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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머리 제이슨 Aug 08. 2020

고급 슬리퍼의 굴욕

 나는 맨발로 다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조금만 더워지면 바로 슬리퍼를 신기 시작한다. 그리고 추워서 못 견딜 때까지 슬리퍼를 신는다. 대기업에 다닐 때 가장 싫었던 것 중 하나가 여름에 슬리퍼를 신지 못하고 양말을 신어야 하는 것이었다. 출근하는 것 다음으로 싫었다. 마지막에 다닌 외국계 회사에서는 팀장님이 입고 싶은 대로 입으라는 주의였고, 슬리퍼를 허용해 주신 것은 크나큰 애사심으로 이어졌다. 그 무렵부터는 1년에 6개월 정도는 항상 슬리퍼만 신고 다녔다. 서귀포로 이사 온 후에는 1년에 8개월은 슬리퍼를 신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슬리퍼 구매에는 나름의 원칙과 철학이 있다. '비싼 슬리퍼는 비싼 몸값을 한다'가 나의 지론이다. 그렇게 지난 7년 가까이를 신고 다닌 슬리퍼가 하나 있다. 명동의 한 백화점에서 충동구매했던 핏플랍(fitflop) 슬리퍼였다. 당시에 나온 슬리퍼 중 가장 비싼 편이었고, 가장 두꺼웠다. 그러면서도 깃털처럼 가벼웠고, 튼튼했기 때문에 오래도록 신었다. 

 하지만 바야흐로 시대는 흘렀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했고, 내 슬리퍼의 수명도 다해가기 시작했다. 근처 대학교에 디자인 강의를 두 개 나가기로 결정이 되면서, 스스로에게 작은 선물을 할 겸 새 슬리퍼를 사자고 마음을 먹었다. 어떤 것을 사야 할까? 오랜만에 인터넷 쇼핑을 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이미 무엇을 살지 결정은 되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의 슬리퍼 구매에는 나름의 원칙과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것을 사자. 


 그렇게 예전 슬리퍼와 같은 것을 사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국내외 쇼핑몰을 전전하며 7년 동안 신었던 슬리퍼의 이름이 Freeway Pool Slide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고속도로 수영장 미끄럼틀이라니 알 수 없는 이름이다. 그리고 중간에 모델 변경이 생기며 내가 신었던 남색에 흰 밑창이 있는 슬리퍼는 단종되고, 고급스러운 가죽으로 처리된 올블랙 모델로 바뀌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도 같은 모델이 있다는 것이 기뻤다. 오히려 검은 옷만 입고 다니는 내 입장에선 블랙 슬리퍼가 더 어울릴 것도 같았다. 


 해외구매대행업체는 왜 항의 메일을 보내는 순간부터 배송이 시작되는 걸까. 하지만 한 달을 기다려 끝끝내 배송을 받았다. 앞으로 7년은 신을 텐데 한 달 정도는 기다릴 수 있다. 두껍고 견고해 보이는 미제 골판지 박스를 열었더니, 내가 기존에 신던 것과 똑같이 생긴, 하지만 올블랙 가죽으로 훨씬 고급스러워 보이는 슬리퍼가 들어 있었다. 밑창 두께가 옛날 것보다 세 배는 두꺼웠다. 예전 것을 그만큼 오래 신었던 것이다. 아내에게 큰 마음먹고 산 새 슬리퍼를 뽐내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아내의 반응은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고등학교 국사 선생님 슬리퍼 같아."


 "무슨 소리야?! 이게 얼마나 비싼 건데."


 "왜 머리 약간 벗겨지고 사투리 엄청 심하게 쓰는 그런 선생님 있잖아? 맨날 뒷짐 지고 다니는."


 "..."


 "수업 중에 가까이서 보면 입 주변에 거품이 살짝 나오는 그런 선생님이 신는 거."


 "..."


 "아웃렛 매장에서 철 지난 골프 셔츠 사 입을 때 같이 산 거 같아."


"..."


"직업의식도 없어서 수업 중에 애들 자습시키고 몰래 사우나 갔다 오는 그런..."


"그만!"


 나는 심기가 상당히 불편해졌다. 하지만 아내의 비유가 너무 구체적이고 적확해서 맞받아치기도 까다로웠다. 역시 여자들의 말발을 이기기란 쉽지 않다. 


 "웃기지 마. 이건 슬리퍼계의 롤스로이스라고 불리는 핏플랍이라고! 나의 프리웨이 풀 슬라이드(검정 레더)를 깔보지 마! 나는 이걸 신고 어디든 갈 수 있어!"


 그렇게 소리친 다음날, 수영장에 가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슬리퍼를 신고 나섰다. 역시 새것이라 밑창도 탄탄하고 착용감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패션의 완성은 자신감이라고 했던가? 누가 뭐라고 해도 나에게 편하면 그것이 최고의 패션인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검정 터틀넥에 엉덩이 퍼지는 청바지에 회색 뉴발란스를 신었을 때도 그렇다. 심미적으로 인정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의 당당한 태도가 그런 패션을 아이콘화 시켰던 것 아닌가?

 한편, 여름 중에는 중문에 있는 롯데호텔 수영장을 3개월 끊어 다닌다. 서귀포 생활에서 누리는 작은 사치다. 새벽의 호텔 수영장은 텅텅 비어있고, 호텔 사우나와 붙어 있기 때문에 더욱 풍요롭다. 그리고 나는 그에 걸맞은 9만 원(해외배송 포함) 짜리 슬리퍼를 신고 카운터로 들어섰다. 자세는 곧았고, 눈빛에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탈의실로 들어설 때, 짧은 순간이었지만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입구에는 간접 조명으로 불을 밝힌 선반형 신발장이 있었다. 거기에는 손님들의 신발 일부와 내부를 돌아다니는 손님들을 위한 호텔 슬리퍼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호텔 슬리퍼를 집어 들고 자기 신발을 놓는 식이었는데, 문제는 그 슬리퍼들도 검은색이라는 것이었다. 


 아주 잠깐 불안했지만 이내 불안감을 떨쳐 내었다. 검은색이 같아도 밑창 두께가 세 배는 차이 나는데, 설마 이걸 착각하고 신고 들어가는 눈치 없는 인간들이 있진 않겠지? 그래도 혹시나 해서 조금 구석진 자리에 내 슬리퍼를 놓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날따라 수영도 잘 되었다. 손끝에 물이 잡히는 감도 좋았고 1킬로 넘게 수영을 했는데 지치지 않고 힘이 넘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것일까? 


 수영을 끝내고 옷을 입고 돌아가려는데 내 슬리퍼는 보이지 않았다. 어떤 새끼야. 나는 눈에 불을 켜고 다른 손님들의 발을 쳐다보며 탈의실을 훑었다. 리콴유(싱가포르 초대 수상이자 건국의 아버지)처럼 생긴 노인이 있었다. 하지만 키는 리콴유의 절반쯤 되는. 그리고 금목걸이를 하고 있었으며 새하얀 나체를 드러내고 자유롭게 탈의실을 활보하고 있었다. 새하얀 양발을 내 슬리퍼에 꽂아 넣은 채로. 


 "저기요 어르신. 이거 제 슬리퍼예요."


 "아냐 이거 호텔에서 다 신고 다니는 거야."


 "제 거예요. 검은색이라 착각하신 거예요."


 "아 그래? 허허허 내가 착각했구먼"


 할아버지는 슬리퍼를 벗고 바닥에 내려왔다. 슬리퍼를 벗으니 키가 5센티미터는 더 작아졌다. 노인들의 강력한 점 중 하나는 착각했다고 웃으면 거의 모든 문제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웃는 얼굴에 대고 더 화낼 수도 없어서 공손히 슬리퍼를 받아 들고 탈의실 밖을 빠져나왔다. 

 일주일 뒤에 동일한 일을 또 겪었다. 이번에는 젊은 청년이었다. 청년은 밀레니얼 세대답게 자신의 잘못을 신속하게 인정하고 정중히 사과하며 슬리퍼를 넘겨주었다. 그 이후로 나는 수영장에 갈 때 슬리퍼를 들고 들어가 옷장에 보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새 슬리퍼를 아낀다. 누가 뭐래도 9만 원(해외배송 포함) 짜리 슬리퍼의 착용감은 다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말할 때 입가에 거품이 생길 나이는 아직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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