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 철학 5(요약과 단상)
같은 맥락에서 그가 쓴 '사랑의 단상'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해석해 내는 여러 기호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다. 사랑이야말로 기호로 가득 차 있을테니 가장 분석하기 좋은 상황인 것 같다. 그래서 그 책에서는 기다림, 고독, 신체 접촉 등등의 기호를 자유롭게 해석해내려고 한다. 정해진 해석 규범에서 벗어나서, 문화적으로 다양한 텍스트를 인용하며, 기호의 의미는 실제적이고 자유로운 소통에 의해서 서로에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기호라는 개념의 탄생은 현대 도시생활을 바탕으로만 생성될 수 있는 것 같다. 도시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 부족 사회에서는 기호가 필요 없었을 것 같다. 3대를 걸쳐서 서로 다 잘 아는 마을에서 기호라는 것은 없어도 의사소통이 됐을 것 같다. 그런데 생판 모르는 타인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도시 생활에서는 서로 어디서 왔는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런 인간 집단 속에서는 기호가 발생하고 기호를 해석해야 되는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더 나아가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호를 일괄적으로 대량 생산하고, 모든 사람이 똑같이 그 기호를 해석하도록 강요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조정하는지도 모른다. 권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조정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호의 해석이 더 중요해져야하는지도 모르겠다.
바르트의 삶을 먼저 살펴보는 이유는 바르트는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의 변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 바르트의 생애
바르트는 1살이 되기 전에 해군인 아버지를 여의고 고향인 바욘에서, 할머니 등 3명의 여자 품에서 자라난다. 19살에 폐결핵이 발병하여 공부를 하지 못하고 수년간 치료한다. 그래서 학문의 정식 루트를 밟지 못하고, 1976년 62살에 동성 파트너인 푸코의 추천으로 처음으로 교수가 된다. 그러나 1977년에 몹시 사랑하던 어머니가 사망하고 나서 1980년에 트럭에 치인 상처를 치료하지 않아 자살과 같은 죽음로 생을 마감한다. 바르트는 사진 이미지에 대해 스투디움과 푼쿠툼으로 나누는데, 푼크툼은 사진 이미지를 문화 체계에서 벗어나서 육체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2) 바르트의 육체적 삶
서구 정신사에서는 아버지로 대표되는 중심 개념과 주변부 사이의 권력적 형식을 중요시여긴다. 유일신 종교인 유대교에서도 신과 인간의 관계 등 중심과 주변부 간의 관계를 고찰한다. 포스트 모더니즘과 후기 구조주의 등과 마찬가지로 바르트도 이러한 중심을 해체하려고 한다.
바르트의 어머니는 선함과 엄격함이 화해를 이룬 양가성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의 고향인 바욘은 독자적이고 단자적인 존재이면서 사방으로 열려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 그리고 바욘으로 가는 산길에서 감각적 교류를 통해서 감각의 총체인 자기 자신의 육체를 만나는 경험을 중요시한다. 이러한 경험을 유희라고 하기도 하고, 그 대신 모험이라는 단어도 사용한다. 여행은 목적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는데 바르트에게 중요한 것은 목적이 없는 여행, 즉 여행속에서 예기치 않게 새로운 것과 만나는 과정을 중요시한다. 이를 모험의 즐거움이라고 한다. 독서도 여행과 마찬가지로 무목적적인 독서, 즐거움과 유희를 위한 독서를 중요시한다. 왜냐하면 독서는 욕망의 대상이 없고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에, 독서는 즐거움과 관능, 그리고 사회적으로 구축된 코드 체계를 이탈하는 경험이 되는 것이다.
바르트는 병이 있어서 오히려 기민한 변신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 변신을 통해서 바르트는 비판적 지식과 이론마저도 상품으로 바꾸어 유행시키는 자본주의적 문화 시장에 대응했다. 또한 바르트에게 동성애 성 정체성은 성적 영역이라는 내밀한 영역을 정상과 비정상의 도덕적 이분법으로 폭력화하는 부르주아 문화의 도덕적 폭력에 맞서는 것이었고, 무목적적인 성애가 제도화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수 있는 부드러운 영역으로 여겨져서 그 안에 머무르고자 했다.
바르트는 쁘띠부르주아적인 문화를 코드시스템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인간은 기호적 인간, 즉 대상과 자신 사이의 기호를 생산해서 그 의미를 상호 소통하는 존재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근대 사회는 이러한 기호를 동일한 의미의 확대 재생산이 되는 코드 시스템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자유롭게 기호의 의미를 생성해낼 수 없게 만든다. 기호의 의미가 욕망과 자유의 표현이 아니라 지배와 권력을 나타낼 뿐이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기호 시스템을 전복시키는 탈코드적 행위를 주장했다.
3) 바르트의 지성적 삶
바르트의 지적이고 공적인 영역을 살펴보면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 첫 단계는 테러리스트의 시기로 일상 문화의 영역들이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처럼 위장되어 변화 자체가 불가능한 영역으로 고착되는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고 해체하려고 했다. 두 번째 단계는 기호 시스템의 도취 시기로 기호 체제를 비판하기 보다는 분류하고 구축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행위와 작업을 수행하는 시기였다. 마지막 단계는 기호와의 유희시기로 에고이스트의 단계라고 명명된다. 육체성이 드러나는 표현의 언어를 글쓰기의 언어로 구사한 텍스트들이 태어나며 ‘기호의 제국’, ‘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등 욕망의 독서와 글쓰기가 실천적으로 수행되는 시기이다.
이 세 단계 외에도 어머니의 죽음을 분기점으로 해서 크게 2개의 단계가 더 있다. 앞의 세 단계는 욕망과 즐거움에 관한 것이었다면, 뒤의 두 단계에서는 죽음, 연민, 애도 등의 테마를 다룬다. 그의 특유의 존재론적 사진론인 ‘밝은 방’에서는 푼크툼의 경험을 주객전도의 경험으로 특징짓는다. ‘애도 일기’에서도 푼크툼은 주체성을 붕괴시키는 순간의 문장들이며, 따라서 종이 위에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니라 문장들이 바르트의 육체 위에 기록되어 남겨진다는 것이다. ‘밝은 방’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애도에 성공해서 어머니를 좋은 기억으로 남길 수 있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바르트가 교통사고의 상처를 치료하지 않아서 죽게되면서, 그의 죽음이 자살로 여겨지고, 그의 자살이 ‘애도 일기’에서 어머니에 대한 애도가 성공하지 못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게 되었다.
바르트에게 인간은 대상과 자기 사이에 기호를 생산해서 의미를 소통하는 기호적 인간이다. 기호와 의미가 생산되는 데는 고정된 규범 즉 코드가 없다. 기호는 대상과 인간 사이에서 욕망관계를 따라 생성될 뿐이다. 이렇게 기호행위의 의미 생성의 자유를 회복하려는 것이 탈코드적 행위, 사랑의 담론 등이다. 코드 시스템을 벗어나서 욕망과 자유로서의 기호의 의미를 그려내려한다. p.165
같은 맥락에서 그가 쓴 '사랑의 단상'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해석해 내는 여러 기호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다. 사랑이야말로 기호로 가득 차 있을테니 가장 분석하기 좋은 상황인 것 같다. 그래서 그 책에서는 기다림, 고독, 신체 접촉 등등의 기호를 자유롭게 해석해내려고 한다. 정해진 해석 규범에서 벗어나서, 문화적으로 다양한 텍스트를 인용하며, 기호의 의미는 실제적이고 자유로운 소통에 의해서 서로에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기호라는 개념의 탄생은 현대 도시생활을 바탕으로만 생성될 수 있는 것 같다. 도시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 부족 사회에서는 기호가 필요 없었을 것 같다. 3대를 걸쳐서 서로 다 잘 아는 마을에서 기호라는 것은 없어도 의사소통이 됐을 것 같다. 그런데 생판 모르는 타인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도시 생활에서는 서로 어디서 왔는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런 인간 집단 속에서는 기호가 발생하고 기호를 해석해야 되는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더 나아가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호를 일괄적으로 대량 생산하고, 모든 사람이 똑같이 그 기호를 해석하도록 강요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조정하는지도 모른다. 권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조정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호의 해석이 더 중요해져야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