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2025), 기예르모 델 토로

by 봄눈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많은 영화와 연극으로 재창조되고 있는 명불허전의 고전이다. 책으로 읽어도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데, 영화나 연극으로 만든 작품은 더더욱 흥미로울 수 밖에 없다. 기예르모 델 토로도 프랑켄슈타인을 반드시 영화로 찍어보리라고 다짐해왔다가 이번에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오랜 기간의 고민 끝에 세상에 나온 작품이어서 그런지 구석구석 세심한 손길이 느껴지는 역작이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낸 피조물은 늘 무섭고 징그러운 이미지로 창조되어 왔다. 물론 그것이 원작의 의도에 맞는 이미지 구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데이비드 컴버비치의 NT <프랑켄슈타인>부터는 배우가 아름다워서 어쩔 수 없었는지 피조물이 우아한 이미지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025년 <프랑켄슈타인>에서는 영화 속에서마저 아름다운 피조물로 그려졌다. 이제 인간은 '다른 존재'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인가 보다. (이후에 설명)

이 영화는 Gothic Horror를 추구했다고 하는데, 고딕의 느낌이 가득하게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영화이다. 특히 빨강과 푸른색의 이미지는 강렬하게 영화를 장악한다.

231630_454438_4715.jpg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어머니 클레어가 아버지를 맞이하러 나가는 장면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어머니 클레어는 동생을 낳다가 죽을 때, 피 묻은 손으로 어린 빅터의 어깨를 잡는다. 그래서 새하얀 셔츠에 새빨간 피가 묻은 손자국이 남는다. 그래서 닥터 프랑켄슈타인이 피조물을 만들 때 빨간 장갑을 끼고 있었던 것은 생명을 만드는 엄마의 역할을 한다는 것의 상징일 수 있다.

시각적으로 또 아름다운 것을 엘리자베스의 드레스이다. 엘리자베스와 빅터의 어머니 클레어가 미아 고스로 같은 배우이다. 그녀의 강렬한 청록색의 드레스를 입고 처음 등장한다. 자신의 애인이 아닌 애인의 형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새빨간 정념의 드레스를 입고, 마지막에서 하얀색 웨딩드레스가 붉은 피로 물드는 장면까지 연출하여 순결한 희생자라는 존재의 의미를 전달하다시피 한다. 아카데미 의상상은 타고도 남을 만하다고 하니 시상식을 기다리게 된다.

엘리자베스역의 미아 고스

사실 원작에서는 엘리자베스의 역할이 없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피조물과 교감하는 존재로 나오는 것이 여성에게 역할을 주었다는 점에서 현대적인 해석으로 느껴진다. 엘리자베스가 전쟁에서 죽은 자들에 대한 연민을 느끼는 인물이라는 것이 그녀가 피조물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을 정당화시켜 준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그들의 시체를 가지고 만들어진 존재이므로. 피조물을 괴물 취급하는 빅터에게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지성이 있다는 뜻이야."라고 엘리자베스는 말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진짜 연민을 느끼는 엘리자베스에게 피조물도 애틋한 감정을 느낀다. 엘리자베스는 피조물과 짧지만 진정어린 관심을 나누면서, 피조물을 독립된 존재로 성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빅터가 자신을 만들어 낸 오래된 성(城)의 폭발로 세상에 던져진 피조물을 성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산속 오두막의 눈먼 할아버지의 애정과 엘리자베스의 연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이름이 없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이름을 붙여준다면 무엇이 될까 생각해 보았다. 메리 셸리의 원작 소설을 기준으로 한다면 '폭풍', '눈보라', 2025년 영화를 기준으로 한다면 '아들', '숲의 정령' 혹은 '순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싶다. '순수'는 신의 의지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고 자연과학(갈바닉)에 근거하여 자연의 작용으로 태어난 생명은 신의 의지에서 벗어나서 순수하기 때문이다. 아무 의도 없이 생겨나게 된 존재일 뿐이다라는 의미로 순수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름은 있더라도 관계가 있어야 있어야 불려질 수 있는데, 피조물은 이름을 불러 줄 사람이 없는 존재이므로 영화의 마지막까지 이름이 없는 것이다.

피조물에게 언제 '자아'가 생겼는지도 생각해 볼 만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나,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아가 생기는 것이라고 했을 때, 라캉의 설명을 빌리면 피조물이 혼자서 성 속에 존재할 때는 상상계에 살았으나(빅터가 거울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피조물이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세상의 공격, 할아버지와의 관계 등 상징계랑 맞부딪칠 때 자아가 생겨난다고 한다.

자아가 생긴 피조물은 '동반자'의 필요성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느끼고, 고통을 느낀 후 생겨나는 자신의 욕구를 알 수 있으므로 자아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선장의 방에서 빅터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라캉의 입장에서 '자아의 글쓰기'가 실현되는 장이다. 그 장이 바로 자아가 형성되면서 해방이 되는 순간이라는 의견이 영화토론 모임에서 있었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이 원작 소설과 다른 점은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다른 점은 마지막 부분에서 나온다.


그 후로 악은 나의 선이 되었다. p.299


원작에서 피조물은 악한 존재로 남아서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더 이상 인간을 마주할 일이 없는 북극을 향해서 사라져 간다. 피조물에 동일시하는 독자에게는 존재의 처절함을 느끼게 하는 마무리이다. 나는 원작 그대로 인간 빅터는 생명을 창조하겠다는 자신의 오만함이 낳은 비극을 끝까지 책임져야 하고, 피조물은 비극적 탄생에서 생겨난 고통에 기인하는 증오를 현실화하는 존재로서 남아있어야 이 소설의 진정한 의미가 전달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빅터와 피조물이 화해하고, 원작에서 피조물은 강력하지만 언젠가 죽을 존재인 반면, 영화에서는 죽지 않는 존재로 그려졌다. 나는 이러한 영화의 결말을 디즈니적(?)이라고 생각했다. 어설픈 화해와 피해자의 성스러운 용서를 통한 영웅의 탄생. 피조물은 얼음에 갇힌 배를 구출해 줌으로써 자신이 영웅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인간의 본질을 빅터와 피조물이라는 고통스러운 존재를 통해서 보여주는 명불허전의 고전을 해피 엔딩의 디즈니 만화로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시각적으로는 화려하지만, 줄거리는 시시한 영화)

이 영화는 피조물을 만드는 순간에도 십자가 형상을 보여줌으로써 피조물이 영웅이 될 것임을 복선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Shape of Water>, <피노키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크리쳐에 천착하는 감독이다. 인외의 존재를 통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감독이며, 기본적으로 시선이 따뜻한 감독이라 하니 어쩔 수 없다.

십자가.jpg 빅터가 피조물을 만드는 과정

그리고 이 영화가 AI 시대에 만들어진 영화였다는 것을 인지하고 나니, 감독이 왜 결말을 이렇게 내었는지 조금 이해가 되었다. 감독은 크리처에 천착하는 사람이니 휴머노이드라는 크리처에도 관심이 있었을 것 같다. 그렇다면 피조물을 우리가 곧 마주할 휴머노이드의 일종으로 상정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우리와 휴머노이드의 바람직한(?) 관계를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려고 한 것이 아니었을까. 즉, AI가 등장한 이 시대에 피조물(휴머노이드)을 빅터가 아들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휴머노이드도 감정을 느끼는 존재로 받아들여주어야 한다는 결론을 엔딩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나는 AI가 인간의 언어를 배움으로써 이미 감정을 배웠고 감정에 합당한 반응까지 배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독의 결정을 이해했다.(메리 셸리의 시대에는 노예 해방이 이슈였다. 피조물이 힘이 세고 덩치가 크다는 것이 흑인 노예의 이미지였다. 그래서 노예와도 인간처럼 함께 살아갈 수 있지 않겠냐는 희망을 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ps.

나는 영화가 소설보다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단 영화는 생산하고 유통하는데 거대 자본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고, 생산과 유통의 비용이 충당되려면 상업적으로 성공을 해야만 하고, 상업적 성공을 얻어내려면 영화의 만듦새가 시대에 걸맞는 교훈을 주는 등 사회적 역할도 해야 하고, 대중적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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