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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Dec 27. 2022

2023년의 나

두려움과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산으로 가는 길에 점찍어 둔 솔방울이 있었다. 이 나이쯤 되면 다들 알만한 고급 브랜드의 100% 캐시미어 숄 따위를 점찍어두는 어른이 될 줄 알았다. 암튼, 나는 그 솔방울이 몹시 탐났고 집에 데리고 갈지 말지를 한 달 동안 고민했다.     

 

아무래도 내 손으로 나뭇가지를 꺾는 것은 썩 내키지 않았다. 그래! 그럼 저절로 떨어지면 데리고 가자! 나는 산에 갈 때마다 솔방울이 떨어져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비바람이 몰아쳐도 솔방울들은 멀쩡하게 나무에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그러다 오늘 깨달았다. 나는 분명, 이 솔방울을 지겨워하게 될 것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쓰레기통에 버려버릴 것을. 원래라면 숲 속에 떨어져 다시 흙이 될 운명이었겠지만 나 때문에 온갖 더러운 것들이 모여있는 쓰레기 동산에서 썩어가게 되겠구나.     

 

내 인생도 그럴 수 있겠구나. 누군가 내 인생을 망쳐버리겠다고 작정한다면, 갑자기 내 팔 한쪽을 잘라 갈 수도 있는 게 인생이구나. 아니다. 망쳐버리겠다는 작정 없이 한 행동에도 내 인생이 엉망이 될 수도 있는 게 인생이구나. 내 의지만으로는 안되는구나.  

   

그렇게 솔방울을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찬찬히 그 애들을 올려봤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 솔방울들은 이미 꺾어져서 사스레피 나뭇가지에 껴있었던 것이다. 솔방울만 보느라, 나무를 보지 못했다. 욕망에 눈이 먼다더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내려놓고 다시 보니 전체가 보인다.  

    

나는 큰 깨달음을 얻은 척한 여자지만 냉큼 제자리 뛰기를 해서 솔방울을 손에 거머쥐었다. 그들의 생 따위 안중에도 없는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여자다. 속으로 ‘싫증 나면 다시 숲으로 데리고 오면 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다른 나뭇가지도 냉큼 주워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득템!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뭘까. 그 이모 말처럼 나는 정말 오랜 시간 동안 신중하게 생각하고 고민하고 이상한 결정을 한다.      


일할 때의 나는 거침없었다. 결정해야 하는 일이 시즌마다 수백, 수천 가지였는데 다들 그 과정을 힘들어했지만 나는 재밌었다. 그 누구보다 신속하게 결정하고 결론을 냈었다. 두려움이나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그 단호한 인간이 조금 그립다. 일할 때의 내가 딸, 아내, 친구, 며느리 등등 일 때의 나보다 훨씬 더 똑 부러진다. 지금 그 여자는 어디에 가고 솔방울 하나 줍는데도 한 달이 걸려버리는 여자만 남아 버렸을까.  

    


똑 부러진 여자를 당장 불러오고 싶지만 무엇을 향해 돌진해야 할지 모르는 지금 그 여자도 별수 없을 것이다. 그것 하나만은 기억하자고 말한다. 솔방울을 원하는 맘을 가진 이상 어떻게든 가져야 하는 인간이 나라는 걸. 그 과정이 어처구니없고 지지부진해도 결국은 가지고야 마는, 앞뒤 재지 않고 돌진했던 인간이 나였다는 걸 잊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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