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콜릭은 아닙니다만,
1월 2일 술을 마신 나의 올해 목표 중 하나는 금주였다. 사실 지켜질 리가 없어서 공표하지 않았다. 요즘 나는 웬만해선 취하지도 않고, 주사도 없다. 지금(=1월 2일 저녁) 술을 마셔서 조금 하이하고 솔직하다. 혹시 이게 주사?
음식과 술에 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운 부모님의 영향으로 나는 그것들을 꽤나 두둑하고 얼큰하게 즐긴다. 최근까지도 그 심각성을 전혀(사실은 거짓말. 나는 캐롤라인 냅의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을 몰래 읽었다.) 아니, 진정으로 깨닫지 못했는데, 송년회에도 부어라 마셔라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혹시 나의 음주 습관이 고위험군에 속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주종을 맥주와 와인에서 보드카와 위스키로 갈아탔다. 제길, 영화 소공녀 주인공처럼 나는 위스키를 위해 노동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독주의 배부르지 않게 목구멍을 뜨끈하게 감싸고 향긋하게 넘어가는 느낌이 좋다. 이 술로 만취하는 것은 사치로 여겨지기 때문에 나는 2잔 이상을 마시지 않는다.
그래서 알콜릭이 아니라 부정하지만, 알콜릭은 꾸준히 하루도 빠짐없이 마시는 거라 했다. 매일은 아니고 2일에 한 번 정도잖아?라는 생각을 하며 보드카 1000ml를 3주 만에 혼자 다마시는 내가 무서워지기 시작하는 요즘이다.
아아. 나는 108배도 하고 10년 이상 하루에 1시간씩 운동하는 의지 돋는 여자지만 술만은 끊지 못한다. 그래도 담배는 안 펴서 다행이다. 사실은 또 고백하는데(아아. 이것은 주사인가?) 요즘 담배도 피우고 싶어서 좀이 쑤신다.
1월 5일 마트에 들렀다. 싱글몰트, 블랜딩 위스키, 보드카, 럼, 진 진열대 앞에 서서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술을 고르고 있었다. 막 주류코너로 들어오던 할아버지가 전화통화를 하며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마주 오던 아저씨가 갑자기 할아버지에게 욕을 한다. 아. 뭐지.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 둘 사이에 껴서 위스키만 째려보고 있다.
할아버지는 통화하는 사람에게 욕 한 거라고 항변했지만, 아저씨는 그 말이 안 들리는 듯했다. 둘은 나를 사이에 두고 쌍욕을 주고받았다. 이런 개나리 같은 새끼가! 이런 종만 한 새끼가! 뭔데 이 열여덟 놈이! 그러면서도 절대 거리를 좁히지 않는다.
아저씨는 갑자기 점장에게 가자며 소리친다. 응? 점장한테는 왜 가는 걸까 싶은데 그 둘은 여전히 간격을 유지한 채로 쌍욕을 주고받으며 내 눈앞에서 서서히 사라져 갔다. 주류 코너 앞에 있어서 내가 이런 개싸움을 보게 된 것일까.
위스키 한 병과 빠삐코 소주 2병을 사서 가방에 넣고 지하철을 탔다. 술을 마시려고 1시간 20분이나 걸리는 친구네 집으로 향했다. 술을 잔뜩 넣은 가방을 메고 낯선 동네에 덩그러니 도착하고 보니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나 여기 왜 있는 거지?
초대받은 이들의 술을 모으니 겁나 화려했다. 위스키, 와인, 보드카, 화요 등등에 이미 눈이 뒤집혔던 것 같다. 식욕은 없고 주(酒)욕은 치솟았다. 왜 하이볼은 그다지도 맛있었나. 사실은 술보다 웃음이 고팠다. 내가 아무 말이나 지껄여도 하하 호호 웃어주는 사람들.
결국 담배 한 대까지 피고 몇 십 년 만에 택시 안에서 비닐봉지를 귀에 걸고. 올해가 겨우 며칠 지났을 뿐이지만 나는 이미 올해 제일 창피스러운 짓을 저질렀다.
택시에서 내려 우리 집이 몇 동인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당황했고 아끼던 울코트 앞자락에 토사물이 흘러 있어서 두 번 당황했다. 다음날 그 흉물스러운 잔해들을 물로 처리하고 세탁소에 맡기면서 음식물이 묻었었다고 둘러댔는데 후에 그것이 토사물이냐고 묻는 세탁소 주인의 전화를 받고 세 번 당황했다.
오늘은 1월 16일. 나는 12일째 술을 마시지 않고 있다. 고작 12일인데 자랑하는 내가 어처구니없지만 다가올 설날이 최대 고비다. 다행이다. 내가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서 이딴 글을 쓸 수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