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년에 거의 한 번밖에 오지 않는 서귀포에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소파에 드러누워 휴일을 만끽하고 있었다. 휴대폰으로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니, 주인공들이 테이크아웃 식사를 가져와 햇빛 내리쬐는 마당에서 먹는 장면이 나왔다. 이내 배가 고파졌다. 인간은 스스로를 합리적이고 지적인 생명체라고 믿지만, 역시 그렇지 않다. 그냥 남이 먹으면 나도 먹고 싶다. 충동은 소리 없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보통은 그런 충동에 지배되는 것을 경계하는 편이다. 하지만 1년에 한 번 만나는 눈 내리는 주말인데 좀 느긋해져도 좋지. 하고 생각하며 드러누운 자세 그대로 배민 앱을 켰다. 시간은 11시 반이었다. 일요일이다 보니 오픈된 매장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 보니 만만한 것이 맥도날드였다.
맥도날드, 평점 4.3
배민의 별점들을 구경하면 재미있다. 개인이 하는 가게들은 어지간히 별로인 경우가 아니면 종합평점이 그렇게 낮지 않다. 하지만 거대 프랜차이즈 매장들은 더 혹독한 평가를 받는다. 치킨 섹터에선 KFC가, 패스트푸드에서는 맥도날드가 유독 다른 매장보다 평점이 낮다.
하지만 거대 프랜차이즈에게 평점은 중요하지 않다. 브랜드 인지도가 있는 그들은 언제든 사람들이 찾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도 욕을 할 때는 있지만, 선택지가 바닥난 결정장애의 날이 왔을 때 다시금 맥도날드를 찾을 것이다.
나 역시 같은 마음으로 맥도날드 화면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보니 얼마 전에 이효리가 넷플릭스에 나와 피쉬버거를 드라이브 스루로 시키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전까지는 생선 커틀릿이 든 햄버거는 먹어 볼 생각을 한 적도 없었다. 굳이 왜?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괜히 어떤 맛인지 호기심이 들었다. 과연 어떤 맛일까? 이왕이면 생선 커틀릿 두 장이 들은 것으로 하자.
장바구니에 메뉴를 담고 결제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런데 이상한 메시지가 떴다. "배달 가능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매장에서 주문을 취소했습니다." 그리고 자동으로 환불이 되었다. 드러누워 있던 나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눈 때문인지 배달이 잘 되지 않나? 창 밖을 보았다. 서귀포의 눈은 그렇게 하드코어 하지 않다. 이미 도로는 거의 다 녹아있고, 구름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야자수에서 눈이 녹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 이곳은 서귀포가 아닌가!
게다가 맥도날드는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다. 말 그대로 거실에서 맥도날드의 거만한 M자 로고가 보인다. 이 집에서만 맥도날드를 50번은 시켜먹었을 것이다(물론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매장에서 내 주문을 취소시키다니. 심지어 '배달 가능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어찌 되었든 이유야 있을 것이다. 시스템 에러인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맥도날드에게 내 주문을 취소당하다니. 일찍이 느낀 적 없는 새로운 패배감이었다. 이런 일도 겪을 수 있구나. 맥도날드에게 무시당할 수도 있구나. 배민을 수놓은 수많은 매장 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후의 보루로 찾는, 마지막 선택지에게도 까일 수 있구나. 심지어 베이컨 토마토 디럭스나 쿼터 파운더도 아니고 피쉬버거에게...
패배감과 허기가 수준 낮은 칵테일처럼 불쾌하게 뒤섞여 나의 마음을 후벼 파기 시작했다. 누워 있지만 편하지 않았다. 이런 경험은 처음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다. 절대 무시당하지 않을 거라고 안심하던 상대에게 허를 찔리는 그런 때.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소개팅 상대를 만났는데, 예의상 애프터 신청을 했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거절당한. 말하자면 그런 기분과도 비슷하다.
소개팅 애프터에 거절당한 것도 이제는 까마득한 옛날 일이라 잘은 기억이 안 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