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고 게으르게] 우리가 주택을 선택한 이유
남편과 나는 둘 다 운이 좋았다. 졸업과 동시에 취업했고 한두 번의 이직을 거치며 IT기업에서 경력을 쌓았다. 명문대 출신, 외국 연수 경험, 공모전 당선, 인턴 경력, 외국어 실력 같은 스펙 없이도 순조로웠다. 2000년대 중반, IT 산업 호황기에 디자이너와 개발자였던 우리에겐 길이 많이 열려있었다. 우리는 근면 성실한 노동자로 경력 공백 없이 일했다. 사회생활 6년간 돈을 차곡차곡 모았다.
번듯한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었지만 신혼부터 전세 대출금이 나가면 돈을 못 모을 거란 생각에 실리적인 선택을 했다. 결혼식과 가구 가전 구입 비용을 가능한 한 줄였고, 예산 내에서 가능한 서울 변두리의 방 두 칸짜리 집을 구했다. 2010년,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아직 부동산 경기가 침체되어있던 시기였다.
결혼 후에도 바로 아이를 가지지 않고 자산 증식에 몰입했다. 우린 통장을 합쳤고 공동생활비, 각자 용돈, 경조사비, 자기계발비, 휴가비를 나누어 매달 지출을 일정하고 엄격하게 통제했다. 펀드, 적금을 비롯한 금융상품에도 분산 납입했다. 둘 다 늦게까지 일하느라 돈 쓸 새도 없었거니와 외식과 문화생활, 쇼핑도 즐기지 않아 생활비 지출도 적었다. 주말엔 주로 공원 산책이나 등산을 했고 해외여행은 저가 항공을 타고 갔다. 자가용도 없었다. 양가 부모님 모두 일을 하고 계셔 부양비 지출도 없었다. 우리는 아이가 없이 맞벌이 하던 3년간 알뜰살뜰 돈을 모았다. 그렇게 우린 둘 다 약 10년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경기도로 내려오며 집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무리한 대출을 하지 않는 선에선 20년 가까이 된, 고칠 것 투성이인 낡고 작은 아파트만 가능했다. 집을 산다면 10년 이상 살 것이니까, 아이도 낳고 키워야 하니까, 30평 대 이상으로, 지어진 지 10년 이내의 아파트를 사야 한다고, 그 정도는 갖춰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가진 돈으론 턱없었다. 낡지만 작은 아파트 대충 고쳐 살다 적당한 시기에 팔면 그만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 생각은 못했다. 번듯하고 좋은 집이고 싶었다.
빚도 자산이라는 시대. 둘 다 매달 안정적 수입이 있었기 때문에 2억 이상 대출받아 ‘하우스 푸어’로 살 수 있는 충분한 자질과 조건도 갖추고 있었지만 매매는 망설여졌다.
첫 번째, 빚 때문에 인생을 저당 잡히기 싫었다. 하기 싫은 일을 빚을 갚으려고 억지로 하며 살기 싫었다. 학자금 갚으며 청춘을 회사에 바친 채 살아온 인생이 할 소리는 아니지만 남은 인생이라도 여지와 낭만을 두고 싶었다. 지나고 나서 보니 몰랐다. 빚 말고도 인생을 저당 잡는 건 많고, 빚을 갚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인생 대부분은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산다는걸. 빚 있다고 불행하게 살고 빚 없다고 자유롭게 사는 것도 아니었다. 빚 없이 살기 힘든 세상, 빚을 자연스럽게 끌어안으며, 빚이 부여하는 무거운 성실함으로 하루하루를 채울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두 번째, 집값이 하락할 거라 믿었다. 2011년-12년까지만 해도 넘쳐나는 미분양으로 집값 폭락이 올 수 있다는 예측론이 횡횡했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그런 기사만 쏙쏙 골라봤다. 대출을 받아서라도 집을 구매하는 이유는 매매가보다 떨어지지는 않으리란 믿음 때문 아닌가. 아무리 실거주 목적이라도 해도 말이다. 떨어질 수 있는 집을 대출 잔뜩 받아 산다는 건 무모했다.
예상과 예측은 보기 좋게 틀렸다. 집값은 떨어지지는커녕 고공행진을 계속했다. 지나고 나서 보니 몰랐다. 대한민국에서 집값은 떨어질 수도 없고 떨어져서도 안 되는 거였다. 누구나 집이 없을 땐 집값 하락을 원하지만 일단 내 집이 생기면 상승을 바라기 마련. 내 집 마련하겠다며 대출받아 아득바득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집값 하락은 모든 꿈을 붕괴시켜버리는 것이었다. 1300조 원의 가계부채. 집값이 떨어지면 천문학적 금액이 거품처럼 날아가는데 어찌 떠 바치지 않을 수 있을까. 정부가 아무리 부동산 투기 규제정책을 펼쳐도 집값은 오르고 또 올랐다.
세 번째, 집값 상승을 기대하고 집을 산다는 건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 최전선의 기업에서 일하고, 착실히 재테크하고,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주체로서 살아온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부동산을 통한 자산증식이 불로소득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집으로 돈 번 사람들에 대한 시기심, 그리고 도덕적 우월감의 발로였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저 정도는 아니야”라는. 또 회사 다니면서도 돈 모을 수 있다는 순진하고 치기 어린 자신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아무리 자본주의에 비판적이며 진보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부동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걸. 일정하고 안정된 수입이 있는 중간계급들 대부분은 집으로 재산을 유지하고 증식하고 있다는걸. 안전하고 편한 주거는 최소한의 살 권리이지만, 집의 가격은 후퇴를 모르고 상승하고, 은행 이율은 낮고 어디에도 안전한 투자처가 없는 상황에서 목돈이 집으로 몰리는 건 당연한 현상일 수밖에 없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다는 욕망까지도.
이런 고민도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겐 사치란 걸 안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라는 드라마에서처럼 80년 생 남자 주인공은 ‘하우스푸어’라도 될 수 있지만 88년 생 여자 주인공은 ‘하우스메이트’ 밖에 되지 못하니까. 우리가 집 구입이라는 고민이라도 할 수 있는 건 지금만큼 취업난이 심해지기 전 정규직으로 안정된 직장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었고, 전세가 치솟기 전이었고, 직장이 서울에 있지 않았고, 경기도에 살 수 있어 가능했다. 나보다 5년 늦게 결혼한 남동생만 해도 대기업 정규직이지만 전세금 반을 대출받아 신혼집을 마련했고, 앞으로도 서울에 사는 한, 집 매매는 어렵다.
전세살이도 나쁘지 않다며 자조했지만, ‘우리 집’이 갖고 싶다는 욕망도 고개를 들었다. 남편은 전세 만기 되기 전 몇 달 전부터 집을 알아보자며 재촉했다. 주변에서 다들 집을 사는데 우리만 사지 않았다며, 더 오르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했다. 마침 1703호 주인도 집을 판다고 했다. 작은방은 얼음장이었고, 방충망 구멍은 숭숭 뚫려 있었고 인터폰은 고장 나서 경비실과 연락조차 어려웠던 그 아파트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와야 했지만 차라리 후련했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취업했고 결혼을 한 친구들은 신혼집부터 대출받아 아파트를 사거나 늦어도 몇 년 안에 집을 마련했다. 부동산 침체기에 집을 사서 폭등기를 거쳐 적게는 1억에서 몇 억까지 집값이 상승했고 그만큼 자산증식을 이루었다. 사정 들어보면 여전히 대출이 남아있고 집의 반은 은행 것이고 아무리 오른 집이라도 팔아야 내 돈이지만 겉보기에는 그랬다. 우리는 극적인 자산증식 기회는 놓쳤지만 결국 지금이라도 집을 사는 게 낫다는 결론을 냈다. 2년 후 전세가 또 올라 지금 매매가와 비슷해진다면 차라리 지금이라도 집을 사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남들은 진작에 다 한) 계산에 뒤늦게 도달했다.
하지만 여전히 예산 내에서 사자니 낡고 오래되었으며 새 집을 가자니 비쌌다. 당시 아파트 단지 근처엔 지하철역 공사가 한창이었고 17년 된 20평대 아파트가 2-3년 전보다 1억 가까이, 10년 이하 아파트는 2억 이상 올라 있었다.
“우리가 꼭 이 동네에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 동네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 공원, 산책로, 소아과, 크고 작은 마트, 체육관, 서울까지 접근성, 남편 회사까지의 거리, 넉넉한 보육기관.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이점은 많았지만, 그것들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비용을 더 지불해야 했다. 열심히 머리 굴려가며 ‘가성비’를 따져보았지만 아무래도 지금 이 동네에 집 사는 건 ‘끝물’ 같았다. 우린 살던 동네를 포기하고 아래로 내려가보기로 했다.
예산에 맞는 집들을 보러 다녔다. 매 주말마다 네 다섯 채의 집을 보았지만 하나같이 하나가 마음에 들면 다른 하나가 마음에 안 들었다. 조용하고 공기가 좋고 집이 깨끗하면 교통이 정말 안 좋았고 교통이 좋으면 집 상태가 안 좋았다. 더 아래로 내려갔다. 없었다. 더 아래 지역으로 내려갔다. 또 포기했다. 더 아래로 내려갔다.
남편은 대출을 더 받아 역세권 근처 새로 개발되는 지구에 분양받자고 우겼다. 조감도엔 30층 넘는 주상복합아파트가 각을 잡고 서 있었다. 남편 회사로 통근하기에도 좋았다. 그런데 이때는 내가 이미 회사를 그만둔 후였고 아이를 낳은 후 일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수입은 반 토막 되었고 지출은 훌쩍 늘어나 있었다. 무엇보다 하늘을 찌르며 치솟은 고층 아파트를 보니 ‘집이란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묻고 싶어졌다.
아이에게 좋은 환경을 주고 싶었다. 나의 유년을 떠올렸다. 여덟 살부터 열두 살까지 살았던 시골 주택. 매일 마당에서 흙장난을 하고, 풀을 캐고, 소꿉놀이를 하고, 엄마와 참외를 따고, 툇마루에서 비 내리고 눈 내리는 걸 보던 집. 부모님이 어떤 고생을 하며 집을 가꿔왔는지 알 턱없고, 좋았던 기억만 떠올렸다. “우리 애도 나처럼 마당 있는 집에서 자라면 좋을 텐데.....” 시골에서 살면서 얻은 정서가 나에게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믿음, 사실 그 영향력은 아주 미미하게 남아있지만, 그땐 그리 믿고 싶었다.
땅콩주택 열풍으로 소형 주택단지가 곳곳에 건설되고 있었고 수시로 기회를 엿보았지만 너무 비싸 엄두도 못 냈다. 마당 있는 집은 어디까지나 환상이요, 꿈이었지, 고려 대상은 아니었다. 저층 아파트 1층을 알아보는 정도로 만족했다. 베란다 앞에 작은 텃밭이 있고 5층을 넘지 않아 시야가 탁 트인다면 좋겠다 싶었다. 몇 주에 걸쳐 집을 보러 다니다가 그럭저럭 위치, 예산에 맞는 집을 구했다 싶었을 때, 우연히 분양 중인 주택단지를 알게 되었다. 아파트 질려있던 무렵 한번 마당 있는 집 구경이나 가자며 분양사무소를 찾았고, 그리고 그날 바로 잔여분 중 한 채를 계약하고 말았다.
대체 뭐를 믿고.
집을 살 땐 환급성을 고려해야 한다. 우린 끝없이 그 점을 따져왔고 그래서 집을 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치밀하고 신중한 판단력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계약한 주택은 원래 살던 곳에서 차로 40분을 더 내려가야 했고 남편 회사까지 통근시간도 그만큼 길어졌다. 단지는 산 밑이라 주변에 편의 시설이 전무했다. 근처엔 어린이집이 없어서 차량으로 다녀야 했다. 무엇보다 집이 지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땅만 있었다. 담당자는 단지 앞이 개발되면 땅값도 집값도 오를 거라며 설레발쳤고 그 말을 믿고 싶었다.
우린 눈이 멀었다. 그래서 보고 싶은 것만 보았다. 살면서 했던 대부분 선택들처럼 따지고 또 따지고 계산하고 재어본 후, 전혀 엉뚱한 선택을 했다. 대학, 회사, 결혼, 출산에서처럼, 불과 몇 달 전엔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포클레인이 파고 있는 땅을 보며 설레었다. 지금 터 닦으니 5개월 후면 완공된다고 해서 이사 시기와 비슷하겠다고, 시기도 딱 좋다며 뿌듯해했다. 걸어서 15분 거리에 시내가 있었고, 지하철역도 있고 초등학교도 있으니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남편 출근시간은 한 시간이 넘었으나 그는 괜찮다며 자신했다. 우린 꿈에서나 그리던 나의 집 짓기를 현실로 실현할 수 있음에 설렜다. ‘그림 같은 우리 집이 생기는구나‘ 행복했다.
그땐 그랬다.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또 몰랐다. 집 짓기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도, 주택에 살기 위해선 어떤 노동이 필요한지도 모르고 일을 저질렀다. 또 1년 후 어떤 사건이 생길지, 어떤 후회를 하게 될지 그때는 정말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