징계에 어긋남을 경험해야만 가능해지는 질문들입니다. 뭔가 빠져 있기 때문에 무엇인가 부족하기 때문에 질문을 하게 되는 거예요. 늘 내게 만족하지 못한 어머니는 나로부터 무엇을 원하는 걸까요? '더더더더...' 내가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욕망 역시 타자와의 게임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의 끝에서 우리는 타자 역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라캉은 그것을 SA라고 썼죠. 이것은 타자 속의 결여를 나타내는 기표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내 마음대로 살면 됩니다. 내 마음이란 게 뭘까요? 그건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겁니다. 그 자리가 비어 있으니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거죠. 정답이 없다는 건 무한한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나도 타자도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축복인 셈이에요.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니까요. 대신 우리는 그 대가를 지불해야 됩니다. 그건 바로 불안이죠.... 언젠가 우리가 편지를 소유했던 적이 있었을까요? 굉장히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었고, 그걸 거세당한 거잖아요. 이런 생각 때문에 우리는 자연이 완전하고 온전한 하나 됨을 가정하게 됩니다. 그건 바로 어머니와의 합일이에요. p.201


우리는 정말 뭐든 할 수 있죠. 이제 관건은 우리가 어떻게 충동과 욕망과 무의식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주인공이 되느냐입니다. 내가 그것이 있던 곳에 설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충동의 동력을 이용하여 내 욕망을 추구할 수 있게 되겠죠. 만약 이 게임에서 진다면 우리는 남 안에 갇히거나 내 안에 묻혀서 무시무시한 에너지에 짓눌린 채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서사를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건 누군가가 써 주는 게 아니에요. 나를 성장시키고 보호해 주는 서사, 그것이 바로 환상의 역할입니다. p.202


아무것도 없는 곳에 이야기가 생기는 거죠. 환상은 거세된 주체와 대상 알파의 관계 SA로 표현됩니다. 무시무시한 결여를 견딜 만한 것으로 바꾸는 것이 바로 환상이죠. p.203


표 아랫부분에 상상계적 영역은 의식의 거짓 언어로 구성되지만 윗부분에 있는 환상 서사는 무의식의 진실된 언어로 구성됩니다. 물론 이것이 다시 하위 그래프를 만나고 '나는 무엇 무엇을 원한다.'라는 주체의 말로 발화되어야만 하겠죠. p.203


이건 상상계, 상징계, 실재가 결코 분리될 수 없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라캉은 3개의 원이 하나로 묶여 있는 보로메오 매듭(Borromean Knot)을 우리 마음의 모형으로 제시해요. p.203


라캉은 안티고네의 예를 들어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주체의 이야기를 들려줬죠. 편지를 잡을 수 없다는 말은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듯한 좌절의 순간에도 우리 몸의 게임은 결코 쉽게 끝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 순간 자체가 우리를 멈추게 만드는 상상계적인 덫이에요. 우울 역시 마찬가지죠. 상실, 자기 징벌, 모두 우리를 그 자리에 멈추게 합니다..... 증상이란 의미가 고착되어 우리의 시간이 멈출 때 나타나는 거예요. 정신분석은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구성함으로써 그러한 증상을 벗어나게 만드는 기법입니다. p.204


4를 3보다 중시했던 데리다처럼 그는 이제 보로메오 매듭이 4개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매듭의 이름이 바로 생톰이에요. 생톰은 세 개의 원을 이어내는 네 번째 원으로서, 이것은 상징계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주체의 실재적 가능성을 뜻합니다. p.205


라캉은 개별적 주체들이 생톰을 축으로로 삼아 고유한 세상을 만들어내는 의미 생산 과정을 자아의 글쓰기라고 불렀어요. 이 부분에 자아가 나오네요. 그런데 라캉이 자아 심리학자들을 비판할 때는 자아를 moi로 표기했었답니다. 지금은 ego라고 쓰죠. 즉 ego는 의미를 만드는 또 다른 차원을 뜻합니다. 그것은 허상이 아니에요. ego는 자신만의 세상을 빚어낼 수 있는 주체들의 자기실현 과정이죠.... 개별적 세상, 내 방식, 나를 드러내는 삶, 바로 그것이 라캉 / 프로이트 정신분석이 궁극적으로 꿈꾼 세상이었죠. 그 세상은 문자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상징계적이기보다는 실제적이겠죠. 바로 이렇게 라캉의 편지 이야기가 역전됩니다. 배치당하던 주체가 이제 문자가 되어 버리는 거죠. 이제는 더 이상 편지를 소유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나 자신이 편지가 되어 버렸으니까요. 이렇게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겁니다. 라캉은 그것을 '글쓰기'라고 불러요. p.205


왜 사람들은 실낙원이라는 개념을 모두 마음속에 품고 있을까? 왜 이전에는 없었던 낙원이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었는데 잃어버린 낙원을 상정하며 산다고들 여길까? 원래 내 것이었는데 지금은 아닌 것에 대한 아쉬움이 새로운 좋은 것에 대한 바람보다 더 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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