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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May 25. 2023

나는 자연인이다.

눈알이 뱅글뱅글 돌아간다.

백수가 아닐 때의 나는 일주일에 1~2번은 백화점에 들러 시장조사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퇴사 후 더 이상 땀을 찔찔 흘려가며 몰래 사진을 찍고 들키고 멸시의 눈빛을 받아가며 쫓겨나듯 매장을 돌아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매우 행복했다.     

 

백화점은 2주에 한 번 정도 서점을 가기 위해 들리는 장소가 되었다. 최근 몇 달간은 도서관을 애용하느라 들릴 일이 없었는데, 임경선 님의 신간 소식을 듣고 오래간만에 백화점을 갔다가 시공간을 초월한 경험을 했다고나 할까.      


거의 18년 동안 들락거려서 조금의 변화도 눈치챌 만큼 익숙한 공간이 어느새 너무도 많이 달라져서 순간 다른 세상으로 빠져버린 것만 같았다. 내가 알던 브랜드는 그동안 다 망한 것인지 듣도 보도 못한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고 바닥, 벽, 조명 등 모든 것이 지나치게 화려하고 번쩍해서 눈과 고개가 절로 돌아간다. 어지럽다.      


사람들은 왜 다들 멋쟁이인가. 차려입은 것이 고작 모자+선글라스+맨투맨+짧은 데님 반바지+발목 양말+운동화인 나는 이거 이거 오늘 산에 가는 차림으로 들렀다면 아찔 했겠구나.    

  

퇴사한 지 2년이 되어갈 뿐인데 세상은 눈알이 뱅글뱅글 돌만큼 빨리 변했다. 그동안 나는 산길을 걸으며 꿀을 빨고 있는 벌레의 궁둥이를 구경하거나 죽은 것을 해체해서 가져가는 개미군단, 난간 위를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송충이 따위를 보며 히죽거리며 살았던 것이다.


습한 곳에서 버섯을 발견하면 기뻐하고 어제는 굴피나무, 사방오리나무, 싸리나무 같은 것들을 알아냈다. ‘나는 자연인이다.’에 섭외가 들어와도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생활을 했던지라 이 세상의 변화에 덜컥 겁이 났다. 나는 세상에서 튕겨져 나왔구나.      


물론, 지금의 생활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다. 하지만 말이다. 이 낭패감을 뭐라 설명해야 좋을까. 이렇게 지내다간 세상 사람들의 대화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게 되지 않을까. 잘 안다고 생각한 것들이 멀어진 느낌이란 그것이 설사 싫어했던 거라 할지라도 상실감이 들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임경선 님의 책은 재고가 없었고 그만 진이 빠져 재빨리 집으로 향했다. 빨간 불이 켜진 신호등 앞에 서 있으면 반드시 한 명은 아무렇지도 않게 신호를 무시하고 길을 건넌다. 그들은 내 생각과는 달리 무사히 살아서 길을 건너고 나를 앞질러 저만치 나아간다.    

 

사람들이 그를 쫓아 하나둘씩 길을 건너도 초록 불이 들어올 때까지 꼿꼿이 서서 그들을 바라본다.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쯤 빨간 불은 초록 불로 바뀌고 나는 길을 건넌다. 이 세상은 빨간 불일 때 길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지배당하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또 한 번 튕겨져 나온다. 그들의 뒤꽁무니를 보며 경멸까지는 아니지만 명백한 비난의 마음을 품고서 하지만 얍삽한 그들의 두 다리를 부러워하며 집으로 가는 길에 마주친 8번의 횡단보도에서 단 한 번도 빨간 불일 때 길을 건너지 않는 사람이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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