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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Jul 13. 2018

샌드위치가 된 엄마들

[요즘의 육아가 힘든 이유 (5) ] 밖은 미세먼지, 안은 노키즈 

각종 기술 발전과 복지혜택에도 불구하고 왜 엄마들에게 부여되는 '육아'는 과중해질까. '요즘의 육아가 힘든 이유'에선 어린아이를 키우며 겪는 못 자고 못 먹는 육체적 어려움 이외에 '육아 방법'과 '환경조건'이 과거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살펴 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 글에선 아이들의 미래가 전적으로 부모의 역량에 달렸다는 확신 하에 부모들이 어마어마한 비용과 노력을 지불하며 자식의 인생을 기획함을 지적했습니다. 두 번째엔 전문가들의 말조차 상반되는 다양한 육아법의 범람에서 부모들은 길을 헤맬 수밖에 없다고 썼습니다. 이번 글에선 현대 사회의 장시간 노동, 제약적인 도심 환경이 어떻게 육아를 어렵게 하는지 보고자 합니다. 


노동의 세계와 배치되는 돌봄의 세계 

아이를 키우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건 육아 자체보다 남편과의 관계, 점점 소원해지는 가족의 친밀감이었다. 남편은 자정 넘어 퇴근하는 날이 잦았고 회사에서 강요하는 야근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런 남편을 미워했고 회사를 증오했고 사회를 원망했으며 나의 처지를 한탄했지만 우린 둘 다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 남편은 자정 넘어 퇴근하는 날이 잦았고 회사에서 강요하는 야근을 거부하지 못했다. (사진은 KBS 드라마 <고백부부> 스틸이미지)



'한 명이라도 직장에서 성공해야 우리 가족에게 도움이 된다. 돈 버는 일이 육아보다 중요하다.' 

'일에서의 성공'과 '육아라는 돌봄의 시간'은 양립할 수 없었다. 시간 외 근무, 초과 근무를 기꺼이 하고 새로운 영역에 유연하게 적응해가며 자기 계발을 해야 직장에서 성공, 아니 최소한 도태되지 않을 수 있고, 연봉이 오르며, 그래야 아이를 대학까지 수월하게 교육시킬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노력은 우리의 '공동육아전선'을 방해하고, 종국엔 식구들 사이를 삭막하게 했다. 아이는 아빠를 낯설어했고 나도 남편에게 마음을 닫았다.  

고용은 불안정하고 직장 내의 경쟁도 심해지므로 남편은 남편대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중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일을 많이 하면 우린 안정된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아니었다. 돈 버는 자와 아이 보는 자로 나뉘어 각자의 역할에만 충실할 뿐 대화는 끊겨가고 정서적 친밀성은 떨어졌다. 허울만 가족이었지 실상은 남보다 못했다. 경제적으로는 탄탄해질까? 남편 혼자 한 오라기 동아줄을 붙잡고 무거운 부양의 짐을 짊어지고 있기에 오히려 위태롭다. 

둘 다 직장에 다닌다면 다를까. 일하는 개인들은 기댈 곳 없이 비틀거리는 무한 경쟁의 사다리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이 와중에 다른 가족의 도움 없이 육아와 일에 양쪽 다리를 걸치고 있는 여성들은 가랑이가 찢어지다가 한쪽에 걸친 다리를 놓아버리곤 한다.  

놓지 않는다고 해도 '출산과 육아로 인한 단절 없어 성공 가능성 높은' 남편들을 회사에 헌신하도록 밀어주기가 태반. 아이가 아파 전화가 걸려오면 달려가는 건 대부분 엄마다. 또한 장시간 근무 체제에서 여전히 누군가는 초과 근무를 할 수밖에 없다. 극소수의 직업군을 제외하곤 같이 저녁을 먹는다거나 함께 매일 일정한 시간을 보내기는 불가능한 삶이 되었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직장 다니고 집 있으니 '안정된 삶'을 살리라 상상했던 '홈 스위트 홈'은 어디에도 없었다. 가족은 너무도 연약하고 취약했으며 언제든 바깥 세계의 노동에 자리를 내어줘야 했다.  

가족이 서로를 '돌본다'는 건 무얼까. '밥 해주기, 청소하기' 혹은 '돈 벌어오기'만이 아니라 '함께 시간을 나누고 보내기' 아닐까. 그런데 우린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돈을 버는 걸까? 돈을 벌기 위해 가족의 틀을 유지하는 걸까?  

"이동성과 유연성이라는 황금 계명에 자기 삶을 바칠 준비가 된 사람은 유리한 조건에서 경력의 사다리를 가파르게 올라가 새로운 노동세계의 꼭대기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지속성, 현존, 신뢰성이 필요한 가정생활의 요구는 이런 상황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 <모성애의 발명>, P190-191 

직장과 사회는 그런 시간을 자꾸만 '쓸모없는 시간', '성공을 가로막는 시간'으로 치부한다. 가족을 위한 헌신을 기꺼이 무시할 수 있는 '능력 있는' 개인을 원한다. 일에 체력 전부를 소진시켜 다른 '돌봄'을 하지 못하도록 기진맥진하게 만들고, 아이와 저녁 먹으려고 일찍 퇴근하는 이를 무능하게 본다.  



어디에서 뛰놀아야 하나  



아이 키우기가 어려워진 또 다른 이유는 '환경' 때문이다. 아파트의 삶을 말해야겠다. 비슷한 평수에서 비슷한 모양새로 사는 삶이 주는 안전함과 안락함. 타인과 차단되는 익명성. 인터폰 하나에 달린 편리함. 나는 도시의 삶, 아파트의 삶이 좋았다. 그런데 아파트는 도시생활에 최적화된 주거환경일지 몰라도 아이를 키우며 단절과 고립의 공간이 되어갔다.  

"유아를 실내에만 두는 건 타잔보고 집에 있으라는 것과 같다." - 하비 카프 <우당탕탕, 작은 원시인이 나타났어요> 

아이에겐 여전히 '원시인'의 유전자가 남아있지만, 인류 탄생 이래 줄곧 바깥생활을 해온 DNA를 억누르고 실내생활을 주로 하는 '신세대'에 속하게 되었다. 하비 카프 교수는 현대의 집엔 바람, 햇빛, 풀, 그림자 대신 딱딱한 벽과 바닥, 시끄러운 장난감, 텔레비전이 주는 시청각 자극이 넘친다고 지적한다. 이런 환경에서 유아는 스트레스를 받고 짜증이 늘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아이가 마음껏 뛸 수 있는 바깥 공간은 한정적이다. 도시의 모든 장소는 목적과 기능에 따라 계산적으로 구획, 조직화 되어있다. 우린 이걸 '질서'라고 부른다. 음식점에서는 앉아서 밥만 먹어야지 서서 놀아서는 안 되고, 마트에서는 물건을 사야지 노래를 불러서는 안 된다. 

"효율성과 계산 가능성, 정확성이라는 현대 소비 공간과 예측불가능하고 전혀 합리적이지 않으며 제어되기 어려운 생기 넘치는 아이들 간의 충돌." 

사회학자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은 이같은 상황을 우아하게 표현했다. 몇 년 사이 첨예하게 드러난 '노키즈존' 논쟁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한마디로 "원시와 문명"의 만남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합리성으로 가득 차 보이는 (문명의) 소비 공간에 비합리적인 (원시인인) 아이들을 어떻게든 규율 속에 밀어 넣어야 하는 것이 부모의 임무"가 되었다.  '노키즈존'의 '옳고 그름'을 떠나  부모들은 '합리적으로 보이는' 현대 공간 안에서 비합리적인 아이들을 어떻게든 제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도심의 공적 공간뿐만이 아니다. 아파트나 집 안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이다. 만지지 못하게, 오르지 못하게, 뛰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그나마 마음 편한 곳은 놀이터 같은 보호지구나 대형마트나 키즈카페처럼 소비자로서 부모를 환영하는 공간이 유일하다. 집 근처에 그런 곳이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부모들은 소비 공간을 배회하면서도 '아이들의 발달을 촉진하고 자연 속에서 자라도록 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그래서 날씨가 좋은 날이면 기를 쓰고 어디론가 데리고 가면서 '자연'과 햇빛 아래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한다. 사실 아이들은 공터만 있어도 흙을 만지며 잘 놀지만, 도시에서 잉여 공간을 그대로 둘 리 없다. 놀이터와 공원이 잘 구비된 신도시나 아파트 단지에 살지 않으면 시간과 발품을 들여 이동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외면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마음껏 뛸 수 있는 공간을 찾아온 끝에 다다른 건 미세먼지 수치 150㎍/m³. 마음 비우고 욕심을 내려놓고 할 것도, 익숙해지고 적응해야 할 문제도 아니었다. 아무리 공기 좋은 산 밑으로 이사 와도, 앞에 너른 공터가 있어도, 숲과 가까운 어린이집에 보내도, 사교육을 많이 시키지 않아도 대기질이 최악일 땐 나가 놀게 할 수 없었다.  

미세먼지 측정기를 구입해서 모니터링하기도 며칠, 노이로제 걸릴 지경이었다. 대기질 확인하고, 마스크 챙기고, 아이를 졸졸 따라다니며 마스크 끼라고 말하기도 엄마의 몫이다. 먹을거리에 이어 숨쉬는 '공기'까지도 신경 써 걸러줘야 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번거롭다고 모른 척할 수도 없다. 유해물질만치나 나쁜 공기에 애 방치하는 엄마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최악의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기  



"오늘날 어머니들은 아이 위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며, 이 사회의 목표는 '최선의 지원'이다. 동시에 어머니들은 객관적 구조상 아이에게 적대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 각각을 분리시켜 본다면 아이를 돌보는 일에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노동이 소요됨을 의미한다.  

(...) 오늘날 어머니들은 불가능한 임무를 위임받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교육노동의 목표가 점점 더 높게 설정되어 '최선의 지원'을 요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점에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조건이 불리해졌기 때문이다." -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 <모성애의 발명>, P151 


요즘 엄마들은 아이에게 최선의 조건과 환경을 베풀어야 한다고 사방에서 외치는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도 아이 키우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구조에 둘러싸여 있다. 아이들의 욕구와 감정을 받아주고 싶지만(아이들을 마음껏 뛰어놀게 하라! 함께 시간을 보내라!) 현대 사회의 조건 자체가 돌봄의 시간을 수용해주지 않는다. 도심의 환경은 아이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으며 양육자들은 피곤함에 찌들어 있다.  

'엄마의 의지'에 달린 걸까? 모든 건 핑계일까? 기를 쓰고 노력하며 이겨내든, 적당히 타협하든, 요즘의 육아는 끊임없이 구획하고 조여드는 외부 환경과 아이를 위해 추구하라는 사랑 사이에서 벌이는 분투 같다.  최악의 조건 속에서 최선을 해내야 한다. 부모들, 특히 엄마들이 "샌드위치 같은 위치"(<모성애의 발명>, P151)로 전락했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닌 것이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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