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르고 단순하게 ] 30년간 내가 거쳐온 집들에 대해
1. 나는 전주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내 기억의 첫 집은 1층짜리 벽돌 주택이다. 삐걱거리던 나무 마루, 번쩍이는 니스로 마감되었던 천정. 옥상과 아주 작은 앞마당이 있던 집이었다. 똑같이 생긴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보급형 주택단지.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온 동네 아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노래하며 골목을 돌아다녔고 그 친구들과 함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역사적인 88올림픽이 열리던 해였다.
2.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빠는 4.5 년마다 전근을 하셨다. 우리 가족은 아빠를 따라 전주에서 한시간 떨어진 면소재지로 이사 갔다. ‘동헌’이라고 불리는 옛날 관청이 있던 작은 마을이었고 우린 사택으로 지정된 목조 주택에서 살았다. 부모님은 일본 사람들이 살다 두고 간 집이라 했는데, 아마도 적산가옥이 아니었나 싶다.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부엌이 있었고, 방 두 개는 마당으로 나 있는 복도를 지나 들어갈 수 있었다. 열두 살까지 산 이 집은 내 유년의 중심을 차지했다.
집 앞엔 네모 반듯한 큰 정원이 있었다. 양 옆으론 아름드리 플라타너스와 은행나무도 서 있었다. 여름이면 은행나무 아래 평상에 드러누워 놀다가 큰 대야에 물을 받아 물놀이를 하곤 했다. 집 뒤 언덕에선 꽃뱀이 마당으로 내려오기도 했는데 그 시절 동네에서 뱀을 보는 건 흔한 일이었다. 집 앞 개천에서도 종종 맑은 녹색을 띠는 가녀린 물 뱀 한 마리가 휘리릭 지나갔고, 나뭇가지에 매달려 혓바닥을 날름거리기도 했다.
아직 수세식 화장실이 완전히 정착되지 않은 시기이기도 했다. 본채와 떨어져 마당에 있던 재래식 화장실의 오물을 정기적으로 퍼줘야 해서 냄새 고약한 ‘똥차’가 일 년에 한두 번 오고 갔다. 가스나 기름보일러도 없었다. 온수가 나오지 않아 겨울이면 연탄 불에 물을 끓인 후 깊고 큰 대야에 옮겨 몸을 담갔다. 남동생과 나는 해 질 때까지 집 옆에 있던 학교 운동장에서, 오래전 누군가 빠져 죽었다는 방죽 근처에서, 동헌의 툇마루에서 놀곤 했다.
3. 우리 집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될 때 다시 전주로 이사 왔다. 부모님은 십 년 이상 모아놓은 전 재산으로 3000만 원짜리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5층짜리 다섯 개 동으로 구성된 20평 아파트. 집 앞에 큰 초등학교로 전학했는데 한 반에 50명이 넘었고 한 학년이 열 반 가까이 되었다. 아빠는 운전면허를 따고 자가용을 구입하셨다. 더 이상 아빠의 전근에 따라온 가족이 이사할 필요가 없어졌다. 또 나의 방과 남동생 방이 생겼다. 그 집에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며 10년을 살았다.
4. 대학에 입학하며 부모님과 떨어지게 살게 됐다. 2년은 기숙사에서, 2년은 자취를 했는데, 기숙사에서는 매 학기, 매 방학 때마다 방을 옮겨야 했다. 세 명이 한 방을 썼는데, 한 평도 안 되는 나의 작은 공간에는 컴퓨터에 프린트기에 엄마가 갖다 준 전기밥솥까지 한 짐이었다. 3학년부터는 자취를 했다. 학교 근방엔 소득 수준에 따라 주거형태가 계층화되어 있었다. 나는 하위권에 있던 '닭장'에서부터 여름이면 찜질방이요, 겨울이면 냉골 되는 옥탑방, 졸업학기에는 신축 원룸까지 진출했다. 언제나 누군가와 같이 살았다. 혼자서는 월세 감당이 안 되었기 때문에 기숙사에서와 같이 학기마다 방학마다 룸메이트를 구했다. 4년간 같이 산 사람은 스무 명이 넘었다.
5. 대학을 졸업하며 서울에 살게 됐다. 취업하게 된 디자인 에이전시는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땅값, 집값비싸다는 도곡동에 있었다. 타워팰리스 바로 옆 건물이었다. 나는 역세권을 포기하고 한참을 양재동 아래로 내려가 집을 구했다. 보증금 3천만 원은 아빠 명의로 대출받고, 월세 30만 원은 월급에서 냈다. 혼자 살던 남자가 남긴 담배 쩐 내가 방 안 가득 배어 있었지만, 햇볕이 잘 들어오고 방도 널찍했다.
타워팰리스 옆 건물에 있던 월세 200만 원짜리 오피스텔 사무실에서 나는 100만 원이 겨우 되는 월급을 받으며 하루 16시간씩 주 7일을 일했다. 사장은 도곡동에서 멀지 않은 서초동 아파트에 살면서 외제차 두 대를 바꿔가며 출퇴근했고, 직원들 저녁 식대는 물론이거니와 새벽에 퇴근할 때 택시비도 주지 않았다. 나는 매달 40만 원의 학자금 대출도 갚아야 했는데, 월급 100만 원에서 월세까지 주고 나면 생활비도 빠듯했다. 결국 에이전시 생활 일 년을 채 못 채우고 대기업 취업 준비를 했다.
6. 새로운 회사를 다니며 강남에서 강북으로 생활권이 옮겨졌다. 서울의 중심, 광화문과 종로를 사원증을 매고 활보했다. 광화문과 가깝지만 방세가 저렴한 사대문 바로 바깥에 집을 구했다. 서울 중심부와 지척이던 그 동네는 곳곳이 재개발 예정 구역으로 지정되어 낡고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금액이 맞는 곳은 대부분 언덕배기였고 방은 기형적으로 길거나 좁고 어두웠다. 집 구하기를 포기하고 부동산 앞에 막막히 서 있었는데 방금 전 집을 내놓고 가던 집주인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한번 가보기나 하자며 간 집이 그 후로 5년 동안, 결혼하기 전까지 산 집이다.
전세 3500만 원에 관리비 없음. 채광 좋음, 보자마자 바로 계약했다. 버스정류장이 집 앞이었고 지하철역도 5분 거리였다. 운 좋게 집을 잘 구했다고 좋아했는데……그만큼 싼 이유가 있었다. 건축업을 했던 집주인이 남은 건축자재로 마구잡이로 지은 집이었던 것이다. 베란다 여닫이문을 열었는데 문 크기가 베란다 폭보다 커서 30도 이상 열리지 않는달지, 싱크대의 환풍기를 돌리다 봤더니 배기통이 덜컹 잘려 있었던 거랄지, 계단에 난간이 없달지, 화장실 바닥과 벽면에서 계속 물이 샜던 거랄지. 가끔 출현하는 바퀴벌레는 애교였다. 어둡고 좁은 골목을 거쳐야 들어갈 수 있던 이 집은 여자 혼자 살기엔 험해 보였다. 그런데 안전했다. 집주인 내외는 그 건물 반 지하에서 살고 있었는데 집 관리를 하지 않아 집이 폐허처럼 보였다. 아무도 그곳에 설마 살림집이 있으리라고 예상하지 못하게 생긴 점이 바로 그 집의 ‘안전함’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5년간 관리비도 월세도 내지 않고, 전세금을 올려주지도 않고 살았다. 그래서 결혼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7. 나는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 직장을 구했고 나처럼 허름한 집에 살던 남자와 결혼했다. 우리는 신혼집을 서울 동쪽 끝에 구했다. 오래되고 낡은 동네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난잡한 상업지구도 아니었고 어수선한 재개발 지역도 아닌 ‘주거지역’이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하루하루 버텨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언젠가는 떠나리라 맘 먹지만 좀처럼 떠나기 쉽지 않은, 좁고 어둡고 음침한 낡은 빌라들이 촘촘히 붙어있는 그런 동네가 아니었다. 서울 토박이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아늑하게 자리 잡고 사는 동네 같아 좋아 보였다.
우리는 각자 6년간 일하며 모아놓은 돈을 합쳐 신축 빌라 투룸을 구했다. 그때만 해도 1억에 가능했다. 둘이 살기에 딱 좋은 크기였고 깨끗하고 아늑했다. 겨울이 오기 전까진.
그해 겨울 100년 만에 한파가 닥쳤고 보일러가 얼어버렸다. 방풍비닐을 덧대고 극세사 커튼을 달고 옷을 겹겹이 껴입고 가스보일러를 한 달 20만 원어치 넘게 틀어도 오들오들 추웠다. 집 주인은 고장 난 보일러를 고쳐주지 않았다. 세입자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발뺌했다. 문제는 이듬해에 또 터졌다. 터진 보일러에서 미세하게 새기 시작한 물이 부실시공된 베란다 바닥으로 스며들며 1층 주차장 천정까지 번진 것이다. 집주인은 우리 과실로 돌리며 돈을 물어내라 했다. 공사 잘 못해놓고 보일러 고쳐주지도 않고 생긴 누수를 우리 보고 물어내라니, 줄 수 없다고 하자 전세금을 가지고 협박했다. 결국 우리는 몇 십만 원의 돈을 물어주고 집을 나왔다. 집 주인은 우리가 나가자마자 그 집 전세를 50% 올렸다. 2012년. 전세가 폭등의 시작이었다.
8. 내가 회사를 옮기며 우린 경기도로 내려왔다. 둘 다 직장이 서울이 아니니 굳이 집값비싼 서울에서 살 필요가 없었다. 서울로 바로 가는 직행버스가 있는 신도시에 자리 잡았다. 전세가가 치솟고 매매가는 오르지 않아 차이가 점점 좁혀지던 무렵. 우리는 ‘에이, 20년 다 된 아파트를 누가 이 돈을 주고 사. 오르지도 않을 텐데.’ 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집 값 계속 떨어진댔어. 누가 요즘 집을 사냐...’ 하며 지하철역 바로 앞 17년 된 아파트 전세를 구해 들어갔다.
부모님 집을 떠나 10년 만에 아파트 생활이었다. 나에게는 비로소 집 다운 집이었다. 안방과 베란다, 방 세 개가 있는 사각형 집. 그러니까 이제 '방'이 아니라 '집'에 살게 되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문을 닫으면 아늑한 익명성 속으로 숨을 수 있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집. 20여 년에 걸쳐 잘 자리 잡은, 온통 아파트로 가득 찬 동네는 가까이에 마트, 병원, 도서관, 체육관, 공원이 있어 편리했다. 비슷한 평수의 아파트에 비슷한 생활 수준과 소득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비슷한 모양새로 사는 것도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아파트에서 산다는 건 최소한 우리가 가난하지는 않다는걸, 뜨내기가 아니란 걸 증명해 보이는 것 같았다. 신도시 특유의 합리성도 좋았다. 철저히 서울 인구 분산을 위한 주거지역으로 계획된 도시. 빈틈없이 잘 구획된 도로에 저마다 역할에 충실한 공간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자리 잡은 곳. 여기엔 누구나 자기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산다는 것. 여기에서 태어나고 자란 성인은 아무도 없다는 것도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13층 우리 집도 좋았다. 이 집에서 아이를 가졌고, 중고차도 한 대 마련했다. 하지만 바람만큼 오래 살지 못했다.
9. 집주인이 집을 판다고 해서 전세 계약 2년이 끝나기 전에 또 집을 알아봐야 했다. 우린 이 동네를 떠나기 싫었기 때문에 바로 옆 아파트로 이사했다. 이때도 집을 살 생각을 못했다. “집을 사면 10년은 살아야 할 텐데 20년 된 아파트는 너무 낡았잖아.?” 무엇보다 이미 너무 올랐다고 생각했다. 더 오르진 않을 거라 믿었다. 언제나 우리가 갈 수 있는 집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솔직히 전세로 살아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10. 다시 이사한 집은 17층이었다. 하루 종일 햇볕이 들어오던 멀쩡해 보이던 집은 들어와서 살아보니 엉망이었다. 17년 동안 전세만 돌린 집은 애정 어린 관리를 받지 못했다. 작은 방엔 보일러가 들어오지도 않았고 베란다 결로가 심해 겨울을 한번 나자 곰팡이가 새까맣게 끼었다. 집주인은 집 수리를 모른 척했고 우린 버티고 버티다 직접 고쳐나갔다.
아이가 태어나고 정신없이 하루하루가 흘렀다. 아파트의 익명성과 아늑함은 아이가 태어나자 ‘고립된 섬’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또 2년이 되기 전, 집주인이 집을 매매한다고 내놓았다. 전국은 전세대란으로 들끓었고 온 동네 아파트가 2년 전에 비해 최소 1억에서 2억 이상 올라 있었다. 부동산 경기는 바닥을 찍고 거침없이 치솟는 중이었다. 우린 또 이사를 해야 했다. 그리고 이제는 선택해야 했다. 어디에서 살지(live), 그리고 집을 살지(buy) 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