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2021), 데어라 혼

by 봄눈

책은 유대인인 작가가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것을 시작한다. 가족 내에서 유대인의 의식이 얼마나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는지를 서술하는 부분 중에서 나에게 인상 깊었던 부분은 유대인 관련이 아니라 개인의 성향, 즉 글쓰기에 관한 부분이었다.


어린 시절에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 내 글쓰기를 추동하는 힘은 이야기를 지어내고 싶다는 충동이 아니라 시간을 멈추고 싶다는 충동, 사라지는 그날들을 보존해 두고 싶다는 충동이었다. 나는 심지어 최고로 지루한 일들에 대해서도 몇 분씩 시간을 들여 기록하며 기자 수첩에 더 가까운 일기를 썼는데, 그것들을 종이 위에 가둬두고 싶다는 것 말고는 어떤 다른 이유도 없었다. p.16


이야기를 지어내고 싶다는 충동이 아니라 일어난 일을 보존해두고 싶다는 충동이라는 서술이 나에게도 정확히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책의 본론은 가장 유명한 <안네의 일기>의 인기와 대중성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문제는 안네 프랑크가 더 넓은 세상에 대해 갖는 호소력 전체가 - 그를 알고 사랑했던 사람들과는 달리 - 그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사실에 기반해 있다는 것이다. p.35

안네의 일기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문장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들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사람들의 내면은 진정으로 선하다고 믿어.” 이 말들은 우리에게 ‘모종의 영감’을 주는데, 그건 그 말들이 우리 귀에 좋게 들린다는 뜻이다. 이 말들은 살해된 소녀들의 시체가 수북하게 쌓이는 걸 용납하는 우리 문명의 타락에 대해 용서받은 기분이 되게 해 준다. p.36


확실히 신랄한 표현 이기는 하다. 안네 프랑크를 우리가 마음 놓고 사랑하는 이유는 그 아이가 일찍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적한 점은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사람들은 희미하게 느끼기는 하지만 이렇게 정확하게 쓰지는 못한다. 사람들은 듣기 좋은 말만 좋아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추켜세워질 수 있는 스토리만 좋아한다.

IE002627990_PHT.jpg <안네의 일기> 한 페이지

'유대인 문화유산 지구’라는 대체로 유대인들이 살지 않는 지역에서 인기 있는 관광산업 콘셉트가 있다. … ‘사망하거나 추방된 유대인들로부터 압수한 재산’보다는 훨씬 나은 이름이다. p.56


중국 하얼빈에 한 때 유대인을 이주시켜서 도시를 건설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모두 빼앗고 쫓아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름도 사실은 ‘euphemism(완곡어법)’이라는 것이다. 평범한 말조차도 사실은 완곡어법이었다는 것은 내가 새로 알게 된 것이다. 일상적인 이름의 의미를 잘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일상생활에서 ‘유대인 문화유산 지구’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소련은 처음에는 그 예술가들을 보편적 인간 이상의 전형이라며 환영했지만, 그런 다음에는 자기 목적에 맞게 이용했고, 마침내는 처형했다. p.101


이건 유대인 예술가의 운명이 아니라 소수자의 운명이다. 나도 일꾼으로 환영받겠지만, 그런 다음에는 목적에 맞게 이용될 것이고, 마침내 조용히 내쳐질 것이다. 그걸 다 알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내 모습이다. 다음의 '서사, 서술 스토리텔링'의 구조에 대한 부분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사회적으로 환영받고 용인되는 '스토리'는 절대 '사실'이 아니며, 사회의 대다수, 권력을 쥔 자들의 입맛에 맞게 각색된 것들만 통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명확한 결말을 지닌 이야기들은 세상이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는 믿음을 반드시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논리적으로 말이 되게 만드는 예술의 힘에 대한 믿음을 반영하기는 한다. 하지만 유대인의 스토리텔링에서 발견되는 것은 정말로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겸허함으로부터, 우리가 세상을 논리적으로 말이 되게 만드는 척하는 동안에는 인간의 경험에 진실할 수 없다는 앎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리얼리즘이다. p.138


가장 흡입력 있는 기술이다. '기승전결'이라는 우리가 따라야 하는 스토리의 구조란 사실 현실과 다르다는 것. 나는 영화나 소설을 재미있게 보다가 항상 결말이 나오기 바로 전에 어떤 ‘선’ 같은 것을 느꼈다. 그 선의 앞까지는 현실이다가 그 선을 넘어서는 순간 가상의 세계로 들어가 버려서 소설을 읽는 재미가 확 사라져 버리는 그 선이다.

그러나 현실을 반영하는 소설이나 영화는 ‘선’이 없는 것이 맞고, 결말이 없는 영화가 현실을 반영한다는 나의 생각에 자신감을 주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사실'을 전달하려는 글은 보통 사람의 눈에는 '이상하고, 재미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대체로 비종교적이고 이디시어를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러므로 그 죽음이 우리가 공유하는 보편적인 인간성에 대해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깨달음과 은혜로운 순간들로 충만한 유대인들 말이다. 통계적으로 말하자면, 홀로코스트를 견뎌낸 유대인 가운데 이런 것을 경험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p.140


위의 서술은 영화나 소설에서 등장하는 감동적인 유대인 관련 서사에 나오는 유대인을 말하는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것은 진짜 유대인과 진짜 유대인의 경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건 유대인 관련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마찬가지이다. 그 누구도 힘들다, 안된다, 나쁘다는 말을 듣기 싫어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쁜 말을 한 사람이 죄인이고 사회부적응자이다. 그게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이 책에서 ‘유대인’을 ‘소수자’로 대체시켜서 읽으면 정말 좋은 책이다.

어쩌면, 사실을 사실대로 쓰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써봤자 아무도 읽지도, 사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0251227_191547.jpg <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 책표지

판타지를 믿는 일에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확신하는 일이 필요하고, 그런 다음에는 절대로,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일이 필요하다. p.167


매일의 일상을 사는데도 판타지가 필요하다. 그것이 판타지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않으면 일상을 견뎌낼 수 없다. 그래서 판타지를 믿는 일에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판타지에서 절대로 절대로 물러서면 안 된다.


당신이 여기서 받아들여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속았다고, 이 장소도 다른 모든 곳과 똑같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이 장소는 다른 곳들보다 더 음험하기만 한데, 차별이 법률에 적혀 있지 않아서 공공연히 그것에 항의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p.168


이건 왠지 내 얘기 같다. 이런 상황에서 웃으면서 모든 일에 대처해야 하는 것이 이른바 ‘사회생활’이다.


우리는 이 탄생 설화를 그저 선호하기만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필요로 한다. 이야기는 역사보다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야기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p.169


이것이 저자의 믿음이다. 그래서 그녀는 소설가이다. 그리고 마음을 다해서 이 책을 쓴 것이 느껴진다. 의미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그려질 정도이다.


당시 포르투갈의 미국 특사로 가있던 허버트 펠은 이렇게 말했다. “화재로 처치 곤란해진 지식인들의 특가 처분이 여기서 진행 중인데 우리는 이걸 충분히 이용하고 있지 않다.” p.197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지식인들이 구조를 기다리던 시대를 묘사한 글이다. 그때만 해도 지식인들이 가치가 있는 시대였구나. 지금은 그런 종류의 ‘지식인, 예술가’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인데, 지식인을 ‘특가처분’이라는 말과 함께 썼다는 것에 대해서 분노해야 하는데, 현실은 지식인이 ‘특가처분’되고 있는 것을 반겼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게 여겨진다. 만약 현대였다면 '과학자들'과 '의료 기술자'들이 특가처분되고 있다고 좋아했을 것이다.


포이히트방거의 문장은 지극히 평범하고, 호감이 가기는 하지만 예술적이지는 않다. 오늘날 그 이야기는 친숙하게, 심지어는 진부하게 느껴진다. 그 책이 독일에서 1933년 11월에 처음으로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p.103


이 부분은 2차 대전 시기에 책을 냈던 어느 유대인 작가의 평론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냥 잡혀가서 처형되는 시대에 책을 낸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행동이었다는 것. 지금도 그런 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과거의 작품을 읽을 때, 그 위대함을 논할 때 잊지 말아야 하는 점이다.


하지만 구조자와 구조되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는 본질적으로 수치스러운 무언가가-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 하는 처지가 되는 일을 굴욕이-있고, 그 수치스러움은 구조자들을 향한 적대감으로 드러난다. “감사하는 마음은 우리가 누군가를 싫어하게 만들죠.” 내가 배리언 프라이가 남긴 것들에 대한 당혹감을 이야기하자 독일계 유대인 저널리스트 하네스 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p.203

구조자들과 구조된 사람들의 경험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차이는 이런 수치스러움을 더해 줄 뿐이다. 구조된 사람들에게 그 시기는 인생에서 최악의 시기이자 자기 삶에 가장 의미가 없었던 시기였다. 반면 구조자들에게 그 시기는 인생에서 최고의 시기이자 자기 삶의 의미가 가장 컸던 시기였다. p.238


그래서 홀로코스트에서 구조된 유대인은 미국에서 자리 잡고 성공한 이후에도 자신을 구조한 사람의 부탁을 외면했고, 구조자(배리언 프라이)는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이 부분은 세상을 편협하게 바라보지 않으려는, 유대인의 진실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의 ‘사실적인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 부분이라서 나에게 인상적으로 와닿았다. 작가는 구조자 프라이라는 인물을 정확하게 그려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를 대하는 유대인 유명인들의 모습은 현실적으로 그려냈다. 사람들은 자신을 구조해 낸 사람을 멀리하고 싶어 한다. 그 앞에서는 자신은 너무나 초라한 존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1971년에 쓴 ‘도덕철학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이라는 글에서 아렌트는 나치 독일에서 도덕성이 사라졌던 일을 이렇게 돌아본다. “이 모든 것이 거의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 내렸다. … 마치 도덕성(morality)이라는 단어가 갑작스럽게 ‘풍습, 관습, 태도들을 모아놓은 조합’이라는 본래 의미를 드러내고, 그 조합이 다른 조합으로 교환될 수 있다는 듯이 … 우리는 결국 한낱 꿈에서 깨어난 것일까?”

그 책을 ‘이기심의 미덕’ 옆 칸에 되돌려 놓으면서 나는 이디시어로 시를 쓰는 미국 시인 제이컵 글렛슈타인은 그와 반대되는 생각을, 즉 ‘충분히 깨어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꿈이라는 게 존재했던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생각을 했었음을 기억해 냈다.

잘 자라, 드넓은 세상아

커다랗고 역겨운 세상아,

네가 아니라 내가 문을 쾅 닫는다. p.242


이 책에 나오는 유대인이라는 단어를 소수자라고 바꿔놓고 읽으면 이 책은 정말 좋은 책이다. 그런데 유대인이라는 단어가 자꾸 시오니즘과 팔레스타인을 생각나게 해서 뒷부분에서는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발췌한 부분처럼 도덕이란 얼마든지 재조합될 수 있는 관습의 묶음이라는 깨달음 등 전체적으로 좋은 내용은 많다.


정의로움은 특별하지 않은 것 진부한 것으로 여겨진다. 정의로움이 그것의 본질인 예언으로 여겨지는 법은 없다. p.253

추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피에르 소바주가 한탄하는 것-정의로움에 대한 진정한 탐구-에 자신의 삶과 커리어를 바쳤던 그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어떤 구조위원회도 소집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배리언 프라이 같은 사람이 없었다. p.254


홀로코스트에서 사람들을 잘못 구해냈다. 예술가가 아니라 정의로운 사람을 구해냈어야 한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람은 어쩌면 홀로코스트를 떠나려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홀로코스트를 떠난 사람들을 정의롭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시편에 따르면 하느님은 매일매일 화가 나 계신다. 하느님은 얼마나 오랫동안 화가 난 상태로 계실까? 현자들은 묻는다. 58,888분의 1시간 동안. 자신의 기도에서 하느님은 말씀하신다. 연민으로 분노를 극복하는 것이 나의 의지가 되게 하라. p.341


20251227_191600.jpg <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 책 뒤표지


유대민족은 실제가 아니라 담론과 관습의 산물이다. 물론 정체성은 억압받을 때 생성되는 사회의식이므로 유대인들의 민족적 정체성은 강력하고 전투적이다. 한편 정체성의 정치는 피해의 자각이라는 원한, 즉 ‘르상티망 resentiment’에서 생기기 때문에, 피해자는 자신이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시오니즘이 그것이다. (미-이스라엘 동맹이 팔레스타인을 억압하는 현실은 이 책에 접근하는 데 혼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정희진 해제) p.353


그래서 이 책 전체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공격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서 썼나 하는 의심을 들게 할 정도이다.


여성과 민족은 오래된 타자성이다.(정희진 해제) p. 355


정체성은 타자가 생기면서 생겨난다. 나에게는 이제 타자가 어마어마한 수로 생겨났다. 그래서 요즘에 증오와 함께 정체성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유대인이 아닌 사람이 썼다면 진짜 좋은 책이 되었을 텐데. 혹은 이 책의 마지막에 전 세계 1,500만 명의 유대인 중 약 950만 명이 사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침공하는 상황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언급이 있었다면 정말 좋은 책이 되었을 텐데. 혹시라도 팔레스타인 사태 얘기가 나오는지 끝까지 기다렸는데 못 찾았고, 혹시 간접적으로라도 언급된 것은 내가 못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 대신에 마지막 장에 저자는 유대인은 자식을 많이 낳아서 민족을 번성시켜야 한다고 은근히 주장을 하면서 어머니에서 14명의 손자들까지 온 가족이 똘똘 뭉쳐서 유대인 종교교리의 원리로 돌아가서 평안을 얻으니, 이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 이슬람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과거로 회귀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이 책이 세상을 보는 방식, 유대인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공고히 하는 다수이자 권력자의 위치에 있는 '사회'의 행태를 입체적으로 설명하고, 홀로코스트에서 구조된 유대인들이 자신의 구조자를 배신하는 모습과 그 이유를 다룬 것은 상당히 좋았다. 그만큼 사회를 되도록 편파적으로 보지 않고 다방면의 합리적인 고찰을 한 것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이 정도의 책도 나오기 힘든 세상에서 이런 책이 나왔으니 칭찬하고 존경할만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프랑켄슈타인(2025), 기예르모 델 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