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서사(2000), 오카 마리

by 봄눈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은 ‘기억’이라는 것과 ‘서사(말)’라는 것의 단차를 다루고 있다. 기억은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머릿속, 몸속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경험은 말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어서, 어떤 기억은 몸과 감정의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우리는 기억이 말로 전달된다고 해서 오로지 말로 저장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기억은 타인에게 전달하기 매우 어렵다. 몸의 개체성과 고유성 때문에 몸의 기억을 타인이 느끼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험은 몸과 감정으로 살아내는 것이므로 우리 삶은 우리 몸에 들어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타인의 ‘몸’에 새겨진 기억을 우리가 ‘말’을 통해 들을 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를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사건’의 기억을 리얼하게 재현, 표상하고 있는 바드르의 소설은 작품 중반에 이르러 그때까지 비인칭 화자를 통해 복수의 시점으로 이야기해 온 서사의 서술이 갑자기 변용되어 독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나’라는 일인칭 화자가 당돌하게도 텍스트에 나타나고 그 ‘나’의 시점에서 몇 페이지에 걸쳐 서사가 진행된다. 그리고 ‘나’는 등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당돌하게도 홀연히 텍스트에서 사라지고 서사는 다시 원래의 비인칭 화자로 되돌아간다. p.18


'사건'의 경험과 '서사(글)'은 일치하지 않음을 글의 시점을 이용해서 텍스트의 형태로 표현하려는 작가의 방법이 창의적이고 멋지다고 생각했다. 단지 멋짐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도저히 말로 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전달하려고 고민한 끝에 그런 결과물이 나왔겠지만 말이다.


스테파니가 반복하는 ‘아듀’라는 말을 듣고도 필립이 ‘사건’의 흔적을 발견하는 데 실패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의 기억, 환상을 투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들도 자신들의 환상, 즉 전쟁이라는 폭력적인 '사건'이 리얼리즘에 의해 재현 가능하다는 환상 - 그리고 그것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나르시시즘적인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 을 작품에 투영함으로써 스테파니의 광기에 체현된 ‘사건’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필립의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 그들은 비평에서 스테파니가 반복적으로 말하는 무의미한 ‘아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사건'에서 배제함으로써 전쟁이라는 ‘사건’을 재현 가능한 경험으로, 그리고 완결된 서사로서 재구성한 것이다. … 무의식의 욕망에 의해 부인된 사람들, 리얼하게 완결된 서사에서 배제된 사람들이야말로 ‘타자’ 일 것이다. p. 50


필립이 전쟁을 재현하는 것이 그의 나르시시즘적인 욕망 때문이다. 즉 필립은 자기 입장에서 내가 전쟁을 다 알고 있고, 내가 아는 것이 진실이며 그 이상의 진실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테파니 마저도 자신이 원하는 모습의 스테파니를 보기를 원한다. 현재 스테파니 그 자체로,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이것도 필립의 이기적인 욕망일 뿐이다. 차라리 가만히라도 두었으면 덜 힘들었을 텐데, 이러한 타자의 욕망이 '사건'을 경험한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상황은 사실 항상 일어나고 있고 '아듀'라는 소설에서는 스테파니를 자살하게 만든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 ‘사건’의 진실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당사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사건’에 대한 유일무이한 증인이기 때문에 진부하기 짝이 없고 판에 박힌 듯이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언어가 매개하는 의미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어긋남, ‘사건’과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말해진 언어 사이의 끝없는 괴리 또는 단절을 주목해야 하는 것을 아닐까. 그 언어는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과의 단절, 그리고 그 단절 속에서 드러나는 ‘사건’과 타자의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폭력의 깊이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p.63


저자는 '사건'을 당한 피해자가 느끼는 '사건'의 크기와 깊이, 그 진짜 상황은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알 수 없다는 점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타인의 나르시시즘적인 욕망으로 '사건'이 재현되었을 때 피해자는 2차 피해를 당하게 된다고. 피해자로서의 경험을 피해자가 아닌 사람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그 접근의 가능성과 윤리에 대해서 책 한 권이 나올 정도로 깊은 사유를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절멸 수용소라는 극한 상황에서조차 인간은 그만큼 숭고할 수 있었고 아무리 잔인한 폭력도 인간의 정신적 존엄까지 빼앗지 못한다는 서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것은 절멸수용소를 직접 경험한 적 없었던 사람들, '사건'의 외부에 살고 있는 사람들, 말하자면 우리가 이 세계의 일상을 안심하며 살아가기 위해 필요로 하는 서사가 아니었을까. '사건' 내부에서 일어났지만 우리는 알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한 폭력이 '사건' 외부, 즉 우리 세계에 침입해 오지 못하게 하고 불안에 떨지 않게 하려고 우리는 우리의 서사와 우리의 판타지를 그것에 투영한 것이다. p.70


결국 홀로코스트 서사를 포함하여 현재를 공고히 하지 않는 서사는 소비되지 않는다. 이런 점은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즉, 사실을 기술했다고 여겨지는 서사들이 ‘사실’과 ‘경험’을 그대로 담고 있지 않고 그 서사를 소비할 사회의 바람을 얼마나 많이 담고 있는지를 읽었다. 이 책에서는 이라크의 여자와 같은 예에서 보이듯이, 국가의 내셔널리즘은 개인이 그 기억을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잘못된 방식으로 기억하도록 만들거나, 아예 타자를 지워버리고 살아남은 자의 행운만 반복적으로 기억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기억을 못 하도록 막는다.


자신의 대답에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그 말은 불안하다. p.98


어머니와 할머니가 차를 마시면서 나누었던 이야기. 그것은 분명 국가가 일으킨 전쟁이 악한 것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전쟁에서 부조리한 죽임을 당한 사람들, 전쟁이라는 '사건'의 폭력을 현재의 서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타자의 존재를 상기하게 하는 기회를 없애고 자신의 피해만을 기억하고 상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 <원더풀 라이프>와 마찬가지로 전후 일본 사회의 내셔널한 경험 그 자체를 반복하고 있으며 타자의 부인이라는 내셔널리즘적인 욕망, 그리고 내셔널리즘 자체를 나누어 갖고 있다. p.108


다음은 '서사'에 관해서이다. 타인의 기억은 말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 있는 서사로서 우리는 기억한다. 그런데 서사는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의도’가 들어있는 지어낸 줄거리이기 쉽다. ‘의도’를 넘어서 서사를 말하는 사람의 ‘자만심’조차 담겨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소설이나 신문 기사 등 매체의 구조라는 것은 사회의 요구를 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사회는 자신의 요구를 담고 있지 않는 글은 유통해주지 않는다.


'사건'의 기억은 어떻게 해서든지 타자, 즉 '사건' 외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집단적 기억, 역사의 언설을 구성하는 이는 '사건'을 경험하지 않은 살아남은 사람들, 곧 타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과 그 기억을 공유하지 않으면 '사건'은 없었던 일로 되어 버린다. p.111


'사건'의 위장 플롯을 부여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그 '사건'을 서사로 완결하여 다른 서사를 살아가기 위해 이루어지는 행위며, '사건'의 폭력을 망각하기 위한 행위이다. p.130


그런데 '사건'은 잊히지 않기 위해서 공유되어야 한다. 그런데 위장 플롯(내가 그토록 역겨워하던 '기-승-전'과 '결' 사이의 그 커다란 틈)을 사용하면 안 된다. 위장 플롯이 없으면 '사건' 자체를 널리 알리기가 어렵기도 하다. 이런 모순된 현실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조선인이 공격해 온다는 유언비어가 퍼졌지만 모두 헛소문이었습니다."라고 간토대지진이 일어나 대나무 숲으로 피신했을 때의 기억을 한 일본인 여성이 이야기했을 때 그 기억은 이미 서사화된 '사건'의 하나의 삽화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 서사는 끝났다. 그리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그것을 추억할 수 있다. 페르난도처럼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현재형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 그들의 기억은 완결된 서사와 함께 과거로 매장되고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이 서사에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p.130


과거의 '사건'으로 큰 피해를 입어 그 피해를 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페르난도 같은 사람들에게는 완결된 서사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더욱 증오스러울 수 있다.


'사건'은 그 폭력의 기억이 바래져 언어화될 수 있고 기억 속에 길들여진 것만 '경험'으로서 공유된다. 그러나 이는 '사건'의 공유인 것일까. 그때 그 장소에서 그 사람을 향해 이야기된다는 것 그런 범위에서 '사건'의 기억을 말한다는 것, 즉 '사건'에 대해 증언한다는 행위 자체가 단 한 차례의 유일무이한 행위인 것은 아닐까. p.132


'사건' 공유의 어려움과 유일무이성을 짚어낸 이 부분은 중요하다. '사건'은 공유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해서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유의 시간과 장소, 대상이 다 '사건'의 기억과 전달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 의미에서 구술사가가 서술가보다 '사건'의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나의 주의를 끈 것은 인용한 문장 중 세 번씩이나 되풀이되는 "보세요."라는 말이었다. '사건'의 흔적에, '사건'이 일어난 저 어둠 속에 잠긴 동굴에 시선을 응시한 주네를 향해 누군가가 속삭였다. "보세요. 자 이 사람의 손을 보세요."라고. 그 말이 촉구하고 지시하는 것을 더욱더 세세하게 증언한 주네. 그러나 직시하고자 하는 시선에서 그것은 늘 어이없이 패배하게 되고,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의식이 어이없이 패배한 그것이 벌어진 곳을 재차 타자의 목소리가 "보세요."라고 지시한다. p.136


결코 '사건'의 전능한 서술자가 될 수 없는 증언자. '사건'에 대한 증언자의 그런 무능함, 철저한 수동성, 주네의 르포르타주에 쓰여 있는 것은 '나'에 앞서서 늘 타자의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 바로 이 타자의 목소리야말로 '사건'의 외부에 있는 사람(제삼자)을 증언자로 소환하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사건'의 기억을 나누어 갖는다는 행위란 타자가 호소하는 목소리에 그 무능함과 수동성으로 응답하는 사실과 다름없다는 점이다. p.137


'사건'을 경험한 사람은 '사건'을 보고 널리 알려달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사건'의 현장에 도착한 주네마저 '사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인식에 실패한다. 이 일화는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진실을 우리가 무시하거나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목격자와 경험자는 다르다. 주로 서사를 해야 하는 목격자는 경험자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어쭙잖게 공감하기보다는 차라리 타인임을 분명히 아는 것이 도움이 될 수가 있다.


말은 절대로 투명하지 않다. 그 불투명함을 상기하는 것이 지금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p.147


나는 말을 투명함을 믿지 않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투명하게 말했지만, 듣는 사람은 투명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듣는 사람은 내가 전혀 말하지 않은 내용을 받아들이고 있는 상대의 반응을 보고 나는 내가 '타자'라는 것을 알았다.

말은 발화자의 진실을 담지 않는다. 말은 사회적인 도구이기 때문에 발화자가 존재하고 있는 공간을 표현할 뿐이다. 거의 자동적으로 그렇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발화자가 사회로부터 받아들여진다. 애당초 자신을 받아들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발화되는 말이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내가 그녀에게 눈물의 의미를 묻지 않는 것, 그리고 폴란드가 조국이라는 의미를 묻지 않는 것은 '사건'의 폭력이 지닌 측정할 수 없는 어둠의 깊이와 직면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회피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바로 거기에 '사건'에 대한 기억의 증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녀의 침묵, 눈물, 폴란드라는 대답, 그것 전부가 '사건'에 대한 기억을 나에게 지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p.152


함부로 타인에게 질문하지 말아라. 그것이 겸손함의 실천이다.


타자로서 표상의 울타리 밖에 방치되어, 자신의 경험을 표상하고자 해도 타자로 잘못 표상될 수밖에 없는 까닭에 자신을 표상할 수 없는 서벌턴 여성들의 경험이라는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바로 스피박이다. 이 책에서 전개된 표상 불가능성을, 그 핵심에 내포하고 있는 '사건'을 표상하려 할 때 그 어긋남과 정합성의 결여를 통해서만 표상할 수밖에 없다는 논의는 스피박의 논의를 전제한 것이다. p.155


타자성에 갇혀서 무슨 말을 해도 상대에게 올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의 억울함과 답답함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위의 내용을 쉽게 풀어보면, 사회의 '타자'라는 것은 A라고 말을 해도 B라고 받아들여지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하려는 내용이 사실일지라도 말을 하는 것이 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 불리하다. 그리고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사회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그것이 '타자'이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한마디로 하면 "겸손해라, 너는 잘 모른다."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은, 혹은 우리가 보거나 들은 것은, 실제 일어난 '사건'을 경험한 사람에게 범접할 수 없다는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 그걸 아는 것이 첫 번째라는 것이다. 그러나 잘 모름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전달받은 사람이 행동을 해야 할 때는 최소한 자신을 이민자, 디아스포라의 위치에 두는 것이 그나마 '사건'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사건'과 '전달' 사이의 어긋남 자체가 '사건'의 심연을 조금이라도 전달할 수 있다.


어쩌면 살아있는 서사는 결론이 없는 서사이다. 살아있는 서사는 서로 어긋나는 서사이다.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서사가 필요하다. 성급하게 혹은 섣불리 결론을 내지 않는 서사가 필요하다. 결론이 없는 서사는 책임감 없는 서사가 아니라 겸손한 서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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