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2(요약과 단상)
퐁티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엄마와 살았는데 사르트르처럼 수재였고, 사르트르와 교류했다. 살(flesh)을 중요시하며, 현상학을 현대적으로 새롭게 가르치며 데카르트를 비판했다고 한다. 그러나 데카르트와 비슷한 점도 많다. '지각의 현상학'은 의식이 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한다. 한국전쟁에서 공산당이 먼저 침입을 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가진 퐁티는 혁명을 위해서는 폭력을 써도 된다는 사르트르와 대립하여 반목했으나, 퐁티가 <눈과 정신>을 집필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해서 사르트르와 화해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현상학은 체험을 선입견 없이 그대로 순수하게 기술하면서 그 안에서 본질을 찾자는 것이다.
1) 나는 나의 신체
모리스 메를로 퐁티는 신체와 지각의 현상학자라고 불리는데, 신체와 살이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데카르트가 '나는 사유한다.'라면, 퐁티는 '나는 할 수 있다.'이다. 눈도 신체적인 눈으로 보는 시선이다. 나의 행동의 동기도 세계 속에 나를 던질 때 내게 동기가 불러일으켜지는 것이고, 어떤 것은 나의 행동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2) 감각하는 몸, 현상적 신체
신체는 항구적인 현존이고 내 신체를 통해서만 나를 볼 수 있다.
사르트르는 나와 타인은 공존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퐁티는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신체는 지각할 수 있으므로 중요하다. 신체로 느끼는 것은 외적 지각이고, 신체를 움직이는 때 발생하는 운동 지각이다. 최초의 앎은 내 신체가 태어나면서 세상도 동시에 태어난다는 의미이고, 이것이 앎이라는 것이다. 퐁티의 주체는 고유한 신체이다. 데카르트부터 시작해서 주체는 모두 정신적인 것이었는데, 퐁티는 고유한 신체를 주체로 인식한다. 눈도 신체적인 눈이다. 산을 보고 있으면 산에 가고 싶은 것처럼, 인간의 고유한 눈은 인간에게 동기를 불어넣어 준다. 울어야 할 상황에서 식탁 위의 맛있는 과일을 보게 되면 먹고 싶은 마음이 드는 현상들을 보면, 신체가 정신을 앞선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감각하는 몸은 현상적 신체라고도 부른다. 공간은 의미를 띠게 되는 순간 새로운 장으로 바뀐다. 의미 있는 공간은 나의 신체를 가지고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지만, 나를 제외하고 객관적인 경험의 소중함을 말하는 경험주의와는 다르다. 몸이 처음으로 알게 되는 느낌인 것을 실천지(praktognosis)라고 하고, 실천지는 신체도식을 수반한다. 신체도식은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신체의 운동이지만 사람마다 스타일이 다르다.
3) 자유와 고유한 시간성
세계 속의 나를 무화하는 것이 사르트르이고, 내가 가장 익숙한 곳에서 자유를 가장 느낀다는 것이 퐁티이다. 세계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다가오는 미래는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퐁티는 주체성과 시간성을 동일하게 여기며, 세계가 새롭게 출현하는 것을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4) 상호주관성의 세계
퐁티는 인간이 몸짓, 행동, 신체의 흔적이라는 영역을 가지고 있어서, 타인과 공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세계를 체험하듯이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on'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널리 쓴다. 이렇게 상호 주체성, 자신의 특수성을 타자들에게 도달하는 수단으로 만들었다.
5) 감각적인 세계의 수수께끼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비가시적인 것이 있다. 그 영역의 깊이를 간파하는 것은 나의 몸이다. 퐁티는 가시적인 것에는 역능(힘)이 있어서 나의 몸짓을 불러낸다고 생각했다. 색깔은 관념이라는 사물의 껍데기로부터 사물을 해방시켜 준다. 사물에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들이 솟아 나오도록 표현할 수 있는 것이 화가이다. 현재 철학의 주류는 현상학 자체를 그렇게 인정하고 있지는 않아서 퐁티는 우리한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고 한다.
철학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것들을 적확한 단어로 명명하고 기술하는 것 같다. 편하게 생각하면,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경험해 본 '느낌적인 느낌'을 언어로 구체화하여 기술한 것이다. 하지만 순간적인 느낌을 보편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매우 어려운 일이고, 그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어려운 단어를 쓴 것 같다. 요즘에는 3D 안경을 쓰고 가상세계를 체험할 수도 있고, 미래에는 가상 세계가 현실을 대신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가상세계에서도 flesh라는 개념이 통할까 궁금하게 여기다가, 그 가상세계 안에 '타자'가 있다면, 그 타자도 사르트르의 타자처럼 나를 형성해 나가는 역할을 할까도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