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머리 제이슨 Oct 16. 2019

국수집의 채널 고정

 "다 끝나셨고요, 수납하시고 목요일에 다시 오시면 됩니다."


 꽃샘추위에 바람이 매서운 3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도수치료를 받고 나니 나약한 생물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전신에 긴장이 다 풀리고 기운이 없다. 몸 자체가가 작아진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기운을 차리기 위해 판교역 근처의 한 국수집을 찾았다. 이름은 '가성비 좋은 국수집'이었다. 국수집 이름으로는 성의 없는 듯하면서도 센스 있다. 


 제육덮밥 하나를 시키고 아주머니가 내어 준 멸치 육수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이라 가게에는 손님이 많이 없었다. 혼자 왔던 아주머니 한 분이 자리를 뜨고, 이윽고 아가씨 두 명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가게 밖을 나섰다. 그리고 내가 시킨 제육덮밥이 나옴과 동시에, 등 뒤로 새로 들어온 아저씨 손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잔치국수 하나 주세요." 가게를 들어서자마자 주문하는 자신감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앞으로 지나가는 그 손님의 뒷모습을 보니 머리가 긴 아줌마였다. 분명히 아저씨 목소리였는데? 하는 호기심이 채 가시기 전에 손님은 자리에 앉기 위해 뒤돌아 섰다. 역시나 머리가 매우 긴 아저씨였다. 내가 대머리여서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옛날부터 머리카락이 긴 아저씨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제 가게에는 머리가 긴 남자, 머리가 한 올도 없는 남자, 머리카락만큼은 평범해 보이는 아저씨 두 명만 남았다. 잠시 후 단정한 셔츠에 스웨터를 겹쳐 입은, 피부가 깨끗한 반백발의 점잖은 중년 신사가 들어왔다. 그때부터 내 점심식사의 평화는 본격적으로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친절하신 직원 아주머니가 무심코 틀어놓은 TV에선 건강 상식과 관련된 토크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의사 몇 명과 인기가 떨어진 개그맨 패널들이 출연하는, 종편에서 기획했음직한 그런 프로였다. 나는 TV를 등지고 앉아 제육덮밥을 묵묵히 먹고 있었지만, 방송에서 나오는 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개그맨 사회자가 방정맞은 말투로 외쳤다. 


 “자 이번 주의 주제는 ‘치질’입니다!!!”


 접시에 놓인 제육볶음이 움찔하는 것만 같았다. 강력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브렉시트 찬반 투표 방송이 시작할 때와 작년 말 미국 대선 개표를 시작할 때, 기억을 더듬어 먼 옛날 18대 대선 개표가 시작할 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던 그 기분과 비슷했다. 의사들은 점잖지만 확고한 말투로 치핵과 치루 등, 치질과 관련한 각종 전문용어를 끄집어내었다. 웃음기 하나 없이 치밀하고 적나라한 묘사의 향연이 이어졌다. 개그맨들은 기억을 꼼꼼하게 더듬어 의사들의 설명에 더해 경험담이 섞인 예시를 풀어내었다. 나는 이제 아무런 맛도 느낄 수 없었다. 제육볶음의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제육볶음은 야속했고, 오후 시간의 필연적인 소화불량을 직감했다. 맛도 모를 식사를 목구멍에 쑤셔 넣다가 맞은편에 앉은 나머지 손님들을 쳐다보았다. 나는 TV를 등진 채 소리만 듣고 있었지만 나머지 손님들은? 자막과 표정이 가미된 한층 더 노골적인 화면을 마주했음에도, 손님들은 묵묵히 식사를 이어 가고 있었다


 아줌마 머리를 한 아저씨는 비싸 보이는 블루투스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낀 채 묵묵히 잔치국수를 흡입하고 있었다. 나는 예전부터 머리카락이 긴 아저씨가 블루투스 헤드폰에 돈을 붓는 것을 신뢰하지 않는다.

편, 두 명이 앉은 테이블의 아저씨들은 서로 이야기하느라 바빠 텔레비전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어온 반백의 중년 신사는... 식사를 기다리며 팔짱을 낀 채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치질 방송의 내용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도저히 그 미소를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쓴웃음 같기도 하고, 측은지심 같기도 하고, 회상 모드에 젖은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자신이 주문한 식사가 나오자 그 신사는 절도 있는 손놀림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나는 뭔가 알 수 없는 경외감을 느꼈다. TV에선 속사포처럼 치질에 관련한 설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이 뭐냐면요, 치질 수술을 위해 병원을 찾는 환자 대부분이 십 년 이상 치질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오랜 기간 방치하다가 큰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찾아오는 것이죠.” 식당 아주머니는 TV 리모컨을 잠깐 만지작거리더니, 끝끝내 채널을 바꾸지 않고 다시 내려놓았다. 치질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식사를 끝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돌아오는 차에서 틀어 놓은 라디오에선 김신영의 라디오 프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송에 출연한 이름 모를 여자 아이돌 그룹이 혼신의 힘을 다해 그저 그런 라이브를 불렀다. 이미 도수치료 생각은 까마득히 사라진 상태였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꽤나 모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도 방심할 수가 없다. 


작가의 이전글 혼밥이 모두의 것이 되어버린 이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