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블랑쇼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 철학 4(요약과 단상)

by 봄눈

1. 모리스 블랑쇼의 삶과 관련 저서


블랑쇼는 1907년에 태어나서 2003년에 작고했다. 1930년대 극우 신문에 투고했고, 2차 세계 대전 중 강제 수용소로 이송될 뻔한 레비나스의 가족을 숨겨주었다. 1968년 파리 68 혁명에서 '학생-작가 행동위원회'의 선언문을 거의 다 쓰다시피 했는데, 반시오니즘 때문에 행동위원회를 탈퇴한 후에는 2003년에 죽을 때까지 전혀 공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 또한 블랑쇼는 자신의 친구였던 레비나스와 바타유 외에는 어떤 철학자도 인용하지 않았다.

블랑쇼의 저서인 <문학의 공간(1955)>은 이해하기 굉장히 어렵다고 한다. 그리고 <무한한 대화(1969)>에서는 언어의 본질, 서술하는 목소리를 설명하고 있다. 정치란 서로 말을 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것인데, 경제 문제로서 정치라는 것의 존재를 없애버리려는 사회에 반대했다. 또한, <The Instant of My Death>라는 글은 자신이 독일군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가 레지스탕스 덕에 살게 된 순간에 대해서 쓴 글인데, 사실을 쓴 것인지 사실과 환상을 섞어서 쓴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울리히 하세가 지은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2008)>의 4장에서 여러 철학자들의 죽음에 대한 의견을 서술하고 있다. 레비나스의 말하기와 블랑쇼의 말하기를 비교하는 내용도 있다. 박준상 저서인 <바깥에서(2006)>도 블랑쇼에 관한 책이다.

ps.

도덕 - 개인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

윤리 - 커다란 바퀴(사회)를 굴러가게 하기 위한 것

모리스 블랑쇼

2. 모리스 블랑쇼의 중성과 글쓰기, 역동적 파노라마 - 김성하


1) 블랑쇼의 삶과 철학적 사유

블랑쇼는 수술의 후유증으로 병이 있어서 몸이 약했고, 실제 삶에서의 사유를 그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글을 썼다. 그의 글은 나약하고 소극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강한 의지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삶'을 나타내려 했다. 나약하면서 나약하지 않고, 강인하지 않으면서도 강인한 상태가 그의 사상적 주제인 중성(le neutre)을 의미한다. 중성은 역설적이며 모순되고 불분명한 상태에서 솟아나는 역동성이다.


2) 무한의 관계

그는 '사유하다'와 '철학하다'를 구분하는데, 그에게 있어 개념화라는 것은 폐쇄와 정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 '사유하다'와 '철학하다'를 개념화하지는 않는다.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언어를 사용하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의식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것이다. 철학하는 것은 복잡하고 학문적인 단어나 지식으로 형성을 한 개념을 사용하는 논리적 언어 행위이다. 가르치는 것은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한 상호관계로 설정되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선생과 학생은 이러한 말과 생각을 통해서 무한의 관계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일방적 구조는 철학자가 학생한테 지식을 일방적으로 분명하게 개념으로 전달하는 것이고, 무한의 관계는 학생과 선생님이 서로 말을 하면서 미지, 즉 알 수 없는 것으로 빠져드는 것을 말한다. 블랑쇼는 확립된 지식을 거부한다. 블랑쇼에게 철학이라 함은 정답이 없는 물음의 연속이며, 물음은 생각을 하는 것일 뿐이지 생각의 결과와 목적과 정답을 찾는 것은 아니다.


3) 레비나스, 바타유 그리고 블랑쇼

블랑쇼는 레비나스를 만나서 독일 현상학을 알게 되었다. 또한 바타유는 블랑쇼와는 반대로 술과 러시안 룰렛 게임을 즐기는 과격하고 파격적인 삶을 살았지만 블랑쇼와 서로 동경하며 죽음, 신, 자아, 공동체에 대해 사상적 교류를 했다. 블랑쇼는 의식과 반성에 의해 추상화되는 개념을 거부했고, 사유의 주제들을 자신의 삶과 분리시키지 않았다.


4) 살아있는 사유

블랑쇼에게는 철학적 개념보다 살아있는 사유가 더 중요했다. 즉, 의식과 반성이 아닌 사유의 경험을 통해서 기존의 개념과 가치에 의문을 제기했다. 블랑쇼는 철학과 문학에서 제기되는 주제들을 끊임없이 묻고 또 물을 뿐이다. 해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어떤 결론은 또 다른 시작이 된다. 이것이 살아있는 사유이다. 이런 혼란을 밤이라고 대변한다. 이 밤은 헤겔의 정반합 이론의 낮과 대비되는 밤이 아니다. 블랑쇼의 밤(l'autre nuit)은 헤겔과 단절되는 밤이며, 직선적이고 발전적인 의미의 밤이 아니며, 낮을 위해서 있는 것도 아니다. 밤은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의 단절을 통해 드러난다.

이 단절은 망각을 통해 일어나는데, 과거는 망각됨으로써 현재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낮을 망각한 밤은 이미 낮을 품고 있다.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그 사라진 것이 드러난다." 낮과 밤이 대립 관계도 아니고 단절된 것도 아니어서 '중성'이라고 할 수 있다. 헤겔과 같은 이원론이 아니라, 두 대립요소가 고유한 대립관계를 상실하고 서로 긴장과 차이 속에서 역동적인 관계에 놓이는 것이다. 철학보다는 문학, 예술이 이러한 실제 삶을 더 잘 드러낸다고 보는 것 같다. 대립 관계가 사라진 두 요소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과 차이는 결국 무한의 관계를 도출하게 된다.


5) 작가와 글쓰기

블랑쇼는 <문학과 죽음에 대한 권리>를 썼다. 헤겔은 작품 이전에 작가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행위 시작 이전에 그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행위를 지녀야 한다고 했는데, 이를 반박하며, '작가의 의식 속에 사전에 작품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면, 그리고 이런 현존이 작품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왜 구태여 작가는 그 작품을 실제화하려고 하는 것일까?'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작가 내면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작가 내면이 드러나게 만드는 것이 단어이고, 작품의 가치, 진리, 현실성이 그 단어에 의해서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작품은 무(rien) 상태에서 시작한다. 이는 선생과 학생이 익숙한 것과 낯선 것 사이의 무한의 관계에 빠져드는 것과 같다. 이런 가능의 세계와 불가능의 세계가 충돌하고 부서져서 예측 불가능한 함수로 채워지는 세계가 바로 블랑쇼가 말하는 글쓰기이다.

이 예측 불가능한 세계가 보여주는 것은 의식이라는 감옥 안에 갇혀있는 자아, 즉 주체(le sujet)로 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확신에서 벗어나서, 무아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이다. 블랑쇼는 <불안에서 언어로>에서 "작가는 더 이상 쓸 것도 없고 글을 쓸 그 어떤 방법도 없으면서 항상 글을 써야 한다는 극도의 필요성에 강요받고 있다는 우스운 조건에 점점 처해지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는 바타유가 말하는 "두려움 속에 계속 글을 쓰고 있는 그런 무"와 같다.

블랑쇼는 헤겔 변증법을 거부했고,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과 비교할 수 있으며, 삶과 철학이 분리되어 있지 않는 지점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요구한다. 철학이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철학의 삶에 대한 개입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블랑쇼를 읽으면서 철학은 행복해지고자 하는 극고의 노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가해한 세상과 나를 조금이라도 화해시키기 위해서 하는 극고의 사고 활동이 아닐까. 책만 읽었을 때는 블랑쇼가 방 안에서 글만 쓰는 병약한 사람처럼 생각되었는데, 그의 일생을 조금 알고 나니 사회와 정치 경제에 대해서 많은 활동과 고민을 한 철학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존재가 사라진다는 그의 생각에는 동감한다.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나머지 모든 가능성이 다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의 사상인 '중성'이나 '무한'에 대한 그의 사유를 생각해 보면, 정해져 있지 않고 끊임없이 무엇이든지 받아들이고 변화할 수 있는 상태가 진정한 존재의 모습이라고 보는 것 같았다. 그가 '중성'을 주장한 이유가 그런 상태여야만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고,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엠마뉘엘 레비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