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비 Aug 22. 2023

2023년 여름의 끝자락에서

지금은 이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침 공기에서 미세한 차가움을 느꼈다. 입추의 아침이었다. 그날 이후로 2023년 여름이 끝이 났다는 성급한 생각을 하고 있다. 새벽 공기의 서늘함에 화들짝 잠이 달아났고 해는 눈에 띄게 짧아졌다. 여전히 들려오는 매미 울음소리에 안심이 되면서도 해가 지고 나면 들리는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반갑고 이내 또 마음이 헛헛해진다.  

    

귀뚜라미 ASMR 없이는 잠들 수 없었던 수많은 밤이 생각난다. 지금은 무엇에 기대지 않아도 잘 수 있고 새벽에 쏟아지는 빗소리에 같이 흘러내리지 않고 저절로 행복하다는 말이 튀어나온다. 내일이 온다는 것이 막막하지만 밤이 되면 오늘 하루도 별일 없이 보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밤이 되면 창밖의 풍경은 아주 홀리해진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부처님이 하얀 조명 빛을 받으며 평온히 계시고, 집 앞에 있는 대형 교회의 커다란 십자가가 붉게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 홀리한 풍경을 바라보며 ‘오늘도 살아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한다.      


나는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그것을 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절로 숨이 쉬어지는 것처럼 결국엔 모두가 제 살길을 찾는다.     


지나가는 어린이들이 길고양이를 야옹이라고 칭하는 것에도 미소가 지어진다. 야옹이를 향한 호기심 가득 담은 조심스러운 눈길. 중학생이 되면 절대 손을 잡을 리 없는 어린 형제가 기꺼이 손을 잡고 뛰어가는 모습을 봐도 그렇다. 행복 같은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세상은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은 그런 순간들을 차곡히 쌓아가고 있다.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괴로움이 찾아오면 이 순간들을 떠올린다.     

     


우리 집에는 낚시하는 고양이 두 마리가 있다. 남편은 큰 고양이가 낚싯대를 분실하자 어두컴컴한 어느 호프집에서 다른 고양이의 낚싯대를 훔쳤다. 떳떳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아는지 몰래 큰 고양이 손에 끼워 놓은 걸 나중에야 발견했다. 낚싯대의 출처를 물었을 때 그는 다소 부끄러운 표정을 하고 훔쳤노라 고백했고 나는 그의 등 짝을 후려쳤다.     


이 사소한 사건은 우리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내 기준에서 이해되지 않은 행동을 일삼았고 거짓말을 하고 들켰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그의 행동을 비난했다. 보편타당하다고 여겼던 나의 기준이 점차 그의 숨통을 조였고 그는 점차 자신이 비난받는 존재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지금도 나의 기준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기준이 무조건 옳고, 보편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주관적 판단으로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답답하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받은 비난이 더 아픈 법이다.    

  

지금은 이런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 발자국 떨어져 나와 지난날의 나와 남편을 지켜보며 부족하고 서툴렀던 내 생각과 감정, 행동들을 지켜본다.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같은 짓을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다. 지난 일들을 되돌리고 싶은 허망한 마음을 흘려보내고 현재에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이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여전히 큰 고양이는 훔친 낚싯대를 든 채 인터폰 위에 앉아있다. 작년에 나는 그 애들을 서랍 깊숙한 곳으로 치웠고 굳이 그걸 꺼내어 인터폰 위에 멀찍하게 따로 놓아둔 것은 바로 남편이었다. 언제나 함께 있던 고양이들을 멀찍이 떨어뜨려 훤히 보이는 곳에 전시한 그의 행동에 역시 감정은 생각만큼 따라와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며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물건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무엇이든 못 버리는 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놓았고 물건은 아무렇지도 않게 휙휙 버리는 나는 그 사람을 속 시원하게 버리지 못했다. 이렇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다. 멀찍이 떨어져서 낚시하고 있는 고양이들을 보고 또 지금을 실감했다. 그리고 이런 순간들 또한 차곡차곡 쌓아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