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81년생 이지영”이다. "작은 지영"은 학창 시절, 나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학창 시절, 우리 반에 "지영"이라는 이름이 나를 포함 두세 명은 있었다. 나는 거기서 "작은 지영"인 적도 있고, "중간 지영"인 적도 있었다. 내가 "중간 지영"이었던 것은 우리 반에 "지영"이라는 이름이 3명이었다는 뜻이다. 그럴 때마다 같은 이름이 가리키는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내 이름 앞에는 형용사가 붙었다. 그 형용사를 붙이는 기준은 보통 키순일 경우가 많았는데, 나는 "작은 지영"이거나, "중간 지영"이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나랑은 성이 다른 지영과 가장 친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 우리를 볼 때마다 다른 친구들은 "쟤네는 "같은 지영"끼리 붙어 다니네~"라고 말했다.
이 흔하디 흔한 이름에 <82년생 김지영>이라는 베스트셀러 소설은 내 이름을 “국민지영” 반열에 올렸다. 김연아에게 붙는 “국민 여동생”, 수지에 붙는 “국민 첫사랑”처럼 넓은 범위의 사람에게 인정돼서 통용되는 “국민”이라는 수식어.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로도 나왔을 때 “지영”은 80년대생의 여자를 지칭하는 일반명사쯤 되는 이름이 되었다.
이 흔하디 흔한 내 이름이 특별해지는 계기가 생겼다. 그 특별함이 내 인생을 고달프게 해서 문제가 되기는 했지만… 18살이 되자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으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으러 동사무소에 갔다가(그 당시는 주민센터가 아니라 동사무소라고 불렀다) 예상치 못한 일로 내 이름에 사건이 생겨 버렸다.
발급 된 주민등록증을 마주했을 때, 다른 글자는 흐릿하게 보였고, 이름만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낯설고도,어색하고,우스꽝스러운이름이 표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내가 잘 못 본게 아니었다. 그 선명한 잉크자국이 새겨진 이름은 "이지영"이 아닌 "이지령"이었다.
보통 지영이라 하면 "지혜 지"에 "영리할 영", 아니면 "꽃부리영" 자를 쓴다는데 내가 쓰는 한자인 "들을 령(영)" 흔한 한자는 아니라고 했다. 두음법칙의 맞춤법 표기법에 따르면<첫소리가 ㄴ,ㄹ 인 한자가 단어의 첫머리에 올 때, 현실발음에 따라 ㄴ,ㄹ이 탈락되거나 변한 소리대로 표기하고 ㄹ은 어떤 모음이든 모음 앞에서 변화를 겪는다>고 되어있다. 고로, 내 이름, ㄹ로 시작되는 "령(영)"은 두음법칙에 따라 "영"으로 표기가 무방하였다. 그런데, 그때 당시 컴퓨터기능의 한계로 내가 쓰는 "들을 령"자는 “영”으로 전환이 어렵다고 했다.
다른사람의 이름의 변화따윈 관심없는 동사무소 담당자의 무심한 설명앞에 내가 할수 있는것은 무엇이었을까?주민등록증을 받아 든 내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나는 그 주민등록증을 받은 날부터 카오스의 대혼란이 시작되었다. 시스템 한계의 습격! 나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이름의 공격에 무참히 당하고만 있었다. 우선 나를 증명하는 모든 시험을 "이지령"으로 응시해야 했다. 그 후로 모든 문서상의 내 이름은 "지령"이 되었다. 그 이름 탓에 나는 수능시험도 "지령"으로 응시했고, 대학에서도 "지령"이 되었다. 한 번은 전공 관련 자격증 시험을 보러 갔다가 감독관이 나에게 "이지령"씨는 북에서 어떤 지령을 받고 내려왔냐고 농담을 했다. 나는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하는 심정으로 희미하게 웃어넘겼지만 초면인 사람이 내 이름에 건네는 농담이 유쾌할리는 없었다. 나는 "지령"이라는 발음이 주는 거북함을 견딜 수 없어 대학 친구들에게 지영이라고 불러 달라고 말해야 했다. 어떻게 문서상 "지령"이 되었는지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냥 두음법칙에 따라 "지영"이라고 불러 달라고 말할 뿐이었다. 나는 그때 왜 하필 흔하지도 않은 한자를 써서 내 인생을 이다지도 고달프게 할까.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 이름이 흔한 것도, 구차하게 변명하는 것도 싫었다.
그 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주민등록증을 분실해서 다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으러 주민센터(그때는 주민센터가 되었다)에 갔을 때, 컴퓨터 기능의 발전으로 “들을 령”자를 “영”으로 전환이 가능해져서 자연스레 "이지영"으로 발급되었다. 나는 주민등록증을 받아 들고, "지령"이 아닌 "지영"으로 불러질 수 있음에 감격했다. 이제는 "지령"이라는 이름 앞에 수없이 “지령?”이라고 확인하듯 되묻는 물음에 두음법칙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어떤 지령을 받고 왔냐는 조소 섞인 농담에 화끈거리지 않아도 되고, "지영"이라고 불러 달라고 구차한 부탁 따위 안 해도 되니 나는 비로소 "지영"이라는 평범함에 감사했다. 대중 속에 묻힐 수 있다는 마음의 안정은
평범함의 행복을 느끼게 해 주었다.
"지영"으로 이름을 되찾아 감사했지만, 발음상 편의를 되찾은것. 그이상, 그이하의 애정도 없었다. 브런치 스토리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필명을 갖고 싶었다. “82년생 김지영”이 사람들 머릿속에 살아 있는 한 내 이름은 80년대생 여자를 지칭하는 일반명사일 뿐이니까. 나는 “윤슬”이라는 필명을 지었다.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에 비추어 반짝이는 잔물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잔물결의 풍경을 좋아하여 "윤슬"이라는 단어를 품은 지 오래되기도 했고, 글은 누군가 읽어 주어야 의미가 살아나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공감되는 글을 써서 읽는 이로 하여금 반짝일 수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담은 이름이었다. 그런데 "윤슬"이라는 어감이 주는 이미지가 나와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았다. "윤슬"이라는 어감 속에 순정만화 속 가녀린 여주인공이 연상되었다. 컵에 담긴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처럼 이름과 내가 섞이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누군가 나를 윤슬님으로 호칭하며 댓글 단 것을 보고, 나는 마치 주먹을 꽉 쥔 아기의 손발처럼 내 손발이 오그라듦을 느꼈다. 고민이 시작되었다. 필명을 바꿔야 되나.
그러다 어느 날 딥박작가의 이름에 대한 글을 보고 나도 내 이름 "지영"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나는 내 이름의 뜻을 새기며 천천히 발음해 보았다. "기록 지", "들을 령".지... 령... 무언가를 깨달은 양, 내 안에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요즘 어느 때보다 더 열정적으로 기록하고, 쓰기 위해 깊이 듣고 있지 않은가!!
' 내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구나… '
친구와 잘 지내다가 뭔가 마음에 들지않아 나 혼자 삐져놓고선 토라져 있었구나. 깨달은 순간, 내 마음이 풀릴때까지 말없이 나를 기다려 준 친구와 화해하는 기분이 들었다.
문득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지난날 살아왔던 "지령"은 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그저 어감이 거북하다는 기분에 함몰되어 괴로워했던 시간이었다. 지금 와서 의미를 되새기니 지금의 나에게는 가장 잘 맞는 이름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애정이 솟았다. "지령"이라는 이름이 마흔이 넘은 나에게 비로소 꽃이 되었다.
이 이름을 필명으로 바꿀지는 여전히 나에게는 어려운 선택이다. 하지만 국민이름에, 평범하지 않은 발음, 두음법칙까지 구차하게 설명해야 했던 지난 나의 과거를 긍정하고 이 이름과 화해하게 된 것만으로 시원함을 느꼈다. 마치 내 몸에 쌓인 찌뿌둥함을 몰아내는 기지개를 켠 것처럼.
* <그 후... 에필로그>
그래서 브런치 필명은 " 윤슬지령" 이 되었습니다.
읽는 이로 하여금 반짝이는 글(윤슬처럼)을 쓰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기록하고 (기록 지 誌) 깊이 듣겠다는 (들을 령 聆) 마음을 담은 이름입니다. 마흔이 넘어 이름과 화해하며, "지령"
이라는 이름을 비로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필명 " 윤슬지령" 과의 만남에 꾸준히 쓰는 삶을 다짐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제 글은 딥박 작가님의 책 <글쎄>의 영향을 받고 이름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 글을 썼음을 밝힙니다.
수채화 느낌의 그림이 너무 아름다운 그림책이에요. 저는 이 책에 쓰인 헌사가 너무 근사했어요.
< 아름다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소중한
이름들에게 >
이름들에게 헌사를 바치다니요~^^ 저는 이 헌사가 이름을 가진 모든 존재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는 말처럼 들렸어요.
친구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 외로운 할머니는 자신보다 오래 살 것들에게만 이름을 지어 줍니다. 오래된 집, 침대, 낡은 자가용처럼 영원히 사는 물건들에게만 말이지요. 그런 할머니에게
어느 날 갈색 강아지가 나타나요. 할머니는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것 같은 존재에게는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요. 혹여나 할머니가 남아서 존재를 그리워하는 외로움이 싫었던 거지요.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고, 나에게 존재를 들이는 의미이니 할머니는 그 다정한 관계형성이 두려웠던 거예요. 할머니와 갈색 강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나에게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고 관계 맺는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하는 그림책 <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였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싫어하는 "라울". 라울은 자기 이름이 싫대요. 데굴데굴 굴러가는 공 같다며 우스꽝스럽고 이상하다는데요. 그런 라울에게 친구 "자코트"는 "라울"이라는 이름이 멋진 이름임을 일깨워 줍니다. 자코트는 라울이라는 이름에 어떤 긍정의 의미를 말해줬을까요? 이름은 다른 이가 불러주는 나이지요. 내 이름의 긍정은 내 존재의 긍정과 다름없어요. "라울"도 저처럼 이름과 화해할 수 있을까요?^^
이 그림책을 보고 오늘 내 아이에게 이름의 뜻을 이야기해 주는 건 어떨까요? 아이는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때마다 이름의 뜻을 기억하며 자랄 거예요.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면서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