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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지령 Aug 01. 2023

아무튼, 아줌마

전업주부

어느 날이었다. 아이친구에게 한동안 게임칩을  빌려주었는데 아이친구의 엄마가 게임칩을 돌려주면서 고맙다고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건넸다. 아이도 다른 걸 하느라 그 게임칩을 안 하고 있던 터라 빌려줬을 뿐인데 과한 선물을 받는 것 같아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부담스러운 마음을 드러냈더니, 아이친구 엄마는 “나는 돈을 벌잖아요~”라고 말하며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극구 나에게 들려주었다.
나는 감사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쩐지 “나는 돈을 벌잖아요~“라는 말이 귓가에 웽웽  맴돌았다. 그분은 정말 나쁜 의도가 아니었음을 안다. 오히려 내가 손사래를 치니 선물을 전해주시려고 나온 말이라는 것도 너무 잘 알아서 전혀 그분의 마음을 오해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나의 자격지심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결혼을 하면서 일을 그만두었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직종이었기 때문에 근무시간이 순환제로 돌아가는 것에 지쳐있기도 했고, 그때는 신혼이었으니 남편과 주말을 온전히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주말근무를 하는 것도 싫었다. 물론 주 5일 40시간이라는 법적근로기준은 지켜졌지만 365일 휴일 없이 돌아가는 직종특성에 숨이 막혔다. 공부한 것에 비해(석사) 적은 보수나, 불안정한 고용조건도 내가 그만둔 이유 중 하나 일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그 일이 즐겁지가 않았다.


 나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스스로 경력단절의 길을 선택하면서 아이 키우고 집안일을 하는  '아줌마’가 되었다. 경력은 단절되었지만 나는 이 아줌마의 길이 좋았다.  안정감을 추구하는 내 기질상 아이도 나도 안정감이 느껴지는 이 상태가 좋았다.  나는 우선 아이를 내가 키우는 게 좋았다. 나는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들이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했고, 아이가 커가는 모습들을 눈에 담고, 오롯이 내가 함께 한다는 것이 좋았다. 아이와 그림책을 함께 보고, 그림책의 세계를 알게 되면서 아이의 시선이 아닌 나만의 감정과 시선으로 새로운 세계에 감응하는 엄마로서의 내가 좋았다.

전업주부의 삶을 만족하면서도 때로 어딘가에서 설문조사를 할 때 직업 란에 ‘전업주부’라고 쓰는 것이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대학원공부까지 하고, 나름대로 내 인생의 커리어를 위해 20대의 시간을 다 써 버렸는데 결혼하고 나서의 ‘전업주부’라는 단어는 왜 이렇게 나를 인생의 허무로 밀어 넣었을까?


 그러다가 어느 날  그림책 관련된 줌강의를 들었다. 1인출판사인 글로연 대표이자 편집장이신 오승현 대표님의 강의였다. 그분은 본인이 출판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설명하면서 "나는 '아줌마 출신'인데 내가 할  수 있을까…"라고 말문을 여시면서 처음 출판사를 시작할 때의 이야기를 해 주셨다. 나는 그 ‘아줌마 출신’이라는 말에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아줌마 출신'이라는 단어가 멋지게 들려왔다. 나에게는 '아줌마'라는 대상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승현 대표님은 아줌마로 집에서 늘 아이와 함께 하면서 내 아이가 부족한 부분이 보였고 내 아이는 내가 제일 잘 알기에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책을 직접 만들어 보고 싶어 출판사를 만들었다고 하셨다. 1인 출판사였기에 처음에 책을 만들 때 동네 이웃 등의 아는 지인이 모두 동원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0년 동안 20권의 그림책을 출판하며 본인의 아이로 출발했던 출판사는 현재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을 위해 책을 펴내는 출판사가 되었다. 나는 강의를 들으며 ‘아줌마 출신’으로  전업주부에 불과했던, 오승현 대표님의 성장이 진심으로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나는 ‘아줌마 출신’으로 시작해 멋진 성장을 이룬 분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업주부로서 일하고 글과 예술의 성취를 이뤄낸 작가들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독서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결혼해서 평온한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글을 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가,  40대가 되어서야 등단한 '박완서' 작가는 우리나라 현대문학의 대가였다. 소설 [프랑켄 슈타인]의 저자 '메리셸리'  [프랑켄 슈타인]을 쓸 당시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되어 이 작품을 써냈. '메리셸리'는 (결과물들은  많은 산책과 드라이브, 많은 대화에서 나왔다)고 말했고, 항상 아침에 글을 쓰고 오후에 집안일을 하고, 저녁에 책을 읽는 일상을 엄격하게 지켰다고 한다.

 

주위를 돌아보니, '아줌마 출신'으로 전업주부의 역할을 하면서 성장하는 주부(경제적으로 연결 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성장이라고 부르고 싶다)들은 무수히 많았다. 대표적으로 우리 엄마는 시부모님을 모시면서 아이 셋을 키우며 아빠가 회사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내조하며 사셨다. 뚝딱뚝딱  빠르지만 맛있게 만드는 반찬 솜씨는 장인급이다.  멋지게 손뜨개로 옷을 만드는 K주부, 정리 수준이 전문가 못지않아 집이 언제나 단정한 J주부, 훌륭한 식재료로 요리를 잘해 근사한 플레이팅을 잘하는 C주부, 아이와 교감하며 아이들과 놀며 엄마표로 교육하는 B주부등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적인 실력을 갖춘 전업주부들이 내 주위에는 너무나 많았다. 나는 ‘아줌마 출신’들의 감춰있던 능력이 보이기 시작했다.


TV 프로그램인 '알쓸인잡'에서 ‘invisible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방송을 본 적이 있다. 평소에 일이 잘 돌아갈 때는 인식하지 못해 눈에 띄지 않지만 일이 잘못되었을 때는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공항도로표지판을 관리하는 직원이라든지, 도로 교통 신호 체계관리자, 도로위생관리사 분들부류였다. 우리 사회의 간극을 눈에 보이지 않게 메우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일상을 지켜내는 작은 영웅들.

나는 ‘아줌마 출신’의 전업주부일도 일이 잘 되어 있을 때는 모르다가 일이 잘못되거나 안 되어 있을 때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invisible(보이지 않는)의 대표적인 부류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오늘  깨끗한집은  어제 그대로의 집이 아니다. 치우고 닦은 오늘의 결과물이다.  전업주부는 우리 사회의 일상을 눈에 보이지 않게 지켜내고 있는 직업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나의 아줌마 경력을 적어보기로 했다.

* 나의 아줌마 경력

1. 주부경력 11년 차

2. 만 9살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음

3. 평일에 남편이 편안하게 자신의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육아, 가사를 전담함.

4. 일상을 소중하게 가꾸는 소소함을 갖길 좋아하여 가족들에게 일상의 행복을 느끼게 하는 요소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음.

5. 그림책, 동화책, 인문학, 소설, 수필 모든 책을 사랑해서 대화거리가 풍부함. (아이를 낳은 후 독서의 폭이 넓어짐) 아이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아이와 공감대가 좋음.

6. 아들은 아빠와 엄마가 싸우면 무조건 엄마 편을 들어줄 정도로 아이를 내편으로 만드는 기술을 알고 있음.

7. 밤마다 여전히 아이와 잠자리 독서를 함께해서 아들과 늘 함께 울고, 웃으며 책을 통한 기쁨을 알게 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음.

8. 아이와 정서교감놀이 만드는 노하우를 알고 있음. 아들과 함께 만든 정서교감 놀이로는

1)  애정노래( 보름이는 사랑둥이, 귀염둥이, 엄마 아들, you are my sun, you are my sunshine 까꿍~)

2) 우리만의 암호(우리는 딱딱 딱이야~)

3) 사랑인사( 보름아, 엄마, 우린 운명이야)

4) 학교 하교 후 만나서 하는 인사등이 있음.

9. 아이의 입장에서 헤아리면서 교감하는 능력을 주전문분야 경력으로 쌓으려고 노력하고 있음.


나의 아줌마 경력이었다. 나도 언젠가 ‘아줌마 출신’입니다만…이라고 나를 소개하면서 내가 가진 아줌마 능력을 발휘하게 될 날을 꿈꾸어본다.  


어디선가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마차가 굴러가게 하는 것은 ‘노동자’가 아닌 노동자를 무상으로 재생산해주는 ‘주부’이다.

나는 이글에 감응하며 눈에 안 보이게 사회적 간극

 을 메우고 있는 아줌마 출신 전업주부라는 것에 자긍심을 갖기로 했다.  이 글을 보는 그대도 전업주부라면 부디 그러기를 바란다. 그대는 이미 그러기에 충분하니까.



*  엄마의 그림책

굉장히 유쾌한 그림책이에요.^^

어느 날 꿀꿀한 기분에  '후루룩 짭짭 미용실'에 머리를 하러 간 아줌마.

매일 같은 머리만 하던 아줌마는 자신의  라면머리를 보고 충격이기보다 신선함으로 다가와 새로운 에너지를 받아요. 라면머리 아줌마에게 신비한 능력이 생긴 거냐고요? No, No~~ 라면아줌마는 호호아줌마처럼 커졌다, 작아졌다하면서 모험을 하는 아줌마는 아니에요. 우리 주변의 아줌마 모습,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백수가 된 남편을 대신해 가장이 되기도 하고, 도넛가게 알바생, 라면요리사도 되는데요. 그 모습이 억척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발랄하고, 긍정적이면서, 행복한 아줌마의 모습이에요.

특별한 무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소중한 우리 가정을, 일상을 지키려는 우리 아줌마들의 모습을  닮은 것 같아 저 또한 뭉클하면서도 새로운 힘을 얻은 그림책이지요.^^

진정한 마술의 힘은 특별한 게 아니라 일상을 지키는 힘이 아닐까요? 그런 아줌마의 힘을 보여주는 유쾌,발랄한 그림책입니다.

근데 단점이라면요...이 책을 보고 있으면, 라면냄새가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독자님도 자신도 모르게 라면물을 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니까요.^^


글밥이 제법 많은 그림책이에요. 제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우리 이웃의 아줌마 모습이 스며있거든요.

제각각 다른 능력의 소유자들말이죠. 

제목처럼 세 아줌마의 특성이 이야기 속에 드러나있어요. 주변에 있을 것 같은  이웃 아줌마들이죠. 참외를 서리해갈까 봐 매서운 눈초리의 초록아줌마, 생강과자를 열심히 구워 나눠주는  인심 좋은 갈색아줌마, 수를 놓아 옷을 짓는 보라아줌마는 우리 주변에 있는 아줌마 같다니까요.

이 책의 작가 (엘사 베스코브)는 (1874~1953년) 의 시대를 살았어요. 그림은 요즘 화풍과는 사뭇 달라요. 그래서 더욱 그 시대의 의상과 시대등 세밀한 그림을 보는 재미가 있으니, 아이와 그림도 즐겁게 감상해 보세요.^^


제가  애정하는 저의 인생 그림책입니다.

주인공 '올가'는 자기만 간신히 들어갈만한 좁고 작은 가게'키오스크'에 살아요. '올가'는 한번도 키오스크 밖을 나온 적이 없어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저에게 질문을 던졌지요. (에게 키 크란?) 벗을 수 없는 그무엇. 저는  "제 가정"이는 생각을 했어요.  근데 그 절대 무엇이 올가미가 아니라 그냥 저의 세계인 거죠.

'올가의 키오스크'처럼 말이죠.

그런 '올가'에게 우연한 계기로 키오스크가 뒤집어지면서 강으로  떨어지는 사건이생겨요.

'올가'는 키오스크를 벗어나지 못한채, 뭘 어떻게 해보려 하지도 않고, 그대로 강물에 몸을 맡깁니다.

편안히 흐르고 흘러 새로운 곳에 오게 돼요. 올가는 새로운 사건의 계기로 키오스크가 들려진다는 것도 알게 됐고,  그 속에서 또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전업주부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육아, 살림을 하면서 새롭게 보이는 눈이 생기게 돼죠. 그것이 요리든, 뜨개질이든, 저처럼 아이와 함께 보다가 눈 뜨게 된 그림책이든 말이죠.

독자님의 키오스크는 무엇인가요? '올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단골손님의 특징을 파악하고 있었고 다정했으니까요. 그 다정함으로, 새로운 행복을 발견하는 능력! 그게 올가의 능력이 아니었을까요? 저는 이 그림책을 보며 항상 (마지막 면지 그림이 다했다!)고 말하곤 해요. 키오스크가 뒤집혀 떠밀려온 그곳의 풍경이 너무나도 아름답거든요. ^^

우리가 흘러 흘러 있는 우리의 지금 자리에서도 꼭 그와 같은 풍경을 바라볼수 있음 좋겠습니다.

 "키오스크" 꼭 한번 감상해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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