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3(요약과 단상)
1) 상처와 고통
레비나스는 나치 점령 시기에 살았던 유태인으로 태풍 앞의 낙엽과 같은 삶을 경험한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에서 이런 특징을 빼놓을 수는 없다. 훗날에는 미국으로 이민해서 생의 후반부를 보내면서 헬레니즘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헤브라이즘의 철학적 번역을 통해 양자의 새로운 종합을 꾀하는 논문 <전체성과 무한(1962)>을 썼다.
'행복한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흔한 비유처럼 레비나스는 사유가 이별을 겪었을 때, 폭력적 장면을 목격했을 때, 시간의 단조로움을 갑작스럽게 의식하게 되었을 때 시작한다고, 그런 상처는 고통스럽지만 사유가 된다고 얘기한다. 사유에는 독서가 도움이 되고, '독서는 현실 속의 참된 삶은 없음을 알려준다.(p.85)'고 말했다.
그의 철학에서 '존재자'는 개별적인 것이고, '존재'는 개별적인 것들의 본질이자 근거를 의미한다. 그의 철학에서의 '존재'라는 개념은 그리스 시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존재를 탐구해 온 존재론과 관련이 있다. 이 '존재론'을 하이데거가 부활시켰다. 하이데거는 자신이 처해있는 존재,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에 휘말린 실존자로서의 운명을 직시하고 긍정하는 삶을 택할 것을 호소한다.(p.86) 하이데거가 존재 자체에 집중했다면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의 존재를 생각했다고 한다.
레비나스는 유태인으로 2차 세계대전에서 처절한 존재의 고통을 느낀다. 이렇게 자기 존재에 매인 붙박이는 유대인만이 아니다. 레비나스는 이런 처절한 고통 속에서 인간인 우리 모두는 숙명적으로 자기 존재에 얽매여 있다(p.87)고 사유한다. 나는 존재의 수인이고, 내 존재에 숙명적으로 묶여 있는데, 이런 상태를 레비나스는 ‘피투성이’라고 부른다. 이 표현은 부과된 과제인 존재를 책임져야 한다는 표현이다.(p.88) 하이데거는 존재에 묶여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이 고통이었고, 레비나스는 아무리 자유가 있어도 이 존재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그 둘은 중요한 차이가 난다.(p.88)
이 부분은 일상적인 체험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나의 존재'와 '나'를 하나로 보느냐, 둘로 보느냐의 차이인 것 같다고 추측만 해보았다.
서양의 존재론에서는 자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 존재론은 존재는 덜할 것도 더 할 것도 없다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는 레비나스의 존재 자체에 대한 공포와 매우 다르다.(p.89) 레비나스는 유태인 학살의 시대를 살았던 경험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뼈저리게 공포로 체험하고 있는 듯하다. 내가 무엇을 하던, 내가 누구든 간에 '유태인'이라는 것만으로 생사가 결정되었으니, 자신의 존재 자체가 공포로 다가올만 한다.
동일자의 자기 회귀라는 방식으로 운동하는 존재의 지평 속에 있는 한, 내가 능력이 뛰어나서 더 많은 가능성을 지녔다는 우월성이 내가 나로 존재한다는 사실의 고통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못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존재의 근본 고통은 오히려 내가 나라는 존재로 있다는 사실이다.(p.91)
유태인이어서가 아니라, 다른 어떤 상황에 처한 인간이든, 인간에게는 아예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초탈의 욕구, 전혀 다른 곳으로 가려는 욕구, 절대 타자에 대한 갈망이 있는데, 이 세 가지가 인간의 근본 욕망이다.(p.91)
인간은 왜 이렇게 벗어나고자 하는 근본 욕망을 가질까? 자신이 속한 곳의 내 모습에 만족하면 편안하고 행복할 텐데, 왜 이렇게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상황에 대한 갈망이 있을까? 내 주변의 사람들과 같이 있는 이 공간에서도 평가받는 객체로 전락하는 이 존재의 상태가 어디서고 바뀌지 않기 때문일까? 그래서 다른 타인이 있는 다른 공간으로 가고자 하는 것일까?
출세 욕구는 타자를 찾아 나서는 욕망이지만, 무한타자의 욕망과 혼동되면 무한정 반복되는 충동의 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p.92
그러니 인간은 끝없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시달려야 하는 존재인 셈이다. 사르트르는 '나'를 향해서 기투하는 존재로 인간을 보았고, 레비나스는 '나'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는 존재로 인간을 보았다. 어떤 방향이건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딘가를 향해서 움직이고자 하는 존재'로 보았으니 존재 자체가 얼마나 고달픈가.
2) 존재론적 차이와 존재론적 분리
구토, 게으름, 권태 현상들은 존재와 존재자 사이에 간극이 벌어지는 순간이다. 존재는 망각되고 억압되어 있다가 이런 상황에서 존재가 갑자기 부상하여 존재자를 압박하게 된다. p.94
게으름과 권태는 간극의 순간일 수 있을 것 같은데, '구토'는 무엇에 대한 구토인지, 스스로의 모습을 역겹게 여기는 구토인지 궁금하다.
진정한 해방은 자기를 초탈하는 방식으로 무한타자와 관계하는 데 있고, 존재는 무한타자와 관계하는 것이 처음에는 고통스럽지만, 후에는 그 관계를 긍정하는 데서, 그리고 자기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수하는 데에서 행복을 느낀다. 레비나스는 유태인으로서의 낙인을 괴로워하다가 정의의 실현을 책임질 주체로 선택받았다는 것을 기뻐하기로 하는 감정의 변화를 원경험으로 가진다. 유한 주체에게 무한타자와의 감응은 트라우마가 될 정도로 어려워서, 존재는 하이데거가 부르는 비본래적 실존으로 도망친다. 하이데거는 비본래적 실존을 비판했지만 레비나스는 ‘향유’라고 이름 붙이면서 이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피난한 존재가 자기 정립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향유'이기 때문이다. p.96~p.97.
향유가 극대화되면 존재의 압박이 존재자를 해체시킬 만큼 위협적인 상황이 되는데, 이런 상황을 익명적 또는 중성적 또는 무차별적이라고 레비나스는 부른다. (독립운동가가 일제 강점기일 때, 자살폭탄테러를 할 수 있는 것은, 존재가 존재자를 해체시키는 상황이 아닐까?)
이 실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력과의 대결이다. 왜냐하면 직접 주어진 자연에 매몰된 본능적 삶과의 단절이 실존의 기초 단계이기 때문이다. 존재론적 분리를 통해서 존재자가 도래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제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가 달라진다. 존재자는 존재를 지배한다. p.98
이렇게 대상화된 존재를 인간 활동의 형식으로 축적하는 것이 소유이다. p.99
존재 정복 사업은 이론적 관조와 객관적 인식에서 완성되며, 안과 밖의 구조로 이루어졌던 존재와의 관계가 주객 관계로 변한다. p.99
집에 들어앉아 이성의 빛으로 세계를 관조하는 행위, 세계를 필요에 따라 원격 조정하는 행위인 앎을 통해 주체는 주권적 자유를 누린다. 이는 플라톤(이데아 관조)에서 출발해서 데카르트(자기의식)를 거쳐 후설(초월적 주관)에 이르기까지의 서양 전통 철학에서, 레비나스는 바로 2단계에 속하는 사유로 자리매김한다. p.100
향유의 행복이 존재의 익명적인 횡포에 맞서 존재자가 자신의 개체성, 자율성을 지킬 수 있도록 해준다. 향유는 또한 타인과 고통을 함께하는 감수성도 가능하게 해 준다. 죽음을 무릅쓰고 부정의에 저항하는 광기도 향유하는 감성과 동일한 실존 구조이다. p.100
3) 전쟁과 평화 그리고 죽음과 사랑
개인들은 모두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기 밀실의 행복을 위해 노동한다. 그 과정에서 개인들은 타인들 사이에 관계망에 사로잡혀 있다. 나의 자유 의지는 타인에 의해 소외된다. p.101
각자의 비밀을 가진 개인적 삶이 익명적 존재에 의해 희생되는 것은 전쟁 때이다. 경제적 교환 때도 개인적 삶이 익명적인 존재에 의해 희생된다. 인류사는 전쟁-전리품의 향락-전쟁-전리품의 향락으로 이어지며, 이것이 삶의 가락이라고 소설가 최인훈이 말했다. 이러한 리듬 속에서 승리를 하는 것은 사람도 민족도 아닌 익명적 존재 자체이다. 존재의 향유 속에서 개별자의 삶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p.105
인간에게는 타자에 대한 욕망이 있는데, 타자와의 관계는 타자를 흡수해서 자신에게 잘 동화되기 위한 목적이 있다. 주체에게 타자를 향한 욕망은 불쾌감이다. 자신의 균형 상태를 파괴하는 타자는 불편하다. 존재론적 근원은 절대적 휴식, 비활성의 상태로 회귀하려는 관성적 충동에 있는데, 이를 ‘존재의 법칙’이라 부른다. p.106
타자를 지향하는 욕망은 존재 정복을 벌여왔던 존재자가 삶의 중심을 자기 존재로부터 타자로 옮기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p.107
자기 존재 물음이 제기되는 시련의 상황 중 첫 번째는 욕망이 무한타자에게 자신을 여는 대신 존재 정복 사업을 통하여 자기 망각을 꾀한다. 그런데 이번 두 번째 시련의 상황에서는 타자를 받아들이려면 무한타자의 타자성을 그대로 긍정하는 자기 정립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은 죽음과 사랑 두 가지이다. p.107
죽음은 극한적 고통을 인내하는 가운데 자기 존재와의 거리가 극소화되어 자신의 개체성이 존재의 익명성에 삼켜지기 일보 직전인 상황이다. p.108
이 시련을 끝까지 인내하면 존재론적 자기보다 더 깊은 차원에 있던 윤리적 자기가 드러나면서 메시아적 자기가 탄생한다. 그것은 존재 중심을 자아에 두지 않고 타자에게 두는 자기이다. 자기가 죽는 것보다 타인을 죽이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자기이다. p.108
레비나스는 깊은 사유를 통해, 유태인으로서 자기의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 긍정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레비나스의 모습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긍정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 아닐까? 혹시 레비나스는 자신이 겪은 고통스러운 경험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을 해결하기 위해 내셔널리즘(오카 마리, 2024)에 회귀한 것은 아닐까? '존재자'라는 개념이 자칫하다가 피해자 내면의 상처를 폭력적으로 다루는 내셔널리즘과 중첩될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