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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롬 Aug 10. 2020

 아픔 속에 잊힌 자유

<노예 12년> ⭐⭐⭐⭐

흑인 노예라는 인권 영화이기 때문에 굉장히 무겁고 심오한 태도로 영화를 봤다. 진중한 고증과 시대적 배경의 재연은 당시 19세기 미국의 삶을 체험하는 듯한 연출이었다.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는 인종차별과 어디선가 아직도 존재할 거 같은 노예제도를 생각하게 만드는 진지한 영화였다. 그리고 변화를 원해도 변하지 않는 세상의 냉소적인 면도 느껴지는 영화이기도 했다.


#사진 밑으로 스포가 있습니다.


<노예 12년> 中 솔로몬[플랫](치웨텔 에지오포)

롱 테이크(Long take)

<노예 12년>은 흑인 노예의 모습을 가까이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이 노력을 바로 '롱 테이크' 촬영을 통해 보여준다. '솔로몬'이 백인 감독관과 시비를 붙자 나무에 목을 매달아 놓지만 '포드'(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명령으로 가까스로 땅이 발에 닿으며 목숨을 부지한다. 이후 '포드'가 올 때까지 목에 밧줄을 묶인 장면을 편집 없이 그대로 보여준다. 외로이 묶여있는 '솔로몬'의 뒤로 하나둘씩 자기 일을 하기 시작하는 다른 흑인 노예들은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 설령, 도와주더라도 굉장히 소극적이고 은밀하게 도와준다. 도와준다면 그들의 목숨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 어쩔 수 없는 개인주의적 성격을 낼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은 밧줄로 자유가 묶인 흑인 노예들의 처지와 밧줄을 풀고 살고자 하는 '솔로몬'의 절박함이 느껴진다. 

 자신을 팔아넘긴 사람들을 고발하는 편지를 보낼  기회가 오자 망설이는 '솔로몬'의 모습을 클로즈업하며 찍은 롱테이크 촬영은 자유를 주장하던 초반의 자신과 달리 오랜 기간 노예 행동으로 빚어진 그의 무기력함, 보복에 대한 두려움, 가족과 만남을 원하는 그의 절실함 등 복잡 미묘한 '솔로몬'의 감정을 극대화한다.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노동과 반비례로 빠르게 흘러가지 않는 시간의 경과를 보이기도 하다. 


19세기 미국

 실화가 담긴 인권 영화이기 때문에 고증 역시 잘 재연했다. 흑인이라는 인종의 인권을 무시하고, 억압하는 야만적인 19세기 미국을 바라볼 수 있다. 언제나 자유와 평등을 외치는 미국의 과거 모습과 왜 자유와 평등을 외치게 되었는지 그 계기를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시대상의 지식을 배울 수 있고, 영화에 몰입된다.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촬영된 하얀 대저택은 <장고:분노의 추적자>에서 나온 대저택과 같은 장소에서 촬영한 거 같다.


회색 인간

 대체로 흑인 노예를 데리고 가는 부자 백인들의 성격은 이기적이고, 흑인을 개처럼 부려먹는 폭력적인 성격을 다룬다. 절대악을 그려야 당시 아픔을 더 강하게 표현할 수 있다. 물론, 실제 악한 성격으로 흑인 노예를 이용한 악덕 주인도 있지만 영화는 절대 악인 인간보다 더 많을 수 있는 회색 인간도 연출한다. 대표적으로 '포드'가 있다. '솔로몬'과 함께 사들인 또 다른 노예 '엘리자'(아데페로 오두예)가 딸과 아들이 있자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딸만이라도 같이 사들이려 한다. 하지만, 판매자가 딸의 가격을 올리는 탓에 엘리자 가족을 지키려는 양심을 온데간데없이 엘리자만 산다. 둘을 사들인 이후에 일은 시키지만 주말마다 직접 흑인들 앞에서 성경 구절을 읊으며 나름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기도 하고 목에 묶인 '솔로몬'을 구해주며 밤새 그를 지켜주기도 한다. 인간을 돈으로 사서 친절을 베푼다. 선과 악 중간을 드러내는 '포드'의 태도를 보며 인간에게 절대선과 절대악은 없어 보인다. 어찌 보면 인간에게 절대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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