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광선(1986), 에릭 로메르

by 봄눈

(영화 토론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녹색 광선은 델핀이라는 여성이 바캉스 계획이 어긋나면서, 바캉스를 함께 보낼 새로운 남자 친구를 찾으려고 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이다. 프랑스의 여름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보니, 화면 속 색감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일상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많이 나와서, 훈훈한 기분이 드는 영화였다. 입자가 큰 편인 16mm 필름으로 찍어서 더 부드럽고 약간은 몽환적으로 보인다고 한다.

요약된 줄거리만 보면, 사실 얼마든지 활기차고 즐거운 스토리가 전개될 수 있어 보인다. 그런데 델핀은 함께 바캉스를 보내자는 가족들을 뿌리치고, 친구의 주선으로 간 시골 마을에서도 예민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휴가까지 가서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꽃 꺾는 것에 대해 잔소리를 하고, 자신은 고기를 안 먹는다고 고기를 권하는 사람에게 불편감을 드러내어, 친구 프랑소와즈도 '델핀은 우리와 달라'라고 말을 한다. 남자 친구와 헤어져서, 가고 싶었던 바캉스를 못 가서 심통이 나서 트집을 잡는 것 같다. 결국 스스로 못 견뎌서 파리로 돌아온 델핀은 주변의 다그침에 따라서 새로운 남자를 만날 기회를 만들러 홀로 해변가에 간다. 해변가에서 발랄한 친구를 만나서 데이트가 성사될 듯한 순간까지 생겼는데,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울면서 상대 남성을 퇴짜 놓는다. 그렇게 우울한 여정 끝에 파리로 돌아오는 기차역에서 자신이 읽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자신도 읽었다고 말을 거는 한 남성(자크)에게 마음을 열고 함께 해변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녹색광선'이라는 이름의 가게를 보고, 쥘 베른의 소설에서 '녹색 광선'을 보면 자신의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을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된다는 미신을 떠올린다. 델핀은 자크와 함께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며, 애타게 보고 싶던 '녹색 광선'을 실제로 보게 되어 감격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영화 마지막 장면의 녹색 광선은 해가 수평선으로 넘어가기 직전, 초록색 점처럼 나오는데 신기하고 멋있어 보였다. 이 녹색 광선은 CG가 아니라고 한다. 영화감독이 카메라맨에게 이것만 찾아다니면서 찍으라고 시켰다고 한다. 혹시 이 녹색 광선이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이 아니었을까^^)

델핀이 우는 장면

델핀은 자크를 만나기 전까지 긴긴 여정 내내 자꾸 우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 나는 여주인공이 울 때마다 뭐가 그렇게 심각한가 하는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그 울음이 감독의 의도가 아니고 여배우(마리 리비에르)가 애드리브로 자연스럽게 연기한 장면이라는 말을 들었다. 심지어 스태프의 기대와 다르게 갑자기 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감독은 왜 여배우가 우는 장면을 다 살렸을까? 여주인공을 소위 '사회로부터의 분리에 대한 불안', '하고 싶은 데 못하는 자책', '타자의 시선에 대한 공포', '애정 결핍' 등의 증상을 가진 불안정하고 불안한 인간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울음은 자기표현이다. 말로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바캉스 계획이 어긋났다고 해서,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불안하고 자책하는 것이 좀 과해 보였다. 그래서 이 영화 속 울음이 나에게는 가장 미스터리로 다가왔다.

소설이란 장르는 캐릭터와 감정선이 잘 드러나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데, 이 영화가 캐릭터와 감정선을 정말 잘 살렸다고 보는 의견이 있었다. 이 영화에서는 델핀이라는 주인공이 다다. 그 외에는 그렇다 할 줄거리도 없다. 델핀은 잦은 울음 외에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애타게 찾아 헤맨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대책도 없으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이 끈질긴 추구 끝에 드디어 마음에 드는 자크를 만나서 녹색광선까지 보니 이 영화는 해피 엔딩이다. 이 영화의 원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쥘 베른의 소설 '녹색 광선'의 줄거리는 그 당시에 정략결혼을 하던 사회에서 '상대방과 나의 진심을 알게 된다'는 녹색 광선을 찾아 떠나는 캠벨이 자신의 정혼자(잘난 체하는 과학자)가 아니라 녹색 광선을 찾아서 헤매는 길에서 만난 화가와 결혼을 하게 된다는 것이란다. 영화 속 델핀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남성을 찾아다님으로써 나중에 결국 자크를 만나게 된다. 즉, 여성이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찾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소설과 영화가 비슷하다. 감독은 델핀을 통해서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나섰기 때문에 마침내는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시 더 철학적으로 해석하자면, 바캉스란 'vacancy', 즉 빈 공간이다. 인생의 빈 공간, 빈 시간, 공허함을 맞닥뜨렸을 때, 인간은 어떻게 그 공허함을 메꿀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 공허함을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원하지만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로 채우기 위해서 델핀처럼 끝까지 방황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기다렸던 순간, 우리가 그 시간을 위해서 일했던 그 순간이 왔을 때는 우리는 델핀처럼 갈팡질팡 할 것인가? 나는 왠지 갈팡질팡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향해 직진할 것 같은데, 겪어보지 않아서 장담은 못하겠다.

common.jpg <녹색 광선> 영화 포스터

공허함을 채우려는 모든 추구가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것은 아닐진대, 그렇다면 감독은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모든 게 다 마음에 들지 않는 젊은이의 사는 모습을 그냥 보여주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청춘의 불만족이라고나 할까.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인기가 많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젊은이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가 아니었을까? 영화가 거창하고 철학적인 주제를 담지 않아도 젊은이의 추구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기만 해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말할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에릭 로메르 감독은 녹색 광선을 만들면서 쪽대본을 그날그날 들고 와서 이렇게 연기를 해달라고 배우에게 얘기하는 감독이라고 한다. 그래서 배우들이 연기를 어떻게 해야겠다고 미리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자연스러운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있는 셈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