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단상(1977), 롤랑 바르트

발췌한 문장들

by 봄눈

죽음을 사랑하는 걸까? 키츠의 말처럼 반쯤은 그런 마음도 있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말일까?(편안한 죽음을 반쯤은 사랑했거니(half in love with easeful death), 죽는 것으로부터 해방된 죽음, 나는 이런 환상을 해 본다. p.32


이런 종류의 사랑은 존속 가능성이 없다고 누군가는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존속 가능성을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어찌하여 존속 가능성인 것이 선이란 말인가? 왜 지속되는 것이 타오르는 것보다 더 낫단 말인가? p.50


오늘 저녁 나는 혼자 호텔에 돌아왔다. 그 사람은 밤늦게 들어온다고 했다. 고뇌는 이미 저기 준비된 독약 (질투, 버려짐, 불안) 마냥 놓여 있다. 그것은 적절하게 공표되기 위해 약간의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다. p.59

이 문장은 자신의 감정을 마치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처럼 서술한 것이 재미있어서 옮겼다.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의 여유랄까. 자신의 마음을 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내 마음이 뭔지 파악이 잘 안 된다. 어렴풋이라도 파악이 된 다음에는 '재밌어, 슬퍼, 힘들어, 짜증 나, 화가 나.'와 같은 매우 평범한 언어로밖에 표현이 안된다. 그리고 사실 이런 감정 단어들은 그 의미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르는 단어들이다. 그러니 마음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그러다 어느 날인가 그 사람을 정말로 단념해야 하는 날이 오면 그때 나를 사로잡는 격렬한 장례는 바로 상상계의 장례이다. 그것은 하나의 소중한 구조였으며, 나는 그이/그녀를 잃어버려서 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는 것이다. p.62

내가 사랑하고 또 나를 매혹시키는 그 사람은 아토포스이다. 나는 그를 분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내 욕망의 특이함에 기적적으로 부응하러 온 유일한 독특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상투적인 것 (타인들의 진실)에도 포함될 수 없는 내 진실의 형상이다. p.67

(그리스어 토포스에 접두사 a는 결여, 부정을 나타낸다. 토포스(topos)는 장소라는 뜻이다.)

너무나 사랑하는 애인이 있는 사람이라도 사랑이라는 감정은 24시간 365일 느껴지는 것이 아님을 잘 인지하고 있는 작가가, 한 순간 찰나에 스쳐 지나가서, 자기 자신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는, 그 순간을 낚아채서 책 한 권을 썼다. 그건 거의 일상의 모든 순간을 책을 쓰겠다는 일념에 매달려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마야란 고대 인도 철학의 중요 개념 중에 하나로 실제를 감출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지를 유발시키는 환영이나 허위로 충만된 물질계 또는 외관을 지칭하는 말이다. p.68


nse-527354912456397694-1000010825.jpg


그 사람은 내가 기다리는 거기에서, 내가 이미 그를 만들어 낸 바로 거기에서 온다. 그리하여 만약 그가 오지 않으면, 나는 그를 환각 한다. 기다림은 정신착란이다. p.73


기다리게 하는 것, 그것은 모든 권력의 변함없는 특권이요, 인류의 오래된 소일거리이다. p.75


바슐리에의 편지에서 그 사람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일 때문에 내가 울었다고 가정해 보자.(눈물을 흘리는 것은 사랑하는 육체의 정상적인 활동이다.) p.79


왜냐하면 시스템이란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서 자기 자리(비록 그 자리가 좋은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를 차지하는 한 전체이기 때문이다. 남편, 정부, 3인조 아웃사이더들(바람둥이, 마약중독자)조차도 그들의 여백 속에서 잘 자리 잡고 있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여기 한 무리가 있다. 아이들 숫자보다 하나가 모자란 만큼은 의자들이 놓여 있다. 부인이 피아노를 치는 동안 아이들은 빙빙 돌다 부인이 피아노를 멈추며 각자 의자에 달려가 앉는다. 가장 서투르고 덜 난폭한, 혹은 재수 없는 아이만이 홀로 멍청하게 여분인 채로 서 있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p.83


안착하고자 하는 것은 평생 동안 온순하게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을 얻고자 함이다. 받침대로서의 구조는 욕망과는 분리된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단지 고급 창녀나 창부처럼 '부양받고자' 하는 것이다. p.84

사랑과 사랑 주변에 대한 다양한 단상을 떠오르는 순간 잠자리채로 낚아채듯이 쓴 문장들이 가득한 이 책은 때때로 그 문화가 사람들 마음속에 깊이 숨겨놓은 생각들을 드러나게 한다.(사람들 자신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생각들이다.) '안착'이라 함은 고급 창녀나 창부처럼은 아니더라도 '부양받고자 함'이다. '안착'이라는 유포미즘을 걷어내고 욕망의 실제를 서술했다. 즉, '부양'받고자 하는 '욕심'과 '사랑'이라는 개념을 떼어놓은 문장이다. 부양과 사랑을 '평생 함께하고 싶다'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포장하는 우리는 자신의 속마음을 정말 잘 알고 있을까.


나는 양자택일의 두 가지 사이로 끼어들려 한다네. 다시 말해 "난 아무 희망도 없다네. 그렇지만..." 또는 "나는 선택하지 않는 것을 완강하게 선택한다네. 난 표류를 선택한다네. 그래서 계속한다네." p.104


나뭇결을 찾기 위해서는 못을 박아보고 그것이 잘 박히는지 아닌지를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 (목수가 아니라면) 네 진귀한 점들을 찾기 위해서도 이런 못과 흡사한 도구가 있으니 그것이 곧 농담이다. 나는 농담을 잘 견디지 못한다....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는 아이 (몽상가)는 장난꾸러기가 아니다. 나 역시 놀이에는 닫혀 있다. 놀이는 끊임없이 내 진귀한 점들을 건드릴 위험이 있으며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그 모든 곳이 내게는 불길해 보인다. 사람들은 나를 화나게 하거나 민감하게 만들지 않고는 놀려댈 수 없다. 아니 차라리 몇몇 나뭇결처럼 연하고 무너지기 쉽게 만든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p.150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지 않으며,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이 결코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게 하지 않으며, 글쓰기는 그 어떤 것도 보상하거나 승화하지 않으며, 글쓰기는 당신이 없는 바로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곧 글쓰기의 시작이다. p.157


그렇지만 이 유아적인 포옹 한가운데서도 생식기적인 것은 어쩔 수 없이 솟아올라 근친상간적인 포옹의 그 분산된 관능을 차단한다. 그러면 욕망의 논리가 다시 작동하고 소유의 의지가 되돌아오며 어른이 아이 위에 이중 인쇄된다. 나는 모성적인 것과 생식기적인 것을 원하는 동시에 두 명의 주체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어린 에로스가 그랬던 것처럼 발기된 아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p.163


그리하여 나는 미지의 누군가를,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남아 있을 누군가를 열광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p.206


누구를 원해야 할지 가르쳐 주세요. 그리고 로테 역시 베르테르가 그녀를 보기 전에 이미 가리켜졌다. 무도회로 가는 마차 안에서 한 친절한 여자친구가 로테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말해 주었던 것이다. 이렇듯 사랑을 받게 될 몸은 그것에 가까이 접근시키고 확대하여 주체로 하여금 코를 갖다 대게 하는 일종의 줌 효과를 내는 카메라 렌즈에 의해 미리 포착되고 조정된다. 그것은 어떤 능숙한 손길이 내 앞에서 어른거리게 하다. 나를 최면시키고 사로잡는 그런 반짝이는 물건이 아닐까? 이런 감정적인 전염은, 이 귀납은 타인, 언어, 책, 친구들로부터 온다. 독창적인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p.208


우수ㅡ 소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무엇인가가 결핍되었다고 느끼는 사랑의 욕망의 미묘한 상태

사티로스는 말한다. 나는 내 욕망이 즉각적으로 충족될 수 있기를 바라며 잠든 얼굴 벌려진 입술, 늘어뜨려진 팔을 보면 그 위로 내 몸을 덮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즉각의 형상인 사티로스는 우수와는 반대된다. 우수에서의 나는 다만 기다릴 뿐이다. 나는 당신을 욕망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p.237


사랑하는 사람은 갑자기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속박의 사슬로 얽어맨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 자신이 가련한 사람이 아닌 괴물 같은 사람이라고 느낀다. p.251


새로운 도덕관이란 이름 하에 사랑의 감상적인 성격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모두 순진하다. "현대인이 정신의 두드러진 특징은 거짓말이 아니라 거짓 도덕관 안에 구현된 순진함이다. 이런 순진함을 도처에서 발견하는 것 그것이 우리 작업 중 가장 혐오감 어린 부분인지도 모른다." p.267


시대착오적인 것은 모두 외설이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신성처럼 역사 또한 억압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비실제적 위기를 금지한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그 유적 기념물 저속한 예술품 혹은 복고풍의 재미있는 것만을 용납한다. 과거를 단지 그 서명으로만 환원시킨다. 사랑의 감정은 유행에 뒤진 것이지만 이제 이 유행에 뒤진 것은 구경거리조차 될 수 없다. 사랑은 관심 있는 것의 시간 밖으로 추락한다. 그리하여 어떤 역사적인 논쟁적인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다. 바로 그런 점에서 사랑이 외설적이다. p.269


어떻게 역사와 전형 타입은 결합되는 걸까? 역사의 비실재성을 표명하거나 설정하는 일은 전형의 일이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 그 자체 안에서 우리 사회는 그 자신의 비실재성을 억압하며 그 억압이 사회의 건강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이유로 눈물을 흘리는 연인을 잊혀진 대상으로 만드는 게 아닐까. p.274


그리하여 어느 날인가 나는 내게 일어났던 일을 마침내 이해하게 된다.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실은 사랑받는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괴로워했던 것이다. 나는 동시에 사랑을 받고 또 버림을 받았다고 믿는 그런 복잡한 상황 속에 살아왔던 것이다. 나의 이 내밀한 언어를 듣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ㅡ마치 까다로운 아이에게 그러하듯이 ㅡ그가 원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죠?라고 소리 지르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p.282


주체란 우리에게 괴로워하는 자를 의미하며 그러므로 상처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체가 존재한다는....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육체의 중심부 심장까지 주체는 더욱 주체가 된다. 왜냐하면 주체란 내면성 그 자체이기에 상처란 무시무시한 내면성이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상처이다. 닫혀지지 않는 근본적인 열림, 존재의 뿌리까지 바로 거기서 주체가 흘러나오며 이 유출 속에서 그는 자신을 주체로 설정한다. p.284


이렇듯 나를 매혹하고 황홀케 하는 것은 어떤 상황 속에 있는 육체의 이미지이다. 내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작업하는 모습이 나를 흥분케 한다. 늑대인간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 젊은 하녀 그루샤도 무릎을 꿇고 마루를 닫고 있었다. 작업 중의 자세란 어떻게 보면 이미지의 순진성을 보장하는 것이기에 그 사람이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모습 혹은 그의 무관심의 기호를 보내면 보낼수록 나는 더 확실히 그를 놀라게 할 수 있으며, 그것은 마치 사랑하기 위해서는 기습과도 같은 고대의 유괴 양식을 감행해야 한다는 것과도 같다. p.291


영웅, 주인공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마지막 결정적 발언을 하는 사람이 아닐까? 죽기 전에 말하지 않는 영웅 주인공이랑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지막 말을 포기하는 것은 언쟁을 거부하는 것은 반영주의적 도덕관과 관계된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도덕관이다. 요구된 희생이 끝날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p.313


나는 그 사람이 끈질기게 지속되는 것을 보면서 그 사람은 내가 부딪히게 되는 완강함 그 자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그 사람을 움직이게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놀라며 내가 무엇을 하든 간에 그를 위해 무엇을 소비하든 간에 그는 결코 자신의 시스템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에 당황해야 한다. p.330


또는 그대로란 친구가 아닐까? 이미지가 손상되는 일이 없이 잠시 멀어지는 그런 친구가 우리는 친구였지만 이제는 서로 낯선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건 잘 된 일이다. 그런 사실에 수치심이라도 느낀다는 듯 그 사실을 감추거나 얼버무릴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갈길과 목적지를 가진 두 척의 배이다. 오다가다 길을 마주칠 수도 있고 예전에 우리가 했던 것처럼 함께 축제를 벌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그 배들은 나란히 똑같은 태양 아래 똑같은 항구에서 너무도 조용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어 이미 목적지에 도달한 것처럼 또 동일한 목적지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임무가 다시 우리를 불러 각자 다른 바다 위로 다른 해역으로 다른 태양 아래로 멀어지게 한다.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다시는 못 만나게 될 것이다. 또는 다시 만난다 해도 서로를 더 이상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다른 바다와 다른 태양이 우리를 변하게 했을 것이므로. p.334


예전에 완전한 것을 그리워하고 욕망하는 마음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이 완전한 것의 형 형상인 남녀양성겸유자의 모습을 나는 그릴 수가 없다. 기껏해야 괴물 같은 흉측한 있음 직하지 않은 그런 육체만이 떠오를 뿐. p.339


진실 -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느끼는 '진실의 감정'과 관련된 모든 언어의 에피소드 그런데 이런 느낌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일을 자신만이 '그 진실 속에서' 파악한다고 믿거나 아니면 자신의 특이한 요구를 마치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진실로 정의하려는 데에서 비롯된다. p.343


세상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나는 이의적이라 생각하며 세상의 광기, 환상, 실수라고 하는 것을 나는 진실로 여긴다. 이상하게도 이런 진실의 감정이 자리 잡으러 오는 곳은 속임수의 가장 밑바닥에서이다. p.344


소유의 의지 -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관계의 어려움이 사랑하는 일을 이런저런 방법으로 전유하려는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이후부터는 그에 대한 모든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p.347


그러므로 욕망은 여전히 다음과 같은 위험한 움직임으로 비소유의 의지를 적셔 놓는다. 내 머릿속에는 사랑해요라는 말이 떠오르지만 나는 그 말을 입 안에 가두어 발화하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나의 그 사람이 아닌 또는 아직은 나의 그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 침묵 속에서 말한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자제하고 있다고. p.350


더 이상 기도하지 말고 찬미하라. p.350


이에 대해 바르트는 우연하고도 하찮은 기회에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를 스쳐가는 그 미세한 움직임들은 불연속적이고도 분산된 언어의 파편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언어의 소유의 그 근본적인 불연속성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단상이라는 형식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바로 그런 점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일종의 미치광이인 셈이며 이런 분산된, 분열된 언어는 결코 잘 조직되고 구성된 사랑 이야기로 소설로 승화될 수 없는 운명을 지닌 것이다. 그것은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는 단편적인 언어의 폭발일 뿐이다.... 왜냐하면 글을 쓴다는 것 또는 읽는다는 것은 사랑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결합에의 꿈을 실현시키기 때문이다. p.356


keyword
작가의 이전글롤랑 바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